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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과 신립의 묘 & 십만양병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0. 22. 06:29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아무런 대비도 없던 조선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8천7백 명의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싸움을 걸어왔다. 고니시의 왜군은 부산첨사 정발이 지키는 부산성을 단 몇 시간 만에 함락시켰다. 이어 왜군은 곧바로 동래부사 송상헌이 지키는 동래성으로 몰려왔고 동래성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다 충주 탄금대에 이르러 비로소 조선군의 주력 부대를 만났다. 삼도 도순변사 신립이 이끄는 8천명의 군사였다. 

     

     

    조선의 기마병과 마주한 고니시의 왜군

     

    충청북도 충주 달천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조선군은 4월 28일 정오경 적군을 마주했고 왜군이 다가오자 1천여 기의 기마군을 앞세워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들 1천여 기는 신립이 키워온 기병대로서 온성부사 시절인 1583년, 이 기병대를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한 바 있었다. 당시 신립의 기병대는 조선의 국경 여진족 지배에 대한 불만으로써 난을 일으켜 쳐들어온 여진족 추장 니탕개(尼湯介)의 군대를 박살내고, 두만강 너머 그들의 근거지까지 소탕한 후 개선하였다.

     

    이후 조선의 조정은 신립을 크게 신임해 마지않았다. 이에 임진년 일본군의 침입에 있어서도 그를 삼도 도순변사에 임명해 외적을 막게 하였으며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알려진 대로 조선군은 이 싸움에서 불과 두 시간 만에 대패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 달천벌 전투는 왜군 측에서 보자면 나가시노 전투의 재판(再版)이었다. 나가시노 전투는 1579년에 일본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벌어진 싸움을 말한다. 

     

    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최고의 기마군을 보유한 '다케다 가쓰요리'군은 조총을 지닌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무참히 패배했다. 아버지 다케다 신겐은 이 기마군으로써 전국시대 유일의 무패의 장수로서 군림했지만, 아들 가쓰요리는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신무기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다.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는 평소 전법대로 기마대를 앞세워 돌진했으나, 그 기마병들은 철포(조총)를 맞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 '무뎃뽀'(無鐵砲)라는 말이 생겨났다. 철포 없이 전장에 나서는 대책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이 전투에서 대충 쏘아도 달려드는 기마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 기마병들이 밀집상황인 까닭에 벌어진 전황이었다. 이것이 중추 달천벌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던 것이니, 훈련된 기병으로 단숨에 적의 보병을 쓸어버리려던 신립의 작전은 여지없이 부서져버렸다. 신립은 달천벌 전투에서 전사했다. 

     

     

    신립이 배수진을 친 충주 달천벌 / 오마이뉴스 DB
    전황도 / 나무위키
    전황도 / 나무위키

     

    4월 30일 새벽, 선조 임금은 일족과 백관, 기타 궁인들과 함께 창덕궁을 나와 피난길에 올랐다. 왜군이 충주서 신립의 부대를 격파하고 북상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몽진은 조선 건국 이래 200년 동안 유래가 없던 일이었던 바, 창망하기 그지없었는데 거기에 폭우까지 겹쳐 도무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임금과 동궁은 말을 탔고 중전 등은 뚜껑 있는 교자를 탔는데 일행이 홍제원에 이를 무렵 빗줄기가 굵어져 종이품 이하는 교자를 버리고 말을 탔다. 

     

     

    빗속에 몽진하는 왕 &
    왕비 행렬

     

    궁인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걸어서 따라갔으며 종친과 호종하는 문무관은 그 수가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점심을 벽제관(碧蹄館)에서 먹는데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으나 동궁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으나 여전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고, 경기관찰사 권징은 무릎을 끼고 앉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녁에 임진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임금이 신하들의 꼴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고양시 신도동 옛 숫돌고개(여석령) 마루 / 선조임금은 빗속에 이 가파른 고개를 넘었다.
    비내리는 숫돌고개 벽화마을
    숫돌고개 주택가 벽의 '원조 의주길과 사신단' 푯말 / 의주길은 한양에서 고양,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이어지는 옛길로 조신시대의 옛길 중에도 가장 중요한 지름길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여기까지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내용이니 모두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래의 픽션이 끼어들며 사실인 양 녹아든다.

     

    다행히 배는 구했으나 비 내리는 밤이라 달빛도 없었다. 이에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어 우왕좌왕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밝아왔다. 누군가 주변의 정자를 발견하고 그 정자에 불을 붙여 사방을 밝힌 것이었다. 이 나루터에 마침 태울 정자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거니와 그것이 빗속에서도 활활 타올랐던지라 (임금이) 경황 중에서도 신기해 물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답했다.

     

    "스승이신 율곡 선생께서 생전에 이곳에 정자를 지어놓았습죠. 그때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자신이 죽은 지) 10년을 지나지 않아 토붕와해(土崩瓦解)의 병란이 일어날 것이며, 그때 주상전하께서 어두운 밤 빗속에 이 강을 건널 것인즉 너희들은 정자 기둥에 기름칠하기를 게을리 말라 했습니다."

     

    이항복은 율곡 이이(1536~1584)의 문하이던 사람이었다. 그가 율곡 생전에 이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얘기인데, 정자 기둥에 기름칠을 하라 함은 빗속에서도 잘 타게 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율곡 이이는 생전에, 구체적으로는 계미년(1583년) 4월에 "국세(國勢)가 극히 부진하여 십 년 안에 토붕의 화(국토가 무너지는 병화, 즉 임진왜란)가 미칠 것인즉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배치하라"고 주장했으나 임금 선조와 재상 유성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임금의 몽진을 예측하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야기인즉 그 말을 들은 선조가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신을 책하며 눈물을 쏟는다는 것으로서 끝맺는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이이의 신산묘계는 동남풍을 불렀던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을 뺨친다. 아니 그보다도 신(神)의 반열에 올라야 마땅하다. 한마디로 거짓말이라는 얘기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10년 전 미리 예측하고 게다가 임금이 야밤에 강을 건널 것과, 그때 비가 내려 암담할 것까지 정확히 예측해 낼 수 있는 능력..... 이는 신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위의 전설이 깃든 파주 화석정
    화석정에서 보이는 임진강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고 알려진 십만양병설 또한 사실이 아니다. 율곡 이이를 칭할 때면 반드시 십만양병설이 따라붙고, 과거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던 만큼 모두들 사실로 알고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선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단어나 내용이 단 1회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역시 누군가의 창작이라는 얘기다. 아마도 <유비무환>을 강조하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안보 이데올로기에 동참한 어용학자들이 이를 만들어 교과서에까지 게재했을 것인데, 그렇다고 생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바.....

     

    어용학자들은 당시 율곡의 제자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개인 문집인 <사계집(沙溪集)>에서 십만양병설의 근거를 찾았다. <사계집>의 한 챕터인 <율곡행장>에 이이가 10만의 군병을 길러 완급에 대비하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토붕와해의 병란이 일어날 것을 말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음이었다.(請預養十萬兵 以備緩急 否則不出十年 將有土崩之禍....)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단지 율곡이 경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뿐, 다른 증빙은 없었다.

     

    그런데 이 근거 없는 이야기를 김장생의 제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확대 재생산하였다. 그가 쓴 <율곡연보>에 따르면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함과 함께 임진왜란이 발생할 해와 달까지 정확히 예측하여 훗날 서애 유성룡이 그를 진짜 성인(眞聖仁也)이라고 탄복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역시 율곡이 경연에서 이런 계고의 말을 했다는 것뿐이다.(先生於經筵啓曰)

     

    김장생이야 그렇다 치고 송시열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암 송시열과 율곡 이이는 몰년(歿年)이 1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바, 그가 율곡의 경연을 들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히 율곡의 경연 내용에 대해 떠들고 있다. 즉, 실록에도 없고 다른 사료에도 없으며 오직 율곡 제자의 개인 문집에 실린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양 회자되고 있는 현실은 그 제자들의 창작력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하필 '10만'을 거론했을까? 유성룡의 <징비록> 등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입한 왜군의 수가 16만이었다. 이에 맞서 싸울 조선군이 20만이면 더욱 좋았겠지만 당시 2만의 상비군도 가지고 있지 못한 조선의 현실에서 20만은 과했을 터, 10만 쯤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소재 충장공 신립의 묘
    묘표
    후경
    평산신씨 충장공 종중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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