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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지산 최항 무덤에서 나온 청자진사 연화문주자의 진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0. 16. 00:55
1963년 초, 그때까지도 기승을 부리던 강화도 도굴꾼들 사이에서 대물이 출토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강화산성 서쪽 창지산(昌支山) 어느 구릉의 폐 고려무덤에서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자(靑磁辰砂 蓮華文 瓢形注子), 즉 진홍색의 진사안료가 사용된 연꽃무늬 화려한 표주박 형태의 명품 청자 주전자가 나왔는데, 그 무덤이 바로 고려 무신정권 제 3대 수장 최항의 무덤이라는 것이었다.

강화산성에서 본 창지산 (추정) / 사진 왼쪽의 산으로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은 특별히 없었다. 만일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여태까지 그렇게 구체적인 용모파기를 갖춘 도굴품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항의 무덤이라는 소리가 떠도는 것을 보면 묘지명(墓誌銘)도 함께 출토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말만 무성할 뿐 도굴품의 향방은 오리무중이었는데, 이미 물 건너 갔다는 (일본으로 밀반출됐다는) 소문이 돌다가 이내 시들해졌다.
당시는 대물의 경우, 대개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갑부 마니아의 보물창고로 가거나, 혹은 돈세탁과 같은 세탁과정을 거쳐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1970년대 삼성문화재단 발행한 <문화의 향기 30년>이라는 책을 보면, 위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주자가 최항의 묘지석과 함께 1970년 초 오사카시립박물관의 경매를 겸한 특별한 전시에 나왔던 것을 삼성이 치열한 호가경쟁 속에 한화(韓貨) 3,500만원에 낙찰받았다고 쓰여 있다. (이것은 돌아와 곧 국보로 지정됐다)
이때 이병철 회장이 특사에게 반드시 입수하라는 특명과 함께 백지수표를 발행해 주었다는 말이 나돌았고, 이 표형주전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이에 관한 논문을 써 줄 사람을 찾았으나 국내에는 마땅한 학자가 없어 결국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의 이토 이토타로(伊藤那太郞) 관장에게 맡겼으며, 그래서 나온 것이「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에 대하여」라는 논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청자 주전자의 정식 이름이 됐다고도 했다.

국보 제133호 청자진사연화문주자 / 병목 부근에 연꽃봉오리를 든 동자가 무릎 꿇고 있고 손잡이에는 개구리가 앉아 있다. 리움박물관 소장으로 높이 33.2cm, 밑지름 11.4cm이다. 
최항 묘지명 탁본 / 묘지명은 리움박물관 소장으로 높이 66cm, 너비 146cm이다. 당초문 테두리의 지석에 전체 44행, 각행 27자씩을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하지만 골동품상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위와 전혀 다르다. 이 청자진사연화문주자는 1963년 초 창지산에서 도굴된 후 김재숭이 5천만 환에 매입했는데, 그 즈음이 박정희 정권의 화폐개혁 시기라 5백만 원으로 얘기되기도 한다. 이후 김재숭은 11년 가까운 세월을 소장하며 문화재보호법의 법적 시효를 넘겼고, 시효가 끝나자마자 수리 전문가인 안동호에게 맡겨 도굴 당시 파손됐던 주전자 손잡이의 위쪽과, 주구(注口) 부분을 보름에 걸려 수리했다.

당시의 500원권 지폐 / 1962년 화폐개혁 때 발행되어 1966년까지 쓰였다. 그리고 매입자를 찾아 나섰는데, 가장 먼저 차명호가 눈독을 들였으나 김재숭에 제시한 300만원의 호가에 접근한지 못한 채 그저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 사실만을 이화여대 김활란(1899~1970) 총장에게 알렸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본 주전자가 주한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있던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이 가지고 출국한 청자 주전자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자 욕심이 생긴 김활란은 이왕이면 그것도 구입해 이화여대 박물관에 두자며 미국으로 출국했다. (☞ 그레고리 헨더슨에 관해서는 '가루베 지온과 오구라·헨더슨 컬렉션'/ '그레고리 헨더슨과 그의 아내 마리아' 참조)

헨더슨 부부가 빼돌린 국보급 청자 / 행방 불확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장형수라는 거간꾼이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접근했고, 이병철은 3,500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청자진사연화문주자를 구입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김활란은 땅을 쳤지만, 청자진사연화문주자는 이미 이병철의 손에 들어간 후였다. 이병철은 이 청자 주전자를 대단히 아껴 1982년 용인 호암미술관이 개관했을 때 특별히 방탄유리 쇼케이스 안에 전시했다고 한다. (※ 지금의 가격은 앞서 말한 500억원의 보험료가 책정된 청자상감 운학문매명에 필적할 듯하며, 구입 경위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생전의 이병철 부자 
청자진사연화문주자를 감상하는 호암 이병철 최우의 아들 최항은 본래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에 의해 송광사의 승려로 출가하여 능주 쌍봉사 주지를 지냈다. 그는 만전(萬全)이란 이름의 쌍봉사 주지 시절, 잦은 폭행과 고리대금을 통한 재산 갈취, 유부녀 겁탈 등의 악행으로 오명(汚名) 높던 자로서 최씨 정권의 후계자가 돼서는 도무지 안 될 사람이었으나, 최우의 후계자로 정해졌던 사위 김약선이 무고로 숙청당하며 운좋게 계승자가 되었다.

능주(현 전남 화순군) 쌍봉사의 일제강점기 모습 
쌍봉사 대웅전 / 198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86년에 원형대로 복원됐다. 아무튼 안타깝다. 그는 중서령-감수국사 벼슬의 후계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최우 사망 이틀만에 상복을 벗고 연화라는 아버지의 첩과 사통을 벌인 것을 필두로 온갖 횡포와 악행을 자행하다 (내륙에서는 몽골과의 싸움이 정점에 이른 때였음에도) 집권 8년만인 1257년 병으로 죽는다. 그는 본처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었던 바, 승려 시절 부리던 여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최의(崔竩, 1233-1258년)가 전중내급사라는 벼슬로서 후계자가 되었으나, 집권 1년만에 별장(別將) 김준에게 살해당하며 62년간의 최씨 무인정권은 막을 내린다.
최항에 대해서 악평만 존재하지는 않으니, 정권수반으로 서북면병마사를 겸하면서 몽고와 전쟁에 대처하고 팔만대장경의 완성과 더불어 국가 재건에 노력하고 강력한 국토 수호의 의지를 보인 용장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최항의 묘지명에는 그의 죽음이 붕(崩)으로 황제의 격(格)으로써 기록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최항은 1257년(고종 44)윤 4월 초이틀에 견지산 동쪽 별서에서 47세로 작고하여 8월 26일에 진강현 서쪽 창지산 기슭에 장사지낸 것으로 돼 있다. 견지산은 지금의 강화산성 동쪽 견자산으로 비정되나, 최항이 묻혔다는 창지산은 강화산성 서쪽의 야산과 북서쪽의 송해면 양오리 야산이 충돌한다.

드라마 '무신' 속의 최항 
강화산성 북문 진송루 
난공불락의 강화산성 
북문에서 바라본 낙조 
국립도쿄박물관의 최충헌 묘지명 / 개성 봉황산에서 출토됐으나 일제강점기 밀반출됐다. 
최충헌 묘지명의 탁본 / 도둘꾼들이 옮기는 과정에서 땅에 긁힌 자국이 새겨졌다. 위 최항의 묘지석도 마찬가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채인범(934~998) 묘지명 / 중국 남당(南唐) 출신의 문인으로 고려에 귀화했다. 고려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개풍군에서 출토됐다. 1920년 이케우치 도라키치라는 골동상이 입수한 것을 조선총독부가 매입했는데, 이케우치 일당은 여유를 갖고 도굴을 행한 듯 겉에 긁힌 자국이 전혀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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