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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순 군인반란사건 & 명령에 불복종한 군인들에 대한 포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2. 16. 22:35

     
    국방부가 12·3계엄 당시 부당한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군인들을 찾아 포상하고, 포상 결과는 승진 인사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밝힌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일병 출신 국방부장관이라는 사상초유의 관리가 다스리는 그 국방부의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사상초유의 발표를 했다. "국방부 감사관실을 중심으로 12·3계엄 당시 위법 또는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등 군인 본분을 지켰던 장병들의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공이 있는 분에 대한 포상·격려가 실시될 수 있을 것"이라는 발표였다.
     
    그래서 많이 혼란스럽다. 나는 '군인은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라고 알고 있으며, 2015년 제정된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제25조)에도 '군인은 직무를 수행할 때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포상한다니 논리적 모순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명령'의 앞에 붙는 '부당한'이라는 수식어이다.
     
    이에 대한 판시도 있는 바, 1997년 대법원은 1979년 발생했던 12·12사태에 대한 판결에서 반란군이 (정승화)육군참모총장과 (정병주)특전사령관을 체포한 행위에 대해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라 범죄행위를 한 경우에는 명령에 따랐다고 하여 부하가 한 범죄행위의 위법성이 조각(阻却)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 阻却: 방해하거나 물리침)
     
    12·12사태 당시 박희도 여단장의 1공수를 출동시킨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다시 3공수 여단장 최세창으로 하여금 직속상관인 정병주 공수특전사령관을 체포하게 한다. 이에 최세창은 박종규 대대장을 거여동 특전사로 보내는데, 이때 거여동 사령부에서 반란군을 막던 사령관 부관 김오랑 소령은 6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하고, 정병주 사령관 역시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12·12사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하극상으로 판단이 어렵지 않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김오랑 소령 역을 연기한 정해인 배우
    고향인 김해 삼성초등학교 앞 공원에 세워진 김오랑 흉상

     
    그런데 명령이 부당한지, 정당한지는 어떻게 판별할까? AI에게 물어보는 걸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성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그 부당성이라는 불확정개념은 정의를 내리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정의가 있다고 해도 현장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이념이 개입하게 되면 부당성은 정당성이 되고, 정당성이 부당성이 되기도 하는 바, 그 정확성이라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8년 10월 일어난 여순(여수·순천) 반란사건 이다. 

     

    여순 반란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2개월 만인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 4·3폭동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상관을 살해한 후 1027일까지 여수·순천 및 인근지역을 무력점령하여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군 지휘관 20여 명이 부하들에 의해 죽었고 주민 2천여 명이 폭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등, 일대는 가히 지옥이 되었다.
     
    경위를 살펴보자면 발단은 위에서 말한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됐다.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하려는 공산세력들이 일으킨 폭동으로서,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의 폭동이 악화되자 육본에서는 대구 6연대 1개 대대, 부산 5연대 1개 대대를 증파하였다. 그리고 10월 15일 여수 14연대장에게 1개 대대를 편성해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이 명령이 일반 우체국 전보로 하달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 전보를 본 좌익사상을 가진 여수우체국 직원이 완전 빨갱이였던 여수 14연대 남로당 책임자 지창수 상사에게 먼저 알렸고, 이 사실을 지창수는 여수 인민위원장 이중업과 남로당 전남도당 책임자 김백동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김백동은 자신의 윗선인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에게 보고했고, 이재복은 다시 지창수에게 명령을 내려 출동을 저지시키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고, 이후의 명령은 14연대 중위 김지회에게 받도록 했다. (김지회는 남파간첩으로 추정되는 자이다)
     
     

    여수 14연대 반란 지휘자 김지회 중위 / 훗날 자리산으로 토껴 빨치산이 되었다가 뱀사골 입구 반선리에서 총상을 입고 죽었다.

     
    잠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당시는 빨갱이들이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쉽게 이해가 된다. 만일 지금 이와 같은 육본 명령이 하달되고 그것이 좌파사상의 통신병에 감청됐다면 필시 자신과 같은 좌파세력에게 전달했을 것이라는 이해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좌·우파 세력을 50대 50, 반반으로 보고 있는데, 해방 이후 몇 년간도 그러했으니 좌·우가 8.15해방 기념행사조차 따로 열 지경이었다. (그때도 세력이 거의 반반으로 백중세였다고 한다)
     
    이해가 쉽게 제주 폭동부터 먼저 얘기하자면, 비극의 4.3사건은 1947년 개최된 3.1절 기념행사 행렬이 미(美) 군정청과 경찰서가 설치된 관덕정 앞을 지날 때, 군중의 일부가 좌경 구호를 외치자 이에 경찰들이 군중을 강제 집압한 것에서 비롯됐다. (* 최초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3.1절 행사 때 어린이를 밟고 지나간 기마경찰에 항의하는 군중에 대한 경찰의 발포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그 어린이를 밟게 된 이유가 좌경 구호를 외치며 공격한 일부 군중에 말이 놀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4.3은 그 발생 원인부터 좌·우의 주장이 다르다)
     
     

    4.3사건이 시작된 관덕정

     
    이 같은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들도 있었다. 이에 당연히 민심이 들끓었고 남로당은 이때다 싶어 분위기를 조직적 파업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1947년 3월 9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였으니 대부분의 행정기관이 포함된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기타 우체국 및 공공회사가 파업에 참여하였다.
     
    남로당의 목표는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들 좌파세력에 호응하는 파업은 점점 번졌고 미군정은 강경대응했다. 사태는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제주도민 500여 명이 체포·구금되며 가라앉았으나 이듬해 3월, 체포된 제주 청년 3명이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며 재점화됐다. 이 사건은 꺼져가던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으니 제주도는 다시 폭발 직전의 용광로로 변했다. 미군정에 반대하는 게릴라 단체인 조선인민유격대가 결성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남로당과 조선인민유격대는 1948년 미군정에 의해 확정된 남한 단독 총선거인 이른바 5.10선거를 극렬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외쳤다. 그러면서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던 바, 1948년 4월 3일 새벽, 350명의 무장대가 경찰지서 12개소와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경찰과 우익단체 또한 강경히 맞서 결국 양측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3사건'이란 명칭은 그 4월 3일의 날짜에서 비롯되었다. 
     
     

    제주 광치기 해변의 4.3추모 공원 기념비석
    4.3 성산 터진목 유적지 표지판
    4.3 성산 터진목 유적지 표석
    4.3 성산 터진목 유적지 표석 내용 / 토벌대에 의한 양민 집단학살 장소임이 적혀 있다.
    제주 4.3연구 유족회와 제주 4.3경찰 유족회가 세운 성산지서 경찰관 희생자 표석 / 학살은 진압군에게서만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빨갱이들에 의한 집단학살도 있었다.
    제주 4.3연구 유족회와 제주 4.3경찰 유족회가 세운 외도지서 경찰관 희생자 표석

     
    이재복으로부터 출동저지 명령을 받은 지창수는 부대 안의 남로당원 40명을 즉시 소집하였고, 14연대의 가까운 부대원들에 대한 포섭에 들어갔다. 이들은 같은 동족을 죽이는 제주 출동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고, 이 말은 다른 부대원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제주는 이미 빨갱이들에 의해 대부분의 지역이 접수된 상태였으나 그들 또한 같은 동족이었음이 분명했던 바, 그들을 죽이기 위한 출동은 아무래도 꺼려졌다. 육군 지휘부의 목적은 살상이 아니라 진압이었지만 어찌 보면 그게 그거였다. 
     
    아울러 지창수 일당은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해 이미 서울을 점령했고 빠른 속도로 남하 중이다, 그러나 우리도 이에 호응해야 한다"며 거짓 선동을 했다. 이에 좌파 성향의 군인들이 순식간에 포섭됐고 지창수는 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실탄을 확보했다. 이어 19일 오후 8시 지창수 상사가 14연대 1대대 군인들이 출동 대기 중인 연병장 연단에 올라가 거짓 선동을 했다. 우리가 제주에 출동을 해 같은 동족을 죽여서는 안 되고, 조국 해방을 위해 인민해방군에 협조해야 한다는 말은 앞서와 같았다.
     
    그리고 출동에 반대하는 우리 군인들을 처치하기 위해 여기로 경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위협을 추가했다. 그러므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연설을 마치자 빨갱이 군인들이 여기저기서 "옳소!"를 외치며 호응했다. 하지만 당연히 반대하는 사병들도 나왔다. 경찰을 타도하고 제주도 출동에는 불응할 수 있어도 인민군에게는 협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러자 빨갱이 하사관들이 그들 중 목소리가 큰 세 명을 끌어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사병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가라앉았다. 그들은 총은 있었으되 총탄은 출동시 지급받기로 돼 있었던 바,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들은 다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결국 반란군과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들에게도 실탄이 2클립 씩 지급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반란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 지창수는 의무장교만 빼고 나머지 장교들은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반란군들은 5중대 주번사관 박윤빈 소위(육사 6기) 를 비롯해 만나는 장교들을 보는 족족 사살했고, 출동 준비를 하던 1대대장 김일령 대위는 총소리에 권총을 빼들고 사무실을 나가려다 총탄 세례를 받고 죽었다. 이후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은 "경찰이 부대를 공격하고 있으니 실탄을 장착하고 집결해야 한다"는 1대대 병사들의 말에 진위도 모른 채 따라야만 했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2대대와 3대대 장병들도 모두 사살되었던 바, 전체 총 20여 명의 장교가 죽었고, 하사관과 사병도 40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후의 상황은 앞서 '박헌영의 남로당과 국가보안법'에서 설명한 바와 같으니, 이들 반란군은 곧 순천을 접수했고, 이어 3개 부대로 편성된 반란군이 남원·구례·곡성.광주·화순·보성·벌교 지역을 접수했다. 그리고 관계 기관들을 털어 쌀과 운동화 등을 지역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인민군이 도착하면 토지도 분배해 줄 것이라며 선동했다. 이에 많은 지역민들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던 바, 점령지역 전체에서 방화·학살의 광란극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좌파 군인들을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는 등 군인들로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이들의 준동은 약 10일 후 국방경비대 7개 연대가 각 지역에 투입돼 반란을 진압하며 끝이 났다. 이후 여순반란사건 및 제주 4.3사건은 사실 그대로 빨갱이 군인들 및 좌익세력의 반란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었고, 이들 좌파 군인들을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군인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념의 안경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보자면 누구라도 이들을  부당한 명령에 항거한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란 진압에 나선 국방경비대 / 여순반란사건의 상징 같은 사진으로 미국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었다. 불타는 민가 모습이 살벌하다.

     
    하지만 최근 좌파세력의 힘이 강해지며 반란과 폭동의 개념이 상실되고 있다. 그리하여 급기야 오늘은 이 나라 대통령이 나서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를 검토하라고 국가보훈부에 지시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박진경 대령은 제주 4·3 진압 책임자로서 작전을 펼치다 남로당 출신의 문상길 중위와 손순호 하사에게 취침 중 암살당한 군인이다. 그는 이미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그의 유가족들이 국가유공자 지정 신청을 냈고 승인을 받았으나 대통령의 지시로 급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이는 나흘 전 보훈청의 박진경 대령  국가유공자 승인에 좌파들이 크게 저항한 데 따른 반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와 같은 권리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월권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관계 부처도 후속 조치에 나섰던 바, 국방부도 박진경 대령의 무공훈장 취소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상 취소된 것인데, 박 대령의 무공훈장 서훈이 취소되면 국가유공자 지정도 소급해서 취소된다고 하는 바,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박진경 대령 / KBS 뉴스 캡처
    이 국가유공증서를 준 권오을은 제주도를 찾아가 좌파단체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제주시 산록도로 한울공원 인근 박진경 대령 추도비 옆에 좌파들이 세운 안내판 / 이 안내판에는 박 대령을 죽인 '암살범들의 주장'만이 담겼다.

     
    위에 게재한 사진에서 보았듯, 학살은 좌우 모두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좌파 측에서 펴낸 <4.3은 말한다>라는 책을 보면 박진경 대령은 좌파들의 수백 명 학살설과는 달리 제주 체류 40여 일 동안 인민유격대(빨치산) 23명을 사살한 것이 전부이며, 문상길과 손순호가 박 대령을 취침 중 암살한 것은 이미 계획된 김달삼과 오일균 등의 제거 공작에 따른 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달삼은 4.3사건 진압이 거세지자 북으로 달아났다가 6.25전쟁 중 전사했다. 그의 묘는 평양 혁명열사릉에 있다.
     
     

    평양 혁명열사릉의 길달삼 묘 / 김달삼은 1948년 월북하여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및 주석단에 선출되어 북한의 인민공화국 창건에 참여하였고,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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