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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등사의 가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1. 12. 17:25

     

    삼국 중에서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무려 150년 이상 뒤졌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불교를 공인했는데, 313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건과 비견된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마저 엇비슷하다. 백제도 비슷한 시기인 침류왕 원년(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 중국 동진(東晉)에서 건너온 마라난타(摩羅難陀)라고 하는 인도 승려로부터였다. 

     

    반면 신라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했으나 토착 종교에 밀려 널리 퍼지지 못했고, 법흥왕 14년인 527년에 이르러서야 이차돈의 순교로써 어렵사리 불교가 공인된다. 흔히들 신라에 불교에 전한 묵호자를 사람 이름으로 생각하나, 문자 그대로 얼굴이 먹(墨)처럼 검은 호인(胡人, 외국인)을 말한다. 즉 묵호자는 고구려에 왔던 인도의 승려로서 내친김에 불교 불모지 신라 땅까지 밟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과 묵호자를 동일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무튼 신라의 불교 역시 인도에서 온 포교승에 의해 전해진 듯하다. 서기 370년 고구려 · 전진(前秦) 양국 우호의 답례로써 전진의 황제 부견이 파견한 순도(順道)라는 승려 역시 시기적으로 볼 때 인도에서 온 포교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할 즈음에도 제법 많은 인도승려들이 신라에 들어와 포교를 한 듯하니, 오늘 말하려는 마라하미(摩羅訶彌) 역시 인도에서 온 스님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마라하미는 신라 법흥왕 때 부처의 '진신사리'와 '대장경'을 가지고 인도로부터 왔다. 그리고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넓혀지자 경주에 머물지 않고 변방으로 가 자신이 가져온 불사리와 대장경을 봉안하기 위한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절이 바로 가평 운악산 현등사(懸燈寺)이다. 다만 현등사는 당시의 이름이 아니며 최초의 절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아울러 마라하미가 건립한 최초의 절은 후삼국시기의 혼란 때 폐사된 듯 보인다. 

     

     

    운악산 현등사
    현등사 일주문
    마라하미 스님일까? / 승상인지 불상인지 불분명한 이국적 외모의 조각상이 지당 옆에 숨어 있다.

     

    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희종 무렵 보조국사 지눌이 옛 절의 터를 발견하고 새로 지을 때의 이름으로서, 그 연기(緣起)가 흥미롭다. 1210년(고려 희종 2), 당대의 유명한 선사(禪師)였던 보조국사 지눌이 잠을 자다가 등불을 보는 꿈을 꾸게 된다. 그는 자신의 꿈을 기이하게 생각하였으나 오래 담아두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운악산을 지나다 멀리 산속에서 자신이 꿈에 보았던 등불과 흡사한 광채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빛을 따라 올라가다 폐허가 된 옛 절 터을 발견하게 되는 바, 이곳에 절을 중창하며 '등불(燈)이 현실로 나타났다(懸)'는 의미로서 현등사라 명명했다.

     

    이후 현등사는 고려 내내 흥왕했으며 초선초인 1411년 함허화상(=함허득통·涵虛得通)이 금강산으로 가던 중 운악산 현등사에 머물러 주석했다. (운악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흰 사슴을 만나 현등사로 인도됐다는 전설이 전한다) 함허화상은 이곳에서 <현정론(顯正論)>과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했다. <현정론>은 조선초의 유생들로부터 제기된 불교에 대한 그릇된 비판을 바로잡기 위해 쓴 책으로서 척불론자들과 허화상이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금강경오가해>는 중국의 다섯 대가, 즉 종밀·부대사·혜능·야보·종경스님의 <금강경> 주석을 묶은 책이다.

     

    함허화상과 함께 그의 상좌였던 신미대사(=혜각존자)도 유명하다. 신미대사는 1447년 세종대왕의 명으로 한글 불경인 <석보상절>을 지었으며, 세조 때인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교경전인 <능엄경> <묘법연화경> <원각경> <목우자수심결> 등을 한글로 펴냈다. 세조는 왕위 찬탈자이기는 하나 한글 보급에는 이바지한 바가 적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과거 합격자인 신미대사는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하여 속리산 복천암에서 불려 올라와서 집현전 학사로 봉직했다. 이때 세종대왕은 산스크리트어 능통자인 신미대사로부터 많은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현등사는 이후 조선왕조의 억불책으로 쇠퇴하였다가 1830년(순조 30)에 암구대사(巖龜大師)가 재건립하며 삼창됐다. 최근 들어서는 1980년대 현등사 3층석탑에서 도둑들이 절취해 간 사리 및 사리장엄구가 2000년대 삼성문화재단 소속 리움미술관에서 발견되며 현등사 측에서 반환 소송을 제기하는 소동이 있었다. 삼성측에서는 이병철 선대회장이 1981년 정당한 과정을 통해 구입한 '선의취득'임을 주장하며 반환을 거부했다.

     

     

    문화재 절취가 있었던 현등사 삼층석탑 / 범인들은 "삼층석탑 주위를 삼각 크레인으로 고정시켜 놓은 뒤 유압기로 탑을 들어 올려 그 안에 있던 문화재들을 꺼냈다"고 양심 고백을 했다.
    문제의 은제사리회함과 수정사리내함의 사리 2과 / 1470년(성종 1년) 세종대왕의 8남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탑을 개탑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전해진다.

     

    원고 현등사 측은 "현등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중창한 후 폐사된 적이 없고, 계속해서 동일성을 유지해 왔으며 사리함에 '운악산 현등사'라고 뚜렷하게 음각돼 있으므로 현등사의 것이 맞다. 그러므로 당연히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법적 공방 과정에서 공주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절도범 서모씨가 나와 "현등사 사리구는 1980년에 내가 훔쳐 중간 판매상들에게 넘긴 것이다"라는 양심 고백까지 했던 바, 현등사 측에서는 당연히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일단 그 어처구니없는 판결문을 보면, 

     

    "현등사는 본사가 아닌 말사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대참화를 거치고, 이 사건 사리구가 봉안된 이후 숭유억불정책을 편 조선시대 400여 년 동안 사찰의 동일성을 유지한 채로 존속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조선불교의 효율적인 관리통제를 위하여 조선불교 교단의 대정비가 이루어지고, 전국의 토지에 대한 조사사업을 실시하여 현대적 의미의 소유권을 원시 취득하였다. 해방 후에도 불교교단의 통폐합 조치가 취해짐으로써 사찰의 물적, 인적요소에 커다란 변혁이 수없이 이루어져 왔다"고 전제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원고는 비록 구 현등사와 명칭은 같더라도 그와는 다른 별개의 권리주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패소의 이유를 밝혔다.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재판부가 객관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판단했다고 본다"며 재판부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등사 스님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우리 속세의 사람들은 돈과 권력에 야합한 재판부의 모습을 하도 많이 봐와서 어느 정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평생 수도만 해 오신 순진무구한 스님들은 판결문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웠을 터.... 아무튼 현등사 측에서는 곧바로 항소했다. 그렇다면 최종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상급심에서 뒤집어졌을까?  

     

    문제의 사리와 사리장엄구는 극적으로 돌아왔다. 법원 판결 이후 현등사와 조계종단에서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지고 사회적 비난이 일자 삼성문화재단은 2006년 9월 25일 사리와 사리구 일체를 현등사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법적으로는 이겼지만 도난품을 구입했다는 시선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바, 슬그머니 되돌려준 것이다. 

     

    현등사에는 그외도 보물로 지정된 동종을 비롯해, 목조아미타불좌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183호), 지장보살좌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184호), 아미타회상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85호), 신중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3호), 수월관음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8호) 등의 국가유산이 즐비해 안복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즐길만한 것은 깊은 가을색과 풍경소리이니, 성불사는 아니지만 주승은 잠이 들고 그 풍경소리를 객이 홀로 듣는다. 풍경소리 외에는 적막 그 자체인 현등사의 가을 밤이 깊어간다. 

     

     

    2006년 반환 받은 사리와 사리함을 다시 봉안했다.
    탑은 그저 말 없이 산하를 굽어 볼 뿐이다. / 현등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이다.
    유니크한 기단부
    삼층탑에서 내려본 현등사 진입로
    아래 쪽에 또 다른 삼층석탑이 있다.
    보조국사가 사찰을 중창할 때 폐허가 된 땅의 기운을 진정시키고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 탑이 지진탑(地鎭塔)으로 불리는 연유이다. 지진탑 역시 도둑놈이 다녀 간 듯 1층 탑신과 기단부가 망실됐다.
    근래 들어 절 입구에 목탑 형식의 만월보전을 세웠다.
    만월보전 앞 돌다리
    만월보전과 영산보전을 잇는다.
    적멸보궁 쪽에서 본 만월보전과 영산보전
    적멸보궁 오르는 계단 /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함허득통 사리탑 및 석등
    안내문
    또 다른 사리탑
    부근의 직벽
    주불전인 극락전
    극락전 내 목조아미타불좌상 / 1759년 개금(蓋金) 기록이 있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83호)
    후불탱 아미타회상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85호)
    극락전 내 신중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3호)
    지장전
    지장전 내 지장보살좌상/ 1790년에 조성된 청동불이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84호)
    보광전
    보광전 내 수월관음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8호)
    보물로 지정된 현등사 동종 / 1619년 제작된 종으로 본래 봉선사에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옮겨왔다.
    요사채 뒤로 보이는 운악산
    불 밝힌 요사채
    어두워지는 산사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민영환바위
    산사 오르는 길의 무우폭포
    '무우'(舞雨)는 안개처럼 뿌옇게 내리는 비, 혹은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을 뜻한다고.
    백운폭포
    계곡 입구의 불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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