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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헌영의 남로당과 국가보안법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2. 9. 16:01

     

    남로당(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최후에 대해서는 앞서 다룬 바 있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박헌영은 1946년 1차 월북 후에도 수시로 남북을 비밀리에 오가며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이후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그는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이 출범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출되었으며, 김일성과 함께 소련을 설득해 남침전쟁을 일으켰으나 종전 후인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했다.

     

    박헌영은 야산에서 총살당해 그 자리에 묻혔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지만, 당시에는 셰퍼드에 물어뜯겨 죽었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진위를 떠나 이런 얘기들은 당시 김일성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박헌영의 죄명은 미제(미 제국주의) 간첩이었다. 그는 재판 중에 제 안경까지 바닥에 집어던지며 "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고 강하게 반발했지만 사형을 면치는 못했다. 그런데 김일성은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1948년, 평양 모란봉극장 앞의 김일성과 박헌영(가운데)
    박헌영이 숙청되자 이에 반발해 지리산 빨치산 대장 이현상이 발행한 특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개시한 김일성의 북한군은 기세 좋게 남진하여 낙동강까지 쉽게 진격했으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전세가 역전되어 도망가기 바쁜 신세가 된다. 급기야 10월 12일 수도 평양까지 함락되자 김일성은 오지인 개마고원 강계로 도망가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고 급히 소련과 중국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런데 그 무렵인 11월 7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포진 소련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 혁명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때 두 사람은 스탈린을 대신한 소련대사에게 실패한 전쟁 결과에 대한 보고를 올려야 했는데, 전날의 만찬회에서 이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서로 보고를 기피하다가 벌어진 일로,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이 일을 시키자 박헌영은 "부(副)수상인 내가 왜 보고를 하느냐? 수상인 당신이 보고하라!"고 반발했다. 이에 빡친 취중의 김일성은 감췄던 속내를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화를 냈다.

     

    "당신이 말한 빨치산들은 다 어디 있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켜 적극 호응할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들은 다 어디 갔나? 작년 4월 우리가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당신 입으로 뭐라고 했나? 우리 인민군이 산보(散步)하는 기분으로 서울까지만 밀고 내려가면 남로당 지하당원 수백만 명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을 삼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보고하지 않았나?"

     

    박헌영은 6.25전쟁 전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 인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적극 호응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이것은 박헌영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한 술책이거나 허풍이 아니었던 바, 그는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철석 같이 믿고 있었다. 남로당은 이미 대구폭동, 제주4.3폭동, 여순 군인반란사건을 일으켜 남한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바 있었다. 특히 여순 군인반란사건 때는 빨갱이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단 며칠만에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전력이 있었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육군총사령부가 여수 14연대 내린 제주지역 반란진압 명령이 누설되며 남로당 전남도당 책임자 김백동, 남로당 빨치산 군사책임자 이중업,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 라인을 통해 좌익사상을 가진 14연대 지창수 상사에게 반란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자 14연대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좌파 군인들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해 이미 서울을 점령했고 빠른 속도로 남하 중이다, 그러나 우리도 이에 호응해야 한다"며 거짓 선동을 했다.

     

    이어 무기고를 장악한 지창수 일당은 반란에 반대하는 20여 명의 장교와 사병들을 죽이고 여수·순천의 군부대를 장악했고, 곧이어 3개 부대로 편성된 반란군이 남원·구례·곡성.광주·화순·보성·벌교 지역을 접수했다. 그리고 관계 기관들을 털어 쌀과 운동화 등을 지역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인민군이 도착하면 토지도 분배해 줄 것이라며 선동했다. 이에 많은 지역민들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던 바, 점령지역 전체에서 방화·학살의 광란극이 펼쳐졌다.

     

     

    여순반란사건으로 불타는 여수 시가지 / 이경모 작가가 찍었다.

     

    반란에 참가한 지역주민들은 죽창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찔러 죽였고, 특히 경찰관·기관장·우익 청년·기독교인·지역 유지들 및 그 가족들에 대한 학살·강간·고문이 자행되었는데, 양계원 순천경찰서장은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는 고문을 당했고 평소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던 것이 거슬렸다며 양 눈을 뺀 후 차에 매달린 줄에 묶어 기절할 때까지 끌고 다니다 죽창을 찔러 죽였다. 여수경찰서 경찰이던 국(鞠)씨와 정씨는 발가벗겨져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했으며 국부 총살을 당해 죽었다. 그밖에 2000여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정재학의 자료
    여순반란사건 진압 때 체포된 좌익세력
    '라이프'지의 사진 / 사진은 진압 때의 것만 남아 있어 우익 군경이 가해자로 인식된다.

     

    이 같은 준동은 약 10일 후 국방경비대 7개 연대가 각 지역에 투입돼 반란을 진압하며 끝이 났지만 (이때 잔당들이 군경을 피해 지리산 등에 입산했는데, 이들을 1차 빨치산이라 부른다) 박헌영은 남한 지역에서 일어난 몇 차례 반란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빨치산을 비롯한 인민들이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자 인민군에 점령당한 지역에서의 부역자만 나왔을 뿐, 아무런 봉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여순반란 당시 지창수 일당이 퍼뜨린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해 서울을 점령했다"는 거짓 소문만으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짜 북한군이 내려왔는데도 대한민국 좌익들의 왜 호응하지 않았을까? 원인은 여순반란과 제주4.3사건 이후 제정된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빨갱이들의 준동에 놀란 정부는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 제1조에 명시된 국가보안법을 서둘러 제정하였고, 그것을 근거로 좌익세력 제거와 숙군작업(군내 빨갱이 제거)을 함으로써 좌빨들의 힘을 뺀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여순사건은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광주지역 국회의원 민형배가 대표 발의한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민형배는 과거 광주 정율성 역사공원과 기념관 조성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며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설전을 벌일 때 인상 깊게 보있던 인물이다. 정율성은 국제적인 음악가로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사회주의에 경도돼 중국으로 건너 가 193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팔로군 행진곡'(중국공산당 군가)을 작곡했다.

     

    이후 정율성은 1945년 12월 북한으로 넘어가 인민위원회 간부가 됐으며, 이듬해 노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이 되었다. 그는 1947년 북한 인민군 소좌(한국의 소령)에 올랐고 1950년 6.25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했다. 그는 군인 신분으로 북한협주단 단장도 겸하며 김일성과 북한군을 찬양하는 30여 곡을 작곡했다. 북한 인민군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민형배는 그가 광주 출신이라며 정율성 역사공원과 기념관 조성에 예산을 지원해 달라고 싸웠던 것이다.  

     

     

    정율성이 받은 김일성 포상장
    광주 정율성 거리에 세워진 정율성 동상
    내가 갔을 때는 이렇게 돼 있었다. / 왼쪽에 동상이 쓰러져 있다.
    광주시 양림동 정율성 거리전시관
    거리전시관의 연안송 악보 / 연안은 국공내전 당시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정율성의 업적(?)과 기념사업이 소개된 안내문
    벽에 전시된 1940년대 말 평양군악대를 지휘하는 정율성 사진
    벽에 전시된 1945년 8월 조선의용군 기념사진
    누군가 정율성 연보 위에 "한국전쟁 때 이 사람 무엇을 했나요?"라는 손 글씨를 남겼다.

     

    그의 소원 대로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어찌 될까? 아마도 시인 김남주의 말 대로 될 것이다.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해 광주 5.18묘역에 누워 있는 그는 정치인 조국이 가장 사랑한 시인으로, 조국이 민정수석 시절 페이스북을 통해 소개했던 '죽창가'는 김남주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종과 주인'이라는 시 역시 우리 귀에 익숙하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 주인이 종을 깔보자 /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 바로 그 낫으로." 

     

    젊은 시절 공산주의혁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벌집에 침투 해 떼강도 상해짓을 했던 현 국회부의장 이학영과 함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멤버였던 김남주는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 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판 킬링필드를 꿈꾼 것인데, 그 첫걸음이 아마도 국가보안법 폐지가 될 것이다. 

     

     

    시인 김남주(1946~1994) / 좌파는 그를 전사시인, 혁명시인이라 부르고 우파는 그를 빨갱이 시인이라고 부른다.
    국회부의장 이학영(1952~ ) / 1979년 봄, 혁명자금 마련을 위해 동료 7명과 함께 서울 반포의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집에 대한 강도짓을 벌인 그는 경비원에게 들키자 그 경비원을 과도로 찔렀다. 그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 훗날 국회의원이 된 그는 2016년 2월 필리버스터 발언 중 김남주의 시 '잿더미', '진혼가', '편지'를 낭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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