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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안공주와 이재명의 그림자 권력 김현지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0. 5. 22:07
숙안공주(1635~1696)는 조선 제17대 효종대왕의 1녀로서 어릴 때부터 지혜가 총명하여 효경, 내훈, 소학에 능통했고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부왕의 사랑을 받았다. 인조 27년(1649) 익평군 홍득기와 결혼. 이조때 우의정을 지낸 충익공 홍중보의 아들이며 벼슬은 성록대부 익평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으며 현종 계축 11월에 별세하였다.
이상은 숙안공주 묘가 위치한 양평군 양평문화원의 설명문이다. (묘역에 있는 안내문도 거의 같다) 하지만 큰 오류가 있어 먼저 적시하고자 한다.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부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서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아버지 효종으로 보자면 자신의 장녀였으니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보였을 수는 있겠으나 세인이 생각하는 인물평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악녀도 그런 악녀가 없기 때문이다.

경기도 용문면 궁촌마을의 숙안공주·익평군 홍득기 합장묘
숙안공주의 입지는 효종의 첫 딸이자 현종의 친누나이자 숙종의 고모라는 것으로 쉽게 정리된다. 더욱 쉽게 이해하자면 북한의 '백두혈통'이라 보면 된다. 까닭에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의 큰 정치적 사건의 한가운데 서서 정국을 좌우하게 되는데, 여기에 청나라의 간섭과 본인의 권력욕, 그리고 권력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인간들이 몰리며 인생을 어렵게 만든다. 흡사 요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김현지 제1부속실장을 보는 듯하다.
숙안공주는 태생부터 청나라와 얽혔다. 숙안공주가 태어난 1636년(인조 14)은 병자호란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로, 당시는 그녀의 언니 숙신공주도 있었다. 하지만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를 잡혀갈 때 3살의 나이로 병사하며 숙안공주가 장녀가 되었는데, 1645년 심양 억류가 풀려 돌아온 소현세자가 독살당하며 비로소 공주가 되었다. (봉림대군이 청나라로 갈 때 돌이 채 되지 않았던 숙안공주는 부모와 같이 잡혀가지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좀 복잡해 보이는 스토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재위 1623∼1649)는 청나라에 돌아온 맏아들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소현세자를 독살했고, 이에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1649년 인조에 이어 조선의 17대 임금이 되며 그의 딸이 숙안공주에 봉해진 것이다.

소현세자의 3남 경안군 묘표 /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모두 제주도에 유배돼 죽고 3남 경안군만이 살아 남아 후손을 이었다. 
경안군의 아들 임창군의 묘표(뒷면) 
고양시 대장동의 경안군와 임창군 묘(아래쪽)
숙안공주는 혼인도 청나라와 얽혔다. 그녀는 잘못하면 청나라 황족 도르곤의 부인이 될 뻔했다. 도르곤은 자신의 처가 죽자 조선의 공주를 새 아내로 맞겠다고 나섰고, 놀란 효종은 아버지 인조의 국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숙안공주를 비롯한 제 어린 여식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그럼에도 청나라에서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개소리하덜 말고 빨리 공주를 보내라고 을러댔던 바, 난처해진 효종은 종친인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공주(의순공주)로 삼아 청나라에 보내며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청나라에 간 이개윤의 딸은 남편 도르곤이 결혼 7개월 만에 급서하며 청상과부가 되었고 거기에 남편은 생전의 역모 혐의까지 씌워져 부관참시를 당했다.
이개윤의 딸은 이후 빈궁한 삶을 영위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는데, 다행히 사신으로 갔던 이개윤이 그 참상을 목격하고 청황제에게 청해 딸을 조선으로 데리고 왔다. 그녀는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사헌부와 사간원은 이개윤이 제 딸을 조정의 허락 없이 제멋대로 데리고 왔다고 탄핵했고, 이에 조선에서도 힘들 삶을 살다 귀국 6년만인 1662년 8월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의순공주와 그의 아비 금림군')

의정부시 금오동의 황폐한 의순공주 묘
이개윤의 딸이 청나라로 떠날 무렵, 숙안공주는 홍중보의 아들 홍득기와 서둘러 혼인했다. 홍득기의 할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던 홍명구로, 당시 빠른 속도로 남하한 청나라 군대를 좇아 내려와 김화전투에서 승리하며 병자호란 유이(唯二)의 조선군 승전사를 쓴 사람이었다. 홍명구는 그 전투에서 안타깝게 전사했지만 아들 홍중보와 손자 홍득기는 후광을 입었다.

홍명구가 격전을 벌였던 충렬사 앞 들판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을 모신 김화 충렬사 
유림 승전비와 홍명구 충렬비 비각 
비각 안 홍명구 충렬비
홍득기는 혼인 후 익평위(益平尉)에 봉해졌으며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좋았으나 39세의 나이로 비교적 일찍 사망했다. 그런데 그의 아들 홍치상은 아비와 달랐으니 포악하고 욕심이 많았던 바, 제 어미와 공모해 평민들의 땅을 빼앗아 제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축적한 부(富)로써 사람들을 부렸다. 당시에 올라온 상소들을 보면,
"익평위(益平尉) 홍득기의 궁노(宮奴)가 우금(牛禁, 불법 도축)을 범해 놓고도이를 단속한 관리를 마구 때렸는가 하면, 또 궁노를 이끌고 본조 참의 이척연(李惕然)의 집에 가서 난동을 부렸으니,이는 예나 지금이나 없던 변고입니다.궁노를 엄하게 다스려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풍조를 징계하소서."
"숙안공주에게 내준 내수사 소속의 기름진 전토가 분명 부족한 것이 아닐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불분명한 민전(民田)을 침탈하여 그 근방에 사는 신구(新舊) 백성이 집을 헐고 유리(流離, 거처를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님)하게 만듭니까."
"숙안공주의 집을 지금 바야흐로 대수선 중인데, 백 명에 가까운 공장(工匠)들과 들어가는 많은 물건들이 이미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민폐가 도를 넘는 것이었지만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또 숙안공주와 홍치상은 정치색이 깅한 자로 서인에 속했다. (서인은 막강한 권신 송시열이 이끄는 붕당이었다) 그리고 정사에 간여하기를 좋아하였던 바, 조카인 숙종의 뒷배를 믿고 힘자랑을 일삼았다.
대표적으로는 장렬왕후 조씨(인조의 계비)의 조카 조사석을 탄핵하고, 남인인 희빈장씨(장희빈)와 숭선군(인조의 후궁 귀인조씨의 아들/효종의 이복동생)의 아들 동평군을 찍어낸 일을 들 수 있겠는데, 숙안공주와 홍치상에게 찍힌 정치인들은 최소한 유배를 갔다.

장렬왕후의 휘릉 / 인조의 두 번째 부인으로 권력 기반과 소생이 없어 이렇다 할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살다 죽었다. 무덤 역시 단릉(單陵)으로 쓸쓸하지만 정자각은 양 옆에 익랑이 붙어 있어 화려하다.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다.
반면 그들에게 잘 보인 사람들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서인의 전횡에 피로감을 느낀 숙종은 1689년 집권층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교체하는 기사환국을 단행했고, 이후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을 처형시켰다. 그럼에도 숙안공주는 권력욕을 놓지 못했으니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며 실각한 서인에게 자금을 대주며 또 한 번의 환국(換局)을 도모했고, 더불어 폐위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기도했다.
숙안공주의 인현왕후 복위 기도는 1694년 3월 26일 체포된 한중혁, 이시도 등이 전말을 자백함으로써 밝혀졌고, 숙안공주 역시 극형을 피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운 좋게도 그다음 날 숙종이 갑술환국을 단행하며 살아났다. 갑술환국은 5년전 일어난 기사환국과는 반대로, 남인들의 정치판에 피로감을 느낀 숙종이 남인 정치인들을 죄다 숙청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한 사건으로, 이로써 숙안공주는 재차 부활하여 자연사할 수 있었다. 그는 1697년(숙종 23) 12월 61세로 사망했다.
고양시 서오릉의 대빈묘 / 숙안공주와 대척했던 희빈징씨의 무덤이다. 그는 1701년 무고의 옥(=신사옥사)으로 사사된 후 경기도 구리시에 묻혔다가 광주로 이장되었는데, 1969년 도로공사로 서오릉에 천장했다. 
숙종의 명릉 / 같은 서오릉 묘원에 있다. 희빈장씨가 이사와 꽤 불쾌했을 것 같다.
요즘 정치판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김현지라는 인물이 있다. 너무 유명해 삼척동자도 알 듯한 이 여자는 얼마 전까지 총무비서관으로 있다가 국감에 불려 나갈 처지가 되자 갑자기 국감 안전지대인 제1부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대통령실의 중요 자리의 5~6명이 연쇄 이동을 해야 했는데, 까닭에 '김현지 과잉보호'로써 오히려 모든 언론이 주목하게 된 인물이다.
김현지는 2022년 9월 1일 국회에 있는 이재명 대표에게 보낸 "백현동 허위사(실공표), 대장동 개발관련 (허위)사실공표, 김문기 모른다 한 거 관련 의원님 출석요구서가 방금 왔습니다. 전쟁입니다"라고 적은 텔레그램 메시지가 카메라 기자에게 포착되며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 기사를 찾다보니 그에 앞선 2021년 12월 중앙일보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다루어졌던 바, 이미 화제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수수께끼 그림자 실세이다.

김현지의 화려한 등장 
중앙일보 기사 캡처 
그럼에도 알려진 것은 이 정도다. / 출생년도·학력 등은 여전히 설만 무성하다. 
김현지 총무비서관(왼쪽)이 제1부속실장이 되며 총무비서관이 된 윤기천 제2부속실장. 
김현지 총무비서관 제1부속실장되며 대변인으로 보직이 바뀐 김남준 전 제1부속실장 
9월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임웅순 국가안보실 제2차장과 대화하는 김현지 총무비서관 
완강히 버티던 강선우 여가부 장관 후보자를 한방에 날린 전화 한 통 (오히려 국힘이 당황할 정도?) 
김현지 비선실세 설에 깅훈식 비서실장이 '내가 진짜 실세'라며 떠드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얘는 아무래도 좀 모자란 사람 같다) 
문화일보 박준우 기자 페이스북 
지난 10월 2일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하는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의 사진이어서인지 무척 또렷하다)
최근 한 유튜브에 출연한 정치가는 정확한 소식통을 밝히며, 행정관 수백명의 인사를 좌우하고 장관급 인사까지도 맡아 처리하는 '흡연가' 실력자 김현지에게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공무원들도 많다고 전했다. 김현지의 파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例)라 하겠는데, 그외도 기절초풍할 이야기들이 차고도 넘친다. 들은 얘기를 다 전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지 모를 정도로.....아무튼 지금은 김현지에 대한 국회 출석 요구를 넘어 특검까지 들먹여지고 있다. 물론 야당 쪽의 주장인데, 쪽수가 적은지라 현실화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5년 후에는 사정이 달라질지 모른다. 숙안공주는 정권이 바뀐 5년 후에도 무사했지만 현대는 왕조국가가 아니므로 단죄될 것이다. 김현지의 죄상과 모사꾼 기질은 어쩌면 조선조 최고의 악녀라 불리는 인조임금의 후궁 귀인조씨에 필적하지만, 그 귀인조씨도 숙안공주에게 거꾸러졌던 바, 숙안공주를 가장 싱크로율 높은 역사적 인물로 삼았다.

드라마 '꽃의 전쟁' 속의 귀인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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