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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산 최우의 무덤에서 나온 청자상감 운학문매명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0. 15. 01:00
강화도 여행은 출발을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에 쫓기기 일쑤다. 언필칭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인지라 이것저것에 눈이 팔리다 보면 집에 갈 때 고생을 하게 된다. 특히 주말에는 교통체증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서 버킷 리스트였던 '고려산 최우 무덤 찾기'에 매달렸을 때는 주말 2박3일 간을 아예 고려산 아래 펜션에서 지낸 적도 있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 민물게장만 탐닉하다 왔을 뿐 소기의 목적은 아직 이루지 못한 상태다.

강화 순무김치의 맛도 잊을 수 없다. / 강화순무 김치는 강화도 무에 강화도 물로 담가야 제맛이다.
고려산 최우 무덤에서 나왔다는 청자상감 운학문매병(靑磁象嵌 雲鶴文梅甁)은 가히 고려청자의 왕중왕이다. 일제강점기 도굴꾼이 건진 이 보물은 1935년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에게 넘어갔고, 간송 전형필이 거금 2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쌀 1가마가 16원,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천원이던 시절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 아파트 2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이 매병은 2013년 500억원의 보험료가 책정됐다)
췌언을 덧붙이자면, 이 청자에는 학과 구름 문양만 있을 뿐 매화는 없다. 그런데 왜 매병(梅甁)일까? 썰은 두 가지로, 그 형태가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해동청 보라매를 닮은 모양이라 하여 매병이라 붙여졌다는 것이 첫 째 썰이다. 둘 째는 매화주를 담는 용도로 사용돼 매병이라 붙여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천학매병'이라 불렀다는 소리도 있다. 문양으로 쓰인 학의 개수는 총 69마리지만 병을 빙빙 돌리면 학 1000마리가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상감운학문 천학매병이라는 것인데, 이 귀한 병이 매화주를 담는 용도에 국한되었다는 점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매화주를 담는 용도라면 매화를 그려 넣었어야 맞는 게 아닐까?
고려산에서 최우 무덤을 도굴해 최우의 애장품이었던 이 매병을 입수한 자는 야마모토라는 일본인으로 전문 도꿀꾼으로 알려진 놈이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장물아비인 경성 혼마치(명동)의 골동품상 스즈키 다케오에게 1000원에 팔았고, 스즈키 다케오는 대구의 치과의사 신창재(愼昌宰)에게 4000원에 팔았다. 신창재는 이것을 들고 다시 서울로 와 대화정(필동)의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에게 6000원에 넘겼는데, 청자상감운학문 천학매병이라는 명칭은 이때 마에다가 붙였다고 한다.
귀한 물건을 손에 넣은 마에다는 이것을 총독부 박물관에 팔려 가져갔으나 박물관 측이 1만원을 제시하자 도로 싸 가지고 왔다. 그 가격에는 절대 안 팔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소식을 조선 갑부 2세 청년 전형필이 듣게 되었다. 자신의 전속 중개인인 일본인 골동품상 신보기조(新保喜三)로부터였다. 전형필이 신보를 통해 마에다를 방학동 제 집으로 불렀다. 때는 1935년 봄으로, 전형필의 나이 스물아홉 무렵이었다. 간송은 마에다가 가져온 청자매병을 신중하게 집어 한 바퀴 돌려보았다. 그의 미간이 살짝 접혀진 것은 필시 청자매병에 난 긴 철장(鐵杖) 자국 때문이었으리라.

방학동 간송 전형필 가
이 자국은 도굴꾼의 탐침봉에 긁힌 상처였다. 도굴꾼들은 무덤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긴 쇠꼬챙이를 땅에 찔러넣는다. 한 번이라도 파헤쳐진 땅은 꼬챙이가 깊숙히 들어가 박히지만 생땅은 절대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발견된 최우의 무덤이었고 청자상감 운학문매병이었다. (조금만 더 깊게 찔렀다면 깨질 뻔했다) 하지만 청년 전형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매입하겠다는 뜻이었다.
마에다는 거금 2만원을 제시했다. 마에다로서는 희망하는 가격을 부른 것이었으나 눈앞의 조선 청년을 살짝 무시하는 면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형필이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는 준비했던 가죽 가방을 마에다 앞에 내밀었다. 2만원이 든 가방이었다. 전형필은 조선총독부에서 매입가격으로 1만원을 제시했다가 거절되었다는 말을 신보기조로부터 듣고 마에다가 2만원을 부르리라는 것을 예상한 것이었는데, 예상이 정확히 적중한 셈이었다. 전형필은 한 푼도 깎지 않은 채 가방을 디밀었다. 아마도 마에다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으리라. 전형필은 거간꾼 신보에게도 관례대로 2%에 해당하는 소개비 400원을 주었다.
이틀 후 마에다는 마침 조선에 와 있던 장인 아마이케를 만나 청자상감 운학문매병과 기개 높던 조선 청년 이야기를 했고, 같은 업에 종사하던 아마이케는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의 단골인 오사카의 거상(巨商) 무라카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말을 귀담아들은 무라카미가 한 달 후 조선으로 건너와 간송의 집에서 청자매병을 보게 되었다. 그는 단박에 가치를 알아보았던 바, 4만원을 제시하며 매수에 나섰다.
이때 전형필이 웃으며 "어떻게 2만원에 산 물건을 4만 원을 받겠느냐'며 2만 원에 매도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선생께서 소장하신 물건 중에서 이 청자매병보다 더 좋은 청자를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그 대가는 당연히 시세대로 쳐드리고 답례로써 이 청자매병을 제가 산 가격 그대로인 2만원에 양도하겠습니다."이 조건을 들은 무라카미는 자신의 결례를 피력한 후 조선 제일의 수장가가 되라는 덕담을 남기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상은 이충렬 저 <간송 전형필>에 실린 이야기 등을 발췌해 정리한 것이다. 국보 제68호 청자상감 운학문매병이 출토됐다는 고려산 최우의 무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간송 전형필의 젊은 시절 
국보 70호 훈민정음 혜례본 / 이 책이 세상에모습을 드러내자 간송 전형필은 책값 1만 원에 별도 사례금 1천원 주고 구입하였다. 판매자가 처음 부른 가격의 10배가 넘는 금액으로서 간송은 이 가격이 원래 책의 가치라고 말했다고 한다. 
간송과 경쟁했던 일본인 골동품상들 / 미술픔경매소인 경성미술구락부 창립 때의 사진이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 2019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보화각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수집한 미술품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1938년 건립한 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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