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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손 은언군의 기구한 운명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0. 26. 21:43
왕손 은언군의 무덤은 전하지 않으나 그 석물은 여기저기 흩어져 전한다. 그것은 은언군의 기구한 운명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징표이기도 할 터인데, 다만 어느 것부터 말해야 할지는 망설여진다. 우선 은언군은 일생이 적혀 있는 서울 은평구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마당에 위치한 '은언군 묘역 사패 금표비'부터 출발해볼까? 불문곡직 들이대자면 금표비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은언군 묘역의 경계임을 알리고 출입금지를 알리는 비석이다. 은언군 이인(李䄄, 1754~1801)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철종의 할아버지로, 정조 때 역모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신유사옥 때 처형되었다. 철종이 즉위한 후 복권되어 진관동에 새로운 묘역이 마련되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마당의 안내문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마당의 은언군 금표비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마당의 묘표와 상석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입구의 한옥마을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입구의 한옥마을 보완해 설명하자면 은언군 이인은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궁녀 출신의 숙빈임씨로 1754년 2월 22일 창경궁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축복받은 출생은 아니었다. 왕은 궁녀를 건드려도 허물이 아니었지만 세자는 자중하는 것이 법도였다. 그런데 이인은 바로 그러한 궁녀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던 바, 가뜩이나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영조에게 있어서는 반갑지 않은 손주였을 터였다. 실제로 영조는 여러 날에 걸쳐 사도세자를 꾸짖고 혼냈다고 한다.
모자가 궁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다만 그래도 사도세자가 살아 있을 때는 궁에서 살았지만, 아비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이후로는 출궁하여 밖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 은언군의 생활이 매우 방탕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분수에 넘치는 많은 하인을 두었고, 남여(藍輿, 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를 타고 다녔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입은 변변찮아도 최소한 메르세데스 중급 시리즈인 벤츠 프로그레시브 정도는 타야 한다는 식이었다.경제적 무개념으로 물색없는 소비를 하는 것은 어쩌면 왕족의 특질인지도 몰랐다. 물색없는 소비는 동복동생 은신군도 마찬가지였던 바, 영의정 홍봉한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았고, 그 일로 탄핵당해 조사받는 과정에서 형제가 시전 상인들에게 거액의 빚을 진 사실이 드러나며 정치적 문제가 됐다. 예를 들자면 청문회 당시 말 많았던 김민석 총리 후보처럼 제 돈이 아닌 남의 돈으로 생활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인데, 오히려 예전이 더 법도가 강했는지 두 사람의 죄를 물어 제주도에 정배시켰다.

은언군 형제가 유배 생활을 한 제주 대정현의 성벽 
대정현 북문지 
대정현 동문지 앞의 돌하르방 다행이라 하면 아니 될 터이지만, 함께 유배간 동생 은신군이 제주도에서 풍토병으로 죽으면서 은언군에게는 살길이 열렸다. 은신군의 죽음과 함께 해배(解配, 유배가 풀림)되어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됐던 것이다. 1776년 돌아온 그는 한번 세게 혼이나서인지 바깥출입을 삼가고 한동안 학문에 주력하면서 살았다. 그의 신도비에는 이때 자숙했음이 강조된다.
하지만 나무가 가만 있으려 해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게 되는 법, 이번에는 야심가 홍국영에 의해 흔들리는 처지가 되었다. 홍국영은 새 국왕 정조와 정략결혼을 시킨 자신의 누이 원빈 홍씨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그녀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에 봉하고 대통을 잇게끔 하려 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들통나고 홍국영은 축출되어 강릉에서 34세로 병사한다.(1781년 정조 5년)
홍국영의 야망은 이렇게 끝났으나 홍씨 잔여 세력의 상계군 옹립 음모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발각되었던 바, 1786년 11월 상계군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의문의 음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연루되어 극형이 주청되었으나, 정조가 한사코 거부하여 유배형으로 낙착되었다. 이번에는 강화도였다.

교동읍성 남문 
1786년 역모에 연루된 은언군은 강화 교동도에 안치되고 이로 인해 이른바 강화계보라는 곁다리 왕실 계보가 생겨나게 된다. 은언군 이인은 가족과 함께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복형 정조가 부족함 없이 먹고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급서하고 11살 순조가 즉위하자 곧 위험이 닥쳤다. 수렴청정으로 전권을 잡은 정순왕후 김씨는 천주교를 극혐하였던 바, 우선 1801년 3월 천주교 신자인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상계군 이담의 부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만들었다.
특히 부인 송씨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그로부터 영세를 받은 사실이 밝혀지며 죽음을 면치 못하는 처지가 됐다. 이때 천주교를 믿지 않았던 은언군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니 앞서 몇 번의 탈출을 기도한 죄가 소환되며 줄기차게 사사(賜死)의 상소가 올라왔던 바, 그해 6월 13일 결국 사사령이 내려지며 6월 30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때 나이 48세였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 이말산 부근, 현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우물골아파트 뒷쪽 야산에 묻혔고 먼저 죽은 부인 송씨가 합장되었다. 그런데 그의 기구한 운명은 사후에도 비껴가지 않았으니 묘가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실전되었고, 부근에 방치됐던 묘표는 마포 합정동 절두산성당으로 옮겨졌다. 부인 송씨가 순교자라는 것이 이유였다.

절두산성당의 은언군과 상산군부인 송씨의 묘비 무덤 곁에 있던 신도비는 진관동 흥창사로 옮겨졌다. 이 신도비는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은언군의 손자 원범(元範)이 1831년 왕으로 추대되며(철종) 작위가 복구돼 세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묘의 실전과 더불어 신도비는 인근 사찰로 옮겨졌고 사찰 창건주의 송덕비로 전용되었다. 그래서 앞면에는 창건주와 관계자의 이름이 새겨지고 뒷면의 기록은 페인트로 칠해졌는데, 그나마 지금은 철판으로 덧씌우져 아예 읽을 수가 없고 사진 촬영도 금지된 상태다. (이 신도비를 두고 어지간히 말이 많았던 듯하다)

흥창사 전경 / 가운데 신도비가 보인다. 
뒷면에 페인트가 칠해졌을 때의 모습 / 강화투데이 DB 은언군 묘역에 있던 석물도 주변에 흩어졌다가 지금은 흥창사 뒷산 사찰 창건주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은연군의 사후 자취는 사라지고 금표는 금표 대로, 묘표는 묘표 대로, 석물은 석물 대로 흩어지는 유래 없는 현실이 되었지만, 그래도 엉뚱한 곳에나마 은언군 묘역의 문·무석인, 장명등, 망주석 등이 한곳에 모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250cm 정도의 장명등 
우측 문 ·무석인 
좌측 문 ·무석인 
무덤 전경 
엉뚱한 곳을 지키는 문 ·무석인 강화도에서 태어난 은언군의 서자 전계군 이쾌득(李快得)은 일생을 거의 투전꾼(놀음꾼)으로 살았다. 그러다 순조 임금의 지원으로 살림이 좀 펴지자 1831년에 3남 이원범을 낳았는데, 이 자가 바로 조선 제 25대 임금 철종이다. 앞서 말했듯, 헌종 이후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자 곁가지 왕족 강화계보에서 임금을 모셔왔던 것이다. 이에 빈농에 나무꾼의 삶을 영위하던 이원범은 졸지에 왕이 되었지만 그를 옹립한 안동김문에 휘둘리다 1864년 별다른 치적 없이 졸했다.

전계군의 위치 
전계군과 철종이 살던 강화도 집 
당시는 초가집이었겠으나 왕의 잠저(潛邸)가 되며 기와집으로 변했고 용흥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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