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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제련과 요업 기술자 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0. 31. 22:28

     

    2019년 6월 19일부터 7월 28일까지 일본 시마네현 현립 고대 이즈모 역사박물관에서 정은(丁銀) 3점에 대한 특별 전시가 있었다. 정은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12주년 기념행사였다. 전시된 3점의 정은은 어취납정은(御取納丁銀, 오토리오사메 쵸긴), 어공용 정은(御公用丁銀, 고구요 쵸긴), 분록석주 정은(文禄石州丁銀 분로쿠세키슈 쵸긴)의 3점이었다. 

     

     

    정은 / 왼쪽부터 분록석주정은(文禄石州丁銀), 어취납정은( 御取納丁銀), 어공용정은(御公用丁銀)

     

    이중 우리와 관계 깊은 정은은 분로쿠세키슈 쵸긴, 즉 분록석주 정은이다. 분로쿠 2년(1593) 4월에 만들어진 정은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계획하며 필요한 무기나 배를 구입하기 위한 군자금 용으로 만든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자신의 연호를 따 분로쿠노에끼(文綠の役), 정유재란을 게이초노 에키(慶長の役)라 부른다.

     

     

    분록석주 정은
    거울로 '분록석주 정은'의 표면이 보인다.


    정은(丁銀)은 은괴의 형태로서 화폐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1만엔 지폐와 같은 액정 화폐가 아니라 은의 무게로 거래되었다. 그리고 실제의 지불에 사용할 때에는 필요한 만큼 잘라서 사용했는데, 잘린 후에도 정은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미세 무늬가 표면에 새겨졌다.  

     

    그런데 이것이 왜 세계유산으로까지 등록되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를 주목해야 한다. 16세기는 이른바 대항해의 시대였다. 유럽제국은 개척된 신항로를 따라 동양으로 진출했고 인도 및 명나라와 교역했는데, 당시 명나라는 은(銀)본위제인 일조편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이에 유럽인들은 일본의 은을 수입해 명나라와 교역을 했던 것이니, 위 3점의 정은은 그 16세기 국제교역을 증명하는 유물인 셈이다. 일본은 이 정은으로 부자나라가 됐다. 

     

     

    희망봉의 발견 / 대항해 시대'의 첫 단추를 꿴 사람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한 포르투칼의 항해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였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까지의 첫 장거리 항해에 성공한 사람이었는데, 그 뒤를 이은 바스쿠 다 가마는 케이프타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이후로도 2번이나 인도를 항해하였던 바,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 루트를 따라 아시아로 갈 수 있었다.
    희망봉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여기서 심한 폭풍을 겪은 탓에 이곳의 이름을 '폭풍의 곶(Cabo das Tormentas)라 명명했는데, 당시의 국왕 주앙 2세는 향후의 사람들이 항해를 두려워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이름을 '희망봉(Cabo da Boa Esperanca/Cape of Good Hope)'으로 바꾼다.
    1570년 유럽에서 그려진 해도 상의 일본 지도 / 조선은 흔적도 없음에도 일본은 관서지방과 시코쿠가 거의 정확히 그려져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위 정은으로 직접 무기를 구입하였던 바, 이후 포르투칼로부터 조총 등이 들어왔고 일본 내에서도 복제품이 생산되었다. 운 좋게도 당시 일본 이와미 은광 생산량은 세계 1위였다. 그런데 아무리 은이 많이 나도 제련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일 터인데, 또한 운이 좋게도 조선으로부터 제련술이 도입됐다. 조선에서 버린 제련술이 건너온 것이었다.

     

    은 제련술을 개발한 사람은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라는 양인(良人)과 노비였다. 이들은 이 제련술을 나라에 바치고자 하였던 바,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9년 벼슬도 없는 이 두 사람이 어전회의에 참석해 자신들이 개발한 제련술을 설명하는 장면이 실려 있다. "납 한 근을 이용하면 은 두 돈을 제련할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이제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뚜렷하다.(1503년 5월 18일 <연산군일기>)

     

    이들이 개발한 은 제련술은 '회취법(灰吹法)'으로 불렸다. 탄회(炭灰, 불에 탄 재) 속에 은광석과 납석을 섞어 녹이면 납은 재에 흡수되고 은만 분리되는 제련법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용융점(녹는 점)의 차이를 이용해 납만을 녹여 은을 분리하는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었다.

     

    <나무위키>에 살려 있는 이와미 은광의 회취법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에서 은을 대량 생산하는 것을 알면 명나라에서 '금은' 조공 요구가 더욱 가혹해 질 것이라는 걱정에서였다. 아니 오히려 조선은 이를 계기로 조선 최대 은광이었던 함경도 단천광(丹川鑛)을 폐쇄시켜 버렸다. 그런데 그 회취법이 1526년 일본 시마네현에서 발견된 은광에 접목되었다.

     

    자세한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일본 사서에는 덴분(天文) 2년(1533년) 조선에서 초빙된 기술자 종단(宗丹·소탄)과 계수(桂壽·게이주)가 규슈 하카다 출신 상인의 주선으로 건너 와 이와미 은산에서 연은분리법인 회취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쓰여 있다.(伴同國博多 宗丹及桂壽者 而來于銀山 始吹鎔鍵製白銀)

     

     

    이와미 은산(石見 銀山) / 견학 코스로 남은 은광 갱도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이와미 은산 시미즈다니 제련소 터
    광부들이 살았던 이와미 은산 오모리초 마을

     

    아마도 조선에서 몰래 은 가공을 하며 살아온 김감불과 김검동의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이후 이와미 은광의 은 생산량은 저 유명한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생산량을 자랑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회취법은 다른 광산에서 전수되며 일본이 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당시 조선은 여전히 은광이 폐쇄된 상태였다. 

     

     

    포토시 / 1545년에 스페인제국에 의해 은 광산이 발견되었고 개발과 더불어 포토시가 형성되었다. 포토시 은광은 19세기까지 채굴되었다. 뒤로 보이는 산은 해발 4,824m의 세로 리코 포토시로 '세로 리코'는 '부유한 산'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부유함은 오직 스페인인 지배자들 뿐이고 원주민들은 광산에서 죽도록 일하다 죽음을 맞았다.

     

    올해(2025년) 6월 9일부터 8월 31일까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특별전이 열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개관 20주년을 맞이해 열린 그 특별전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시작과 함께 개화한 국초(15~16세기) 조선 미술의 정수를 한 자리에 모은 대규모 기획전시였는데, 전시된 미술품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자기였다. 그 면면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백자철화매죽문호
    백자철화 끈무늬 병
    분청사기 상감 모란무늬 병
    광해군의 태 항아리

     

    그런데 그후 500여 년이 지난 1952년에 생산된 자기는 오히려 크게 퇴보했다. 아래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주전자는 8.15 광복 7주년 기념 도자기로 1952년 벽성종합공장이라는 요업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옛날로 치자면 관요(官窯)에서 생산 된 일급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조선초의 것에 비하자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후지다. 반면 일본 메이지시대 유럽왕실로 수출되던 사쓰마 야키(薩摩燒, 사쓰마 도자기)는 더 없이 훌륭하다. 

     

    왜 이런 격차가 벌어진 것일까? 16세기 말까지도 일본은 변변한 도기 하나 못 만들던 나라가 아니던가? 다음 회에 이를 심층분석하고자 한다. 

     

     

    광복 7주년 기념 자기 주전자
    사쓰마야키 매병
    사쓰마야키 항아리
    사쓰마야키 현채운류(炫彩流雲) 다완

     

    ▼ 이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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