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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길옹주와 어미 숙의문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1. 5. 00:41
영조의 딸 화길옹주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위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461-1이나 정확히는 무덤 터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그의 묘는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다가 일대가 개발 붐에 휩싸이며 부마였던 구민화 문중에 의해 충북 음성군 생극면 신양리 대지공원묘지로 이장되었다.옛 무덤 자리의 기억을 더듬어 찾은 장소는 아래의 솔숲으로, 평내파출소 길 건너 야산, 궁집이 보이는 곳이다. 이곳을 추정한 것도 궁집의 위치로부터이다. 궁집은 1765년 사랑하는 딸 화길옹주가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가자 영조가 그들 신혼부부를 위해 궁중 목수들을 파견해 지어 준 집이다. 이후 화길옹주의 집은 나라에서 보낸 대목장과 자재로써 건축된 집이라 하여 '궁(宮)집'이라 불렸다.

궁집 
옛 무덤 자리엔 벌써 숲이 우거지다. 
옛 무덤 가는 길 
부근의 궁집 담장 화길옹주가 결혼할 때의 나이는 12세였다. 이후 구민화 사이에서 1남2녀를 낳았으며 19세에 사망했다. 그러니까 궁집에서는 7년밖에 살지 못한 셈이다. 요절의 원인은 아마도 신체발달이 채 완성되지 않은 몸에서의 이른 출산이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듯하며, 게다가 그녀는 영조가 60세에 얻은 자식이었던 바, 우생학적으로도 좋은 쪽은 아니었다. 다만 늦둥이인 만큼 아버지 영조의 사랑이 지대했을 터, 화길옹주의 비보에 79세 영조는 팔순잔치를 고사할 만큼 슬퍼했다. (세손 정조의 간절한 상소로 진연은 베풀어졌다)
아무튼 짧은 삶이나마 사랑받고 살다 죽었으니 행복했다 할 수 있다. 만일 어미의 계획이 성사됐다면 그녀는 옹주는커녕 빈민의 딸로 욕받이로서 고생 고생하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미 숙의 문씨가 오빠 문성국과 공모해 제가 난 딸과 민가의 어떤 집에서 낳은 아들을 바꿔치기 하려던 일이 야사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영조의 후궁이었던 숙의 문씨가 연달아 딸을 낳자 벌인 일로서, 그녀와 그녀의 오빠 문성국이 얼마나 권력 지향의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
숙의 문씨는 영조와의 만남도 그리 건전하지 못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문씨는 원래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다. 그런데 현빈 조씨는 일찍 죽었고 이에 장례를 치를 때 시아버지 영조가 며느리의 빈소에 들렀다가 문씨를 마음에 담았다. 아마도 미색을 갖춘 여인이었던 듯하다.

창경궁 경춘전 /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곳이다. 그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곧 문씨를 제 침소로 불러들였다. 며느리의 상중에 그 휘하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건 도덕적으로 볼 때 영 아닌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문씨는 이렇게 승은을 입었고 이후 정4품 소원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영조는 현빈 조씨가 지내던 창경궁 건극당 아래의 고서헌이라는 전각까지 문씨에게 주어 살게 했다. 하지만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후궁 문씨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아가 아버지 영조에게도 반감을 품었으니 형수의 장례식 중에 젊은 궁녀를 침소로 불러들인 아버지를 좋게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문씨도 그런 사도세자를 백안시하였고 제 오빠 별감 문성국과 손발을 맞춰가며 괴롭혔다. <한중록>에 의하면 문씨의 오빠 문성국은 세자의 처소인 동궁전 별감들과 내통하며 동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숙의 문씨에게 알려주었고, 문씨는 그 이야기를 왜곡해 영조한테 일러바치며 부자 사이에 알력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일이 영조 32년(1756) 5월 1일 일어난 창경궁 화재였다. 공교롭게도 이날, 창덕궁에 살던 영조가 창경궁 낙선당의 아들 이선(사도세자)을 방문했는데, 왕이 다녀간 후 어수선한 틈에 누군가 촛대를 쓰러뜨렸고, 이로 인해 낙선당이 불탔다. 그리고 불어온 강풍을 타고 불이 옆 건물인 저승전(儲承殿) 관의합(寬毅閤)으로 번졌고, 다시 청음정, 경극당, 양생당, 취선당, 숭경당 등을 태웠다. 문씨는 이 화재를 세자가 앞서 영조에게 혼난 분풀이로 불을 지른 것이라고 일렀고, 화가 난 영조가 다시 이선을 찾아가 크게 꾸짖었다.
"불은 왜 지르느냐? 네가 불한당이냐?"
" ..... "
사람이 너무 억울하면 말도 안 나오는 법이다. 게다가 이선은 예전부터 이와 같은 억울함을 숱하게 겪어왔는지라 묵묵부답하며 버티는데, 다만 이번에는 그 인내의 선을 넘었는지 잿더미 속에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 소주방 뒤 우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더니 갑자기 달려가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선은 신하와 나인들이 황급히 달려와 건져내어 목숨을 건졌으나 이후로는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문씨는 영조의 사랑을 등에 업고 더욱 안하무인이 되었다. 이에 문씨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노한 대왕대비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숙의 문씨는 이토록 사도세자를 미워하였고, 사도세자 이선이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의 배후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바,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유배를 보냈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사도세자를 무고한 죄였다. 당시 나이 43세였으며 전해지는 무덤은 없다.

서오릉 내 수경원 /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무덤이다. 
서오릉 명릉 내의 인원왕후 무덤 / 숙종의 두 번째 계비로 영조의 양어머니, 영빈 이씨와 숙의 문씨의 시어머니이다. 문씨의 어미는 제주목의 관노비가 되었다. 아울러 정조는 문씨의 오빠 문성국을 과거 창경궁 화재의 진범으로 몰아 가산을 적몰하고 역시 노비로 전락시켰으며, 문성국의 아들 문경행과 처남 박도오를 유배형에 처했다. 더불어 문씨의 장녀 화령옹주의 남편 심능건은 문씨의 집을 마음대로 처분했다고 처벌을 받았으나 차녀 화길옹주의 남편 구민화는 처벌 받지 않았다. 특별한 죄도 없었거니와 이미 화길옹주가 사망했기에 죄가 있어도 면소받았을 터였다.
정조는 화령옹주와 화길옹주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보였으니, 두 사람의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을 때도 "두 옹주는 영조의 골육이며 문씨가 흉계를 꾸밀 때는 강보에 싸인 아기였을 뿐"이라며 감싸주었다. (사내였다면 필시 죽였겠지만) 이로써 화령옹주와 화길옹주는 옹주로써 남을 수 있었지만 어미 문씨는 철저히 응징되었다. 정치적 보복인 면도 있지만 살아생전의 행실도 좋지 않았으니, 역사가로부터도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와 더불어 희대의 악녀로 평가받고 있다.
앞서의 숙안공주, 귀인 조씨, 희빈 장씨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요부(妖婦)로 일컬어지는 숙의 문씨에 대해 살펴보았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와 같은 권력형 요부가 처벌에서 비켜간 적이 없다. 다시금 말하지만 영원한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작금의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세하고 있는 정체 아리송한 현대판 여성 권력가도 언젠가는 백일하에 정체가 드러날 것이며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역사의 예를 보자면 필연이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숙의문씨 역을 한 탤런트 고하 화길옹주와 구민화가 살던 남양주 궁집은 ㅁ자 형태인 안채와 ㄱ자 형태의 사랑채 및 ㅡ자 형태의 별채가 한 덩어리로 연결된 형태로서 특이하다. 까닭에 신발을 벗지 않고 연결된 통로나 쪽마루를 이용해서 집 전체로의 이동이 가능하다. 바깥채를 포함한 규모는 31칸이다. 조선시대 가사 규제에 따라 옹주 집 40칸 이내로 맞춰 지은 것인데, 본래는 행랑채가 딸린 40칸 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어진 시기와 집 주인이 명확해 건축사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자 형태로서, 단단하고 정교하며 높게 다듬어진 장대석 기단부에서 궁궐 석공의 솜씨가 엿보인다. 안채 부엌을 통해 뒷마당으로 나갈 수 있게끔 돼 있으며 뒷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가 있다. 사랑채에서도 기둥이나 창문틀에서 궁궐에서 쓰이는 '쌍사' 문양을 볼 수 있으며 마치 경복궁 건청궁 사랑채인 장안당을 옮겨놓은 듯 화려하다. 사랑채와 안채의 중문을 각각 만들어 겉으로는 조선시대 남녀유별의 유교적 의식 따랐지만, 위에서 말한것처럼 모두 통해져 있는 구조이므로, 그 동선을 쫓는 것도 흥미롭다.
궁집의 주인은 그간 여러 번 바뀌었는데, 마지막 주인인 권옥연 화백과 이병복 무대 예술감독이 궁집과 주변 8000여 평을 구입한 후 개발로 철거되는 한옥들을 모아 현재의 모습으로 꾸몄다. 부부는 2019년 전체를 남양주시에 기부체납했다.

화길옹주와 구민화가 살던 남양주 궁집 
안채와 바깥채의 문 
안에서 본 안채의 문 
안채 
ㅁ자 형태의 구조와 돋보이는 장대석 기단부 
안방 
뒷마당 / 오른쪽에 사랑채로 통하는 문이 보인다. 
뒷마당 / 왼쪽에 주방으로 통하는 쪽문이 보인다. 
사랑채와 안채의 문 
사랑채 
사랑채에서 본 바깥 풍경 
창살 문양 
별채 
별채와 사랑채를 이어주는 공간 
사랑채와 안채를 이어주는 공간 
행랑채 격의 바깥채 
사랑채 옆, 무교동에서 옮겨온 한옥이 사당인 듯 자연스럽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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