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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사구팽 & 한신 · 이숙번 · 오동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1. 1. 23:24

     
    토사구팽은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의미로서 인구(人口)에 많이 회자되는 사자성어이다. 대개 어떤 일이 성사된 후에는 그것을 이루는 데 애썼던 사람을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냉정히 내치는 경우를 가리킨다. 출전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월왕구천세가>의 '교토사주구팽(狡免死走狗烹)'이다.
     
    뜻은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긴다'는 것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춘추시대 5패(覇)의 하나였던 월나라 왕 구천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제압하고 마침내 중원의 패자(覇者)가 된다. 이때 월 구천의 책사였던 범려는 현명한 판단으로써 갑자기 월나라를 떠나는데, 이때 자신과 함께 월왕의 수하였던 문종에게 '교토사주구팽'이라는 말을 한다. '팽' 당하기 싫으면 당신도 빨리 월나라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호북성 박물관에 전시된 월왕 구천 의 칼

     
    ※ 춘추시대의 다섯 명의 패자(覇者)를 말하는 춘추5패에 관한 정의는 아직도 확실한 것이 없다. 혹자는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오 합려, 월 구천을 지칭하고, 혹자는 오 합려, 월 구천 대신 진 목공이나 송 양공을 넣기도 하며, 혹자는 오 합려 대신 그의 아들 부차를 넣기도 한다. 또 혹자는 군웅할거의 춘추 시대에서 특별히 5명의 패자를 꼽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래 그림의 정의가 가장 무난한 듯싶다. 
     
     

    춘추오패 (그림 출처: 다음 '산여울'님의 블로그)

     
    같은 의미의 말이 <사기/회음후열전>에도 나오는데, 글자는 조금 달라 '교토사양구팽(狡兔死良狗烹)'이다. 뜻은 같다. 음후(淮陰侯)는 한나라 유방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한신을 말하는 것으로, 저 초한전(楚漢戰)에서 초나라 항우의 호흡기를 뗀 자로 유명하다. 상황을 잠시 더듬자면, 
     
     

    한신이 배수의 진을 회하(淮河)
    해 지는 회하 강변

     
    소수의 병력으로도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한신은 기원전 204년,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강국 조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한신은 만면수(綿曼水=회하) 강가에서 그 유명한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치는데, 진(陣)을 설치함에 있어 강을 등지는 배수의 진은 병법의 원칙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에 조나라 왕 조헐은 한신의 병법을 비웃었으나 한나라 군대는 의외로 조나라를 격파하고 조헐을 사로 잡았다.
     
    한신이 배수의 진을 친 이유는 자국의 잘 훈련된 군대가 아니라 점령지에서 차출된 일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등 뒤에 도망갈 길이 있다면 위급할 경우 모두 제 살 길을 찾아 흩어지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신은 병법을 역으로 이용한 강수를 둔 것이었으니, 이후 '배수진(背水陣)'이란 말은 결사항전을 다짐할 때 쓰이는 천고의 명언이 되었다.  
     
     

    회하의 위치
    청나라 가경 20년(1815) 한신이 배수진을 설치한 곳에 세워진 기념비석

     
    한신은 기원전 202년 마침내 해하(垓河)에서 자웅을 겨루던 초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리고 한신은 군사들에게 슬픈 초나라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였던 바,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른바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이 소리를 들은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고향 생각에 센티멘탈해져 사기가 상실됐고 도망치는 자가 속출했다. 항우는 결국 대패하여 오강(烏江)까지 후퇴한 후 그곳에서 자결함으로써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상은 세상을 덮을 만함)의 생을 마감했다.
     
     

    항우가 투신 자살한 중경시(市) 부근의 오강
    오강의 낙조 / 트립 어드바이저 사진

     
    이렇듯 한신은 신출귀몰한 지략과 전략으로 항우를 꺾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 공으로 초왕(楚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후 모반죄가 씌워져 체포되는데, 이때 한신이 '교토사양구팽'을 되뇌인다. 원전을 보자면, "날쌘 토끼가 죽으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우고, 높이 나는 새는 다 잡고 나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며, 적국이 사라지면 지모(智謨)의 신하도 죽음을 당한다고 하더니, 과연 천하의 정한 이치구나. 나는 곧 죽으리라.(狡免死良狗亨 高鳥盡良弓蔵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亨)"이다.  
     
    다행히 한신은 모반죄가 입증되지 않아 목숨을 건졌고 다만 회음후로 강등된다. 그러나 한신은 모반죄에서 벗어났음에도 결국 천수를 다하지 못했으니,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에게 의해 진짜 '팽(烹)' 당해버리고 만다. 팽형(烹刑)은 끓는 물이나 기름 속에 빠뜨려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그는 어차피 살 길이 막혔음을 깨달았는지 목숨을 구걸함이 없이 스스로 기름솥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가솔들 또한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았다.
     
    유방에 의해 토사구팽당한 자는 사실 한신뿐만이 아니었으니 한나라 최고의 맹장이었던 경포와 팽월, 그밖에 장도와 진희도 죽었으며, 동서이자 홍문의 연회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번쾌마저 죽이려 했으나 붙잡혀 오는 도중 유방이 병사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 수 있었다. 이렇듯 유방의 측근은 모두 제거되었으나 오직 한 사람, 장량만은 일찌감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 그 깊은 산속은 장량이 산 곳이라 하여 장가계(張家界)라 불린다. 
     
     

    중국 후난성(호남성) 서북부의 장자제(張家界) .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조선초의 인물인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을 팽 당한 인물의 첫 번째로 꼽는다. 이숙번은 조선 건국시기에  발생한 1,2차 '왕자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이방원이 조선 3대 왕 태종으로 등극할 수 있게 만든 인물이다. 이에 좌명공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1402년 동북면에서 일어난 조사의(趙思義)의 난 때도 출정해 진압하였다. 까닭에 흔히 무장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1393년(태조 2) 식년문과에 입격한 문관이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위세가 대단하였던 바, 아래의 일화가 그 위세를 증명한다. 
     
    1413년 풍수가 최양선이 풍수학적 이유를 들어 도성 서문(西門)인 돈의문을 닫고 새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서쪽에 새문을 만들 것을 명했는데 그 설계안에 따르면 새문의 도로가 이숙번의 집 앞을 지나게 돼 있었다. 이에 행인과 우마의 통행으로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한 이숙번이 새문을 여기다 짓지 말고 상왕 정종이 살고 있는 인덕궁 쪽(현 경희궁 서북쪽 서울시교육청 뒤쪽으로 추정)으로 옮기라고 했고, 그렇게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숙번의 집을 '색문가(塞門家)', 즉 성문을 막은 집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1422년(세종 4) 2월, 세종대왕이 도성을 수축하며 옛 돈의문 자리에 다시 문을 만들었다. 까닭에 그 문은 돈의문, 혹은 서대문이라는 명칭 대신 '새문'이라 불렸으니 '새문'에서 이어지는 그 길은 여태껏 새문 길, 즉 신문로(新門路)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흔히 부르는 '새문안'이라는 호칭은 새문의 안쪽이라는 뜻으로 신문로의 우리말 쯤이 되겠다. 
     
     

    신문로 / 훈련도감이 있던 금호 아트홀에서 서대문 쪽을 찍었다. 오른쪽에 훈련도감 터 표석이 보인다.

     
    이숙번의 권세는 이른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그러나 제 공을 믿고 거만방자하게 굴다 결국 태종의 눈밖에 났다. 그리하여 1417년 벼슬을 잃고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되는데, 과거의 공적을 생각해 죽이지는 않았다. 다만 향후 20년 동안 한양을 밟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리나 세종 때 그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복권(復權)은 아니었고 태종의 신도비를 지을 때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잠시 호출한 것이었다. (<용비어천가>나 <태종실록>을 짓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말도 있다)  
     

    헌릉의 태종대왕 신도비

     

    이에 이숙번은 다시 관복을 입고 집현전 학자들과 숙덕거린 기간도 있었으나 얼마 후 귀양지로 떠났다. 하지만 본래 귀양지인 함양으로 보내지 않고 경기도에 머물게 해주었는데, 다만 죽을 때까지 한양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는 1440년(세종 22) 67세로 사망하였으며 묘는 안산군 구로면 산현동(지금의 시흥시 산현동)에 마련됐다. 이숙번은 팽 당한 인물로 꼽히기는 하나 어찌 보면 스스로 화를 불러들인 경우이니, 하륜 대감처럼 점잖게 행동했다면 분명  한양의 제 집에서 천수를 다했으리라.  

     

     

    이숙번 묘표 / 묘소 입구에 놓여 있다. 부인 서원정씨와의 합장묘이다.
    표묘 옆 안내문
    무덤 오르는 길
    이숙번 묘
    후경 / 배산임수에 조산을 갖춘 전형적인 풍수상의 명당이다.
    전체 풍경
    옆에서 보면 직사각형 묘임을 알 수 있다. / 왼쪽에 물왕저수지가 보인다.
    위쪽의 조상 묘
    물왕저수지
    물왕저수지의 낙조

     

    21세기의 토사구팽을 꼽으라면 단연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오동운 처장이다. 본래 판사였던 그는 2017년 판사직을 사직한 후 법무법인 금성의 변호사로 활동하다 2024년 5월 윤석렬 대통령에 의해 제2대 고위공직자범죄수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 작년 12월 윤 대통령이 계엄을 실시하자 오동운 공수처장은 '12·3 비상계엄' 수사와 관련해 윤 대통령을 체포할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사실 이때부터 뭐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다. 검찰이나 경찰에 맡기면 될 걸 괜히 나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과거 판사 재직 시절, 좌파 성향의 판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임은 알고 있었지만 특별한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사건에 뛰어들었다고는 보이지 않았는데, 게다가 중앙지법에서 영장을 받을 자신이 없었던 그는(아마도 거절됐을 것이다) 진보판사들이 포진돼 있다는 서부지법에서 체포영장을 발부받는 치졸한 꼼수를 보였다. 아마도 당시 야당인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다그침이 무서웠던 듯했다. 

     

    그리고 올해 벽두 한남동 대통령관저로 쳐들어 가 한바탕의 활극을 펼쳤다. 좌·우를 떠나 온국민이 심장 쫄깃거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마침내 대통령을 구치소에 구금시키는데 성공했다. 우파 국민들이 볼 때는 죽일놈이지만 좌파들에게는 영웅이 될 법했는데, 그는 왠일인지 좌파들에게도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러더니 지난달 10월 15일 채해병 특검팀이 공수처 수뇌부를 직무유기 혐의로 전격 입건하고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피의자에는 오동운 공수처장을 비롯해 이재승 차장, 박석일 전 수사3부장이 포함됐다. 공수처 출범 이후 현직 처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국회 법사위가 송창진 전 공수처 수사2부장을 위증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접수한 후 이를 대검찰청에 통보하지 않고 사건 처리를 지연한 혐의를 받고 있는데, 뭐라도 털어야 하는 채해병 특검팀의 갈급함이 반영된 수사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오동운 처장은 입건됐고 털리게 되었던 바, 곧 먼지라도 나오게 될 것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팽 당한 것으로, 그 역시 괜히 나섰다가 화를 불러들인 감이 없지 않다. 늘 억울한 표정의 마스크를 지닌 그의 캐릭터가 더욱 굳어질 듯하다.  

     

     

    연합뉴스가 찍은 굳은 표정의 공수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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