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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일전쟁과 1894년의 마지막 한일전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0. 6. 22:34

     

    1894년~1895년 일어난 청일전쟁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교과서에 실린 내용을 교과서적으로 서술하자면 청일전쟁의 원인은 1894년 6월 1일 동학농민군이 기세를 올려 전주성을 점령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동학농민군을 제압할 자신이 없었던 조정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이때다 싶었던 청나라 직례총독 이홍장(1823~1901)은 당일로 2,460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1차 파견군임)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이때 이홍장이 쾌재를 부른 사실이 <청광서 조중일 외교사료>에 전한다. 「갑오농민 반란은 조선 내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민란임에도 바보 같은 조선 정부가 청병(請兵)을 해 우리에게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쁨을 내색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홍장은 당시의 청나라가 열강의 침입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에도 조선만은 속방으로 두어 대국의 체면을 지키고 싶어 했던 바,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리고자 했다. 

     

    이홍장이 재빨리 청황제의 형식적 승인을 받은 후, 자신의 직할군인 직례군 야전부대에서 파병군을 선발했다. 그가 선발한 부대를 보면, 주로 근대화 정도가 높고, 군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직례연군(直隷練軍) 부대의 군인들로서, 이들 선발된 2,460명을 직례제독 섭지초와 태원진총독 섭사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윤선초상국에서 파견된 상선에 실어 조선 중부 아산만으로 보냈다.

     

     

    당시의 직례군 장교

    이들 선두부대를 좀 더 살펴보면, 1894년 6월 6일, 섭사성은 고북구연군의 우영(右營), 무의군 부중영(副中營), 무의군 노전영포대(老前營砲隊)등 세 무리의 부대 약 1천 명을 이끌고 천진 대고에서 '도남'(圖南)이라는 상선을 탔는데, 이때 실린 무기는 금릉기기국에서 제작된 60밀리 화포와 포탄 800발, 소총탄 21만 발, 군마 90필 등이었다. 기타 98개의 야전천막, 40개의 취사용 구리솥도 실렸다.

     

     

    섭사성
    조선 파병군이 출발한 천진 대고항의 포대 / 아편전쟁 때 영국군에 박살났던 곳이다.

    섭지초는 6월 8일 나머지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어 '해안'(海晏)과 '해정(海定)의 두 배에 태워 출발했다. 이들은 정정연군(正定練軍)으로 구성된 중영을 비롯한 우영, 전영, 좌영에 편성됐고, 기타 섭지초의 직할 기병소대와 막료관원이 배에 올라 총 1555명이 되었다. 이들은 소총과 일반적인 공용화기 외에 금릉기기국이 만든 특별한 화기인  콩그리브로켓(Congreve Rocket)  및 포탄 200발과 발사대 2개를 가져갔다.

     

     

    금릉기기국에서 제작된 콩그리브로켓과 개틀링 기관총

     

    그에 앞서 이홍장은 6월 5일 이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다. 10년 전 갑신정변의 수습 과정에서 일본과 맺은 국제조약에 따른 일이었다. 당시 이홍장은 이토 히로부미와 맺은 톈진조약에서 「조선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여 어느 한쪽이 군대를 파병하게 될 때 우선적으로 상대방 국가에게 통고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는 것에 합의하였기에 의무사항을 준수한 것이었다. 

     

    그러자 일본에서도 난리가 났다. 하지만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제국주의는 일사불란하게 대처하였던 바, 6월 5일 천황 직할의 전시대본영(戰時大本營)을 조직하고, 일본군의 주력군인 히로시마 제9여단을 주축으로 야전병원, 병참 치중대, 위생대 등으로 구성된 혼성제9여단을 구성했다. 총병력은 7,120명으로, 기병대용 말 297필, 포병대와 병참용 말 448필과 함께 1, 2차로 나눠 히로시마 우지나항(宇品港)을 출발했다. 

     

     

    당시의 우지나항
    명치~대정시대의 히로시마 우지나항 잔교(棧橋)
    청일전쟁을 계기로 군항으로 변모한 우지나항
    우지나항에 남은 잔교의 흔적
    우지나 항에 남은 잔교의 흔적

     

    목적지는 수도 한성과 가까운 제물포항이었다. 9척의 운송선에 탄 1차 파병군은 6월 15일 상륙했고, 8척의 운송선에 탄 2차는 파병군은 6월 27일 상륙했다. 그리고 안성에 상륙한 후 머무르고 있던 청군과 달리 빨 빠른 행동을 보였던 바, 부천 포대를 비롯한 인천과 한성 간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수도 한성을 향해 진격했다. 

     

     

    인천항에 상륙한 일본군 / 왼쪽 노란 색 테두리 안이 해운회사인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이다.
    현 인천아트플랫폼 관리사무실로 쓰이는 일본우선주식회사 건물
    서울로 진격하는 일본군 / 대불호텔 앞을 지나고 있다. 오른쪽에 조선인이 긴 행렬을 이룬 채 구경하고 있다.
    현 인천 대불호텔 전시관

     

    한성에 도착한 일본군은 7월 중순 도성 밖에서 몇 차례 훈련을 가졌고, 20일에는 도성 북쪽 숙정문 밖으로 일본군 11연대, 서쪽 창의문 밖으로 21연대, 동쪽 흥인지문 앞으로 11연대, 광희문 앞으로 21연대가 포진했다. 그리고 23일 새벽 4시 20분, 혼성 제9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1천여 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경복궁을 기습 공격했다. 경복궁 내에는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 평양 기영(箕營) 등 약 500명의 조선군이 있었다. 서울 주둔군의 거의 전부인 숫자였다.

     

     

    오시마 요시마사 / 육군대장 시절 사진이다.

     

    이처럼 수가 적었던 이유는 동학농민군을 상대하기 위해 전부 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는데, 수적으로 부족한 조선군은 곧바로 전개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크게 밀리며 북문인 신무문과 서문인 영추문이 돌파당했다. 영추문은 일본군이 장치한 폭약으로 파괴되었던 바, 폭파의 굉음이 조선군을 위축시켰다. 하지만 독일제 소총으로 무장한 평양시위대를 비롯한 조선군은 끝까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고종 내외를 사수했다. 당시 고종과 민왕후는 건청궁을 나와 궁녀들의 처소인 함춘전에 피신해 있던 상태였다.

     

     

    일본 종군화가가 그린 신무문과 시계탑(노란색 칠한 곳)  / 일본군의 개인화기가 무라타 13년식 소총임을 알 수 있다.
    1901년 체코 여행가 스탄코 브라즈가 찍은 집옥재 앞 시계탑
    마찬가지로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가 찍은 사진이다. 신무문 안에서 궁궐을 향해 찍은 것으로 왼쪽에 시계탑이 보인다.
    일본군에 공파당한 신무문
    안쪽에서 본 신무문
    전투가 벌어졌을 집옥재 앞
    스탄코 브라즈 사진첩의 집옥재 (계단에 서 있는 사람)
    북궐도형에서의 함화당 위치 / 빨간 점이 시계탑, 파란 칠한 곳이 집옥재, 노란 칠한 곳이 건천궁이다.
    함화당에서 본 향원정
    그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물 / 왼쪽부터 <서유견문>,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당대의 신식화폐이고, 가운데는 신식군대의 무기 독일산 베르덩 소총이다.

     

    그런데 오전 5시 30경, 함화당의 고종으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 총소리가 함화당에 가까워 오자 겁을 먹은 고종이 항복을 결심한 것이었다. 매천 황현의 <매천실록>에는 「비록 천류((賤流, 천한 무리)이나 국은(國恩)을 입었기에 단결해 결사항전하던 조선군은 통곡하며 군복과 총기를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했다」고 돼 있다. 이 1시간 10분가량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7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크루프 기관포 8문, 개틀링건 8문, 각종 소총 3000정과 무수한 잡무기, 군마 15필을 전리품으로 챙겼으며, 이때 고종이 몸소 나와서 "쏜 일이 없기 때문에 빼앗을 이유가 없다"며 무기 몰수의 유예를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이날의 짧은 전투는 역사상의 공식적인 마지막 한일전으로, 이 역시 고종의 비겁함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군은 무장을 해제당했고, 조선 정부를 제압해 명령의 일원화를 꾀한 일본은 청국과의 전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일본군의 경복궁 무단점령을 묘사한 판화 / 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淸親)의 작품으로 오른쪽 말 탄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즉 조선군은 일본의 명령에 따라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일본군은 청일전쟁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 승리로써 조선 침략의 발판을 닦게 되고 마침내 병탄까지 성공한다. 말하자면 청일전쟁은 한반도에서 중국이 물러가고 일본이 들어오는 계기가 된 사건이며, 한일병탄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일본의 승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청나라가 이기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니, 나는 다만 당시 조선의 무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말한 대로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벌인 조선의 패권 다툼으로, 그들의 전투는 거의가 한반도에서 치러졌으며 그 과정에서 아무 죄 없는 조선인 3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조선의 정치인들은 친청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싸웠다. 미구에 미중전쟁이 벌어진다면 친미파와 친중파가 또 그렇게 될 터이다. 

     

    전쟁 중 조선백성들은 여기저기로 피난 다니기에 바빴는데, 개성에서는 조선군끼리 서로 총질을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로간의 반목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청군에 소속된 평안도관찰사 휘하의 군인들과 일본군에 소속된 경군(京軍) 장용영 군인들이 전투에 내몰린 결과였다. 청군과 일본군은 이 조선군들을 총알받이로 앞장 세웠고, 살기 위한 본능으로 조선군끼리 싸우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평양에 진군한 일본군은 포로로 잡힌 조선군 12명을 참수했던 바, 이미 나라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평양전투에서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들을 지키는 조선군 / 이들은 살고 청군을 지원한 조선군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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