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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舊) 러시아군의 플린트락 머스켓 소총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1. 27. 07:31

     
    최근 러·우 전쟁에 관해 들은 소식 중 가장 관심 가는 뉴스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극동인 하바롭스크 지역을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하바롭스크는 인천에서 비행기로 불과 4시간 정도면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니 만큼 갑자기 러·우 전쟁이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다. 하바롭스크는 러·우 전쟁이 일어나기 전 직항이 있을 때는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인천공항에서 블라보스토크까지 2시간 30분, 블라보스토크 공항에서 하바롭스크까지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하바롭스크의 위치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파괴된 선로와 열차

     
    수년 채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우 전쟁에 대해 먼저 피부로 느낀 적이 있다. 작년 8월 우크라이나 언론이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움직임을 보도한 데 이어, 10월 4일 자국 영토 내에서 북한군 장교가 사망했다고 보도했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 국민들은 긴가민가 하는 분위기였으나 연이어 북한군 3,000명이 러시아로 파병되었다는 여러 통신사의 뉴스가 뒤따르며 북한군의 러·우 전쟁 참전은 기정사실화됐다. 지금까지 파병된 북한군 규모는 특수작전군 4개 여단 15,000 명, 공병 1,000명, 건설부대 5,000명 정도이다. 
     
    이후 우리는 북한군이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광경이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집단으로, 혹은 개별로 자폭 자살하는 광경을 목도하거나 보도를 통해 접하거나 했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은 이른바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북한 최정예 특수작전군으로 무술로 단련된 군인들로 알려졌지만, 새로운 전쟁 무기 드론 앞에서는 무술이고 나발이고가 다 소용없었던 바, 병사 한 사람이 일부러 표적이 되어 희생될 때 나머지 두 사람이 드론을 공격하는 전근대적인 병법(?)이 소개되기도 했다.
     
     

    러시아 쿠르스크 벌판에서 우크라이나군 드론에 포착된 북한군
    우크라이나군 병사는 북한군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하게 좀비처럼 몰려와 FPV(1인칭 드론)을 공격한다. (까닭에) 그들은 쉬운 표적이 됐다"고 했다.
    드론의 공격에는 이런 것이 아무 소용 없었다.
    드론에 당한 북한군 / 우크라이나 언론은 쿠르스크 벌판에서 북한군 50명이 사살당했다고 보도했다.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 약 1만 5000명 중 지난 4월까지 사상자가 4,700여 명 발생했고, 이 중 사망자는 600여 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그들이 목숨값이 얼마인지는 매체마다 분석이 달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헐하다 하며, 초기에는 달러로도 받았으나 지금은 북한의 부족한 물자를 현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독재자 김정은은 북한의 궁핍한 경제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북한 젊은이들의 피를 악마 푸틴에게 수혈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의 증명서 / 우크라이나 특수작전군(SSO)이 공개한 사살된 북한군의 위조 신분증이다. '리대혁'이라는 한국어 서명 외에 모든 정보가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우크라이나 특수작전군 텔레그램 캡처)

     
    금번 우크라이나가 하바롭스크 지역을 공습한 이유도 북한과 관련이 있다. 즉 북한에서 수송되는 탄약 공급을 막기 위해 러시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공격해 파괴시킨 것이다. 북한 당국은 러시아 파병으로 사망한 군인들의 유가족에게 '전사증'을 수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국은 오열하는 가족들에게 관련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비밀 서약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보상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보상금이 얼마나 됐는지 등에 관해서는 일절 알려진 것이 없다.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용 드론

     
    시대는 다르지만, 아울러 파병의 목적 또한 다르지만 과거 조선군도 러시아 지역에 파병돼 슬라브인과 싸운 적이 있었다. 이른바 '나선정벌'로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지금의 중국·러시아 국경선인 아무르강(흑룡강) 유역에 파병된 조선군은 나선(羅禪), 즉 러시아군과 여러 번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역사적으로는 1619년 사르후 전투에 이은 두 번째 해외파병이었다.
     
    나선정벌은 청나라의 요청에 따른 일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에 두 차례나 청병(請兵)을 한 이유는 남하하는 러시아군의 위력과 총포에 크게 눌린 까닭이었다. 앞서 '해달과 알래스카'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슬라브인은 돈이 되는 검은담비 가죽을 좇아 동진을 지속하였으니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시베리아의 동단(東端)인 베링해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남하를 시작했던 바, 헤이룽강(흑룡강) 북쪽의 몽골족과 여진족을 몰아내고 네르친스크 시를 건설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청나라의 전통적 국경인 흑룡강까지 침범하니 그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이 카자흐군(軍) 기병대장 하바로프의 아극살(雅克薩, 야크사) 공격이었다. 1644년 흑룡강 북안(北岸)의 아극살을 침입한 하바로프는 일대에 알바진이라는 성을 쌓아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키고, 이어 흑룡강의 동안(東岸)을 따라 남하, 우수리강 하구에 다시 아찬스크(지금의 하바로프스크) 성을 구축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팔기군 대장 해색(海塞)을 사령으로 하는 총수(銃手) 1,500명을 출병시켰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네르친스크와 알바진의 위치
    하바로프스크 시의 예로페이 하바로프 동상

     
    아찬스크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더욱 남진을 감행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청나라가 조선에 청병을 한 것인데, 소국의 국왕으로서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효종은 옛 6진(鎭) 지역의 군사들을 모집해 1654년 3월,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을 사령으로 하는 150여 명의 군사(총포수 100명)를 파병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북만주로 출병한 조선군은 송화강에서 조우한 러시아 선단(船團)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어 후통과 골지에서 벌어진 러시아군과의 접전에서도 모두 승첩을 거둔 후, 청군과 함께 후통강(厚通江)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그해 조선으로 개선하는데, 이때 참전했던 청나라 군사들(약 3천명)은 조선군의 총포술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상이 이른바 1차 나선정벌이다. 
     
     

    나선정벌 지도

     
    이후 청나라는 여세를 몰아 팔기군 도통(都統) 명안달례(明安達禮)를 사령으로 하는 총수(銃手) 7,500명의 정예병으로 흑룡강 상류의 쿠마르스크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또다시 참패, 조선에 재차 원병을 청하였다. 효종은 이번에도 6진 일대의 포수를 징발해 1658년 3월, 병마우후 신유(申瀏)를 사령으로 하는 265명의 군사(총포수 200명)를 청국에 파병하였다.
     
    이리하여 조선군은 다시 만주에 출병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1차 때보다 훨씬 북쪽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며, 군함을 타고 흑룡강을 내려온 러시아 군대 역시 1차 때보다 훨씬 많았던 듯 보인다. 하지만 이때도 조선군은 뛰어난 사격술을 선보여 러시아군을 기겁시켰는데, 반면 조선 병사들은 러시아인의 큰 키에 놀랐다고 한다. 기록에 전하는 7척은 2m가 넘는 수치이니 과장은 느껴지지만 아무튼 장신에 거구들이라 놀랬을 것은 틀림없다.
     
    2차 정벌에서 조선군은 스테파노프(Stepanov) 부대 함선 11척 중 7척을 불태우고 적장 오노프레이코를 비롯한 270명을 살상시켰던 바, 결국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러시아군 내에서는 '대두병(大頭兵, 머리가 큰 장병)과 만나면 싸움을 피하고 도망쳐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하니 조선군의 사격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대두병은 전립을 쓴 조선군을 이르는 말로, 신유의 <북정록>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다만 이때는 조선군도 피해가 있었으니 8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 <북정록>을 보면, 청나라 군인 중 70m 거리에서 3발 중 1발 이상 표적을 맞춘 자는 100명 중 1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조선군은 100명 중에서 무려 60명 이상이 나왔다. 조선군의 전력이 이처럼 탄탄했던 이유는 당시의 국왕 효종은 북벌을 해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지상과업으로 삼았던 바, 일당백의 사격술을 지닌 포수들을 지속적으로 키워낸 결과였다. 평소의 훈련이 전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 하겠다. 
     
     

    신유의 <북정록>
    국역 <북정록>
    2차 나선정벌 전투 / 프리미어조선 삽화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 청나라는 비로소 이 지역에서의 우위를 확보, 1683년 외흥안령(外興安領) 산맥의 남쪽에 애혼(愛琿) 성을 쌓고, 1685년과 1686년 양년에 걸쳐 남하의 전초기지인 알바진 성을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러시아는 마침내 남진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동진,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를 손에 넣게 되는 바, 그 와중에 성립된 조약이 저 유명한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즉 1689년에 이르러 청의 강희제가 보낸 전권대사 송고투(索額圖)와 표트르 대제의 전권대사 고르빈이 외몽골 니포초(尼布楚, 네르친스크) 성 밖에서 외흥안령의 고르비차강(江)과 아르군강을 잇은 선으로 양국의 경계를 정하니 러시아군은 조약에 의거, 자신들의 알바진 성을 무너뜨리고 퇴각하게 된다. 이 조약은 역사적으로 동양이 서양제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서도 의미가 있거니와, 더불어 그 내용에 있어서도 청국이 러시아에 대한 우위를 점함으로써 동양의 서양에 대한 우세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해진 경계 / 나무위키 자료

     
    이후 조약은 한 자의 수정 없이 무려 170년간이나 지켜지게 되는 바, 이상을 볼 때 조선군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았다고 하기는 견강부회함이 없잖으나 적어도 그 일익을 담당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파병된 조선군에 대한 청군의 대접은 횡포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그 억울함을 몇 개만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군은 실상 전투 중에서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나오지 않았다. 조선군은 마지막 전투에서 러시아 함선에 화전(火箭, 불화살)을 쏘았다. 불을 질러 배를 침수시킴으로써 재침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청나라 장수 사르후다가 진화를 명령하며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러시아 배에 실린 재물을 탐해 진화를 명한 것인데, 이에 불을 끄러 배로 올라가는 순간 배 안에 숨어 있던 러시아군이 사격을 가하면서 전사자 8명을 비롯한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된 것이었다. 
     
    조선군은 배 안에 숨어 있던 러시아군들에 반격을 가해 대부분을 죽였는데 그중의 한 척은 용케 달아났다. 러시아측 자료(<17세기 노중 관계 자료집>)에 따르면 러시아군의 사망자는 220명이었고 77명이 부상당했으며 95명이 탈출했다. (이상의 기록은 <북정록>과도 일치한다) 
     
    청나라에서는 이때 전사한 조선군의 시신을 러시아군의 것과 함께 불태우라고 명령하였으나 신유는 이것을 거부했다. 신유는, 이역만리에서 죽은 군사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반장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럴 수는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전투 다음날인 6월 11일 전사자의 시신을 같은 지역 출신끼리 짝지어 흑룡강 모래언덕에 묻었다.
     
    이상의 내용은 사령관 신유가 기록한 <북정록(北征錄)>에 실려 있다. 신유는 1658년의 이 원정에 대해 4월 6일 정벌군의 출발에서부터 러시아군과의 교전 후 8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141일간의 일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상세히 기록했는데, 처음에는 청군에 대해 예(禮)를 표시하던 신유도 나중으로 갈수록 '오랑캐', '탐욕스러운 놈들' 등으로 표현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억울한 것은 이때 조선군이 노획한 러시아군 조총을 모두 청군에게 빼앗긴 일이다. 제2차 나선정벌에서 조선군은 4백정의 총을 노획했지만 조선군은 전혀 갖지 못했다. 청군이 당사국이란 명목으로 이를 모두 회수해 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신유는 갖은 노력 끝에 겨우 1정을 얻어오게 되는 바, 이를 토대로써 "화승(火繩)을 사용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 격발하는 신기한 총"을 만들어 보려는 갸륵한 의도에서였다. 신유가 <북정록>에 신기하다며 기록한 그 서구식 총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영화 '패트리어트'에 나오는 수석식 소총
    영화 '패트리어트'에 나오는 수석식 소총의 격발장치
    영화 '패트리어트'에 나오는 수석식 권총
    영화 '패트리어트'의 수석식 소총의 총격전 / 1776년 미국 독립전쟁이 영화의 배경이다.

     
    16세기에서 17세기 초까지는 화승총이 세계를 지배했던 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초토화시켰던 조총 역시 화승총이었다. 이후 조선도 화기도감에서 화승총의 제작에 들어가 위 나선정벌에 있어 큰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유럽에서는 한물 간 무기가 되었다. 우중(雨中)에서는 속수무책이며 불 붙은 화승(심지)을 항시 휴대해야 하는 화승총은 이미 불편한 무기로써 폐기되고 수석식(燧石式, Flintlock) 총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조선은 플린트락 머스켓 소총, 즉 수석식 총을 끝내 도입하지 못했다. (석탄이 아닌) 숯으로 쇠를 벼리는(제련을 하는) 조선의 현실로서는 용수철과 같은 강철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선적으로 불가능했으며, 국내에서는 질 좋은 부싯돌이 생산되지 않는 것도 원인이었다. 조선에 흔한 차돌은 불꽃이 잘 일지 않아 소총의 부싯돌로서는 사용하기가 또한 불가능했으며, 불꽃이 강하게 튀는 황철석이나 마노석 등은 조선 땅에선 구하기 어려운 돌이라는 것이 저해 요인으로 작용됐을 터이다.
     
     

    수석식 소총의 작동 원리

     
    수석식 총은 방아틀 뭉치에 부싯돌을 달아서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을 장착한 기계장치가 마찰을 일으켜 점화된 후 화약접시에 담긴 점화약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불붙은 화승을 휴대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제작 또한 그리 어렵지 않아 당시 수석식과 함께 새로운 모델로 선보였던 복잡한 기계장치의 차륜식(車輪式, Wheel lock) 소총을 밀어내고 유럽의 신무기로 등장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된 19세기 초에 있어서는 점화 후 도화선이 타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수석식 총(화승총도 마찬가지)을 대신해 뇌관(뇌산염을 넣은 작은 관)을 사용한 최초의 격발식 총이 등장했다. 방아쇠를 당기면 방아틀과 연결된 해머가 튕겨 내려와 뇌관을 터트려 화약에 곧바로 점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즉 보다 빠른 사격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후로도 소총은 눈부신 발달을 이루어 1871년 신미양요에 있어서 미해병대는 남북전쟁 당시의 주무기였던 스프링필드 머스캣 소총을 넘어 네이비 플리머스(Navy Plymouths)라는 뇌관충격식 전장용 라이플로 무장했다. 그리하여 현대전의 총격전과도 다름없는 사격을 해댔던 바, 그때까지도 여전히 화승총에 머물러 있던 조선군이 당해낼 재간일랑 있을 수가 없었다.  
     
     

    네이비 플리머스 소총 (아래 ) / 전장 114cm. 위는 네이비 플리머스 소총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사용된 미국산 레버 액션 라이플로 일본 사쓰마번의 번주(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는 이 총을 영국으로부터 무려 1만 6,015 정이나 사들였다. (두 정 모두 모사품으로 2011년 황학동 중앙시장에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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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