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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 장애인 정화옹주에 얽힌 진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1. 8. 21:19

     

    예전 일간신문에 '하마비'(下馬碑)라는 코너가 있었다. 개각(改閣) 등 관직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 후보의 인물됨이나 능력에 관한 촌평(寸評)을 싣는 기사란이었다. 짧지만 그 기사에는 후보자의 함축된 일생이 담겨 있는데 고위공직자에 오를 만큼의 인물이기 때문인지 한결같이 훌륭한 인품에 출중한 능력을 갖췄다. 그래서 국민들은 잠시나마 행복감과 기대감에 젖으나 그 하마평이 진실과는 아주 동떨어질 때도 많았다. 시쳇말로 빨거나 비비거나 해서 승진의 기회를 잡은 놈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그렇게 훌륭한 인품과 출중한 능력을 갖췄다면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퇴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고금(古今)이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일례로 작년 4월 15일 윤석렬 정부의 인사개편에 즈음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분들의 면면을 보면 대통령께서 과연 총선 민의를 수용할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상당히 우려된다"고 비판했지만 자신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인사 역시 똑같은 우려를 자아냈다. 

     

    특히 그가 자신 재판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들을 대거 정부 요직에 인사했을 때는 우려를 너머 경악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했던 것 같다. 오늘 찾아간 정화옹주와 동창위(東昌尉) 권대항(1610~1666)의 경우도 그러해서 신도비에 쓰여 있는 내용과 사서의 기록이 현격히 다르다. 신도비에 따르면, 그는 "타고난 성품이 충실하고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사람을 사귈 때 겸손하여 존귀하다 생각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양친을 정성껏 봉양하고 일가친척에도 베풀기를 좋아하는" 인격 있는 사람이었다.

     

     

    정화옹주와  동창위 권대항의 합장묘 / 고양시 덕정동 183-2에 위치한다.
    권대항의 신도비 / 미수 허목(許穆)이 찬하고 조위명(趙威明)이 썼다. 비신 1780x690cm, 비좌 780cm, 전체 높이 약 3m.
    옆에 신도비 한글본을 세웠다.

     

    하지만 사서에서는, 권대항은 오만하고 포악해 수시로 행패를 부렸고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고 돼 있다. 일례로서 "태복시(太僕寺,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말을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에게 하사했는데, 대항이 그 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말로 바꿔오도록 하니, 임금이 이 말을 듣고 허락하였다. 그런데도 대항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관리를 매질하였으므로 간관이 탄핵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도 보이고, (<인조실록> 9년 1월 기사)

     

    "동창위 권대항은 빚을 받는다는 핑계로 민간을 소란스럽게 하며 피해를 주고, 또  첩급마(帖給馬, 공문에 따라 지급한 관청의 말)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성을 내어 태복시의 하리(하급 관리)를 구타하여 끝내 운명하게 하였는데도 감히 차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임금을 번독케(너저분히 번거롭게) 하였으니, 놀랍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하였으나, 임금이 "꼭 파직시킬 것은 없다"고 답한 대목도 나온다.( <인조실록> 9년 10월 기사)

     

    지급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관리를 때려죽인 자이니 실록의 그 밖의 내용은 다룰 필요도 없다. 당연히 좋은 내용이 아니다. 권대항은 위 사건 외에도 사헌부의 처벌의 상소가 여러 번 올라갔으나 권대항이 상소하여 해명했다는 내용만 나오고 처벌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다 1666년(헌종 7)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말하자면 천수를 누렸다는 얘기인데 사람까지 죽인 중죄인이 어떻게 무탈하게 천수를 다할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권력의 힘이다. 조금 더 나쁜 쪽으로 생각하자면 부족한 여인을 아내로 맞은 데 대한 왕가의 보상일 수도 있다. 정화옹주(1604~1667)는 선조가 죽기 4년 전인 53세 때 얻은 막내딸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언어 장애가 있어 평생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이에 아무리 옹주라도 혼처를 구하기 힘들었으니 당시로서는 한참 노처녀인  26살에 이르기까지도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러자 인조가 예조로 하여금 책임지고 부마를 간택하게 하라 명했고, 이에 권대항과 혼인하게 된 것이었다.

     

    권대항은 정화옹주보다 6살 연하이며 안동권씨 뼈대 있는 가문의 자식으로 자는 응정(應貞)이다. 조부는 도승지 권희,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권익중, 어머니는 현감 조서(趙瑞)의 따님 한양조씨이다. 이를 보면 정화옹주는 하가(下嫁, 낮춰 시집을 감)라 할 수 없는 출가였다. 대신 권대항은 어떤 보상 같은 것을 받은 듯하니 그것이 실록에서 자주 문제가 되고 있는 말(馬)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무리 부마라 해도 태복시의 말을 이처럼 쉽게 받을 수는 없는 법,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던 듯하고 게다가 지급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태복시 관리들을 대놓고 구타하였던 바, 급기야 맞아 죽는 사람까지 나온 것이었다. 그는 사람보다 말을 더 중하게 여겼던 듯하니, 그의 무덤 아래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말무덤도 있다. 부부는 몰년(沒年)이 비슷해 권대항은 1666년, 정화옹주는 1667년에 죽었는데, 끝까지 자식은 없었다.

     

     

    정화옹주와 권대항의 합장묘
    잘 다듬어진 호석이 인상적이다.
    묘표
    후경
    좌·우 문석인
    애마총 / 권대항의 말무덤이다.
    제각

     

    묘소 입구에 안동 권씨 문중에서 새로 세운 국한문혼용체의 신도비가 있다. 내용은 구 신도비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구 신도비의 내용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실록 등의 내용과 상이하나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알 수 없는 바, 양자를 모두 소개함이 옳을 듯하다.

     

    유명 조선국 자의대부 동창위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권공 신도비명 병서

     

    중훈대부 전(前) 행(行) 사헌부 장령 허목(許穆)이 짓고 전(篆)을 하였으며, 통훈대부 전 행 사간원 정언 조위명(趙威明)이 쓰다.

    권씨(權氏)는 본래 신라의 후손이다. 시조인 태사(太師) 행(幸)은 고려를 섬겨 권씨를 사성(賜姓)받았다. 자손이 존귀하고 현달하여 영도첨의(領都僉議) 보(溥)에 이르러 그 세대가 더욱 커졌는데, 공에게 11세(世)가 된다.

     

    공의 이름은 대항(大恒)이고 자는 응정(應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영의정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에 추증된 상(常)이다. 효도로써 특히 소문이 나서 지금까지 5세 100년 동안 훈도(薰陶)가 마을에 남아 있고, 집에는 효자 정문(旌門)이 있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익중(益中)으로, 대대로 독실한 생활을 하여 수직(壽職)으로 귀하게 되었다.

     

    만력 38년(1610, 광해군 2) 경술 10월 19일에 태어나 순효대왕(純孝大王 : 인조) 8년(1630) 정화옹주(貞和翁主 : 선조의 딸)에게 장가들어 예(例)대로 동창위(東昌尉)로 봉작되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한 공로로 자의대부(資義大夫)로 승진하였다. 두 번 금병(禁兵)을 맡아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성품이 충실하고 소박하며 성실하고 신중하였으며, 검소함을 좋아하고 평소에 선행을 하였으며, 남과 더불어 서는 겸약(謙約)하고, 공손하여 존귀한 듯이 처신하지 않았다. 부모가 연로하게 되니 공도 이미 쇠약해졌으나 성실히 봉양(奉養)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번 명절과 생신에는 친척과 손님이 모여 장수를 빌며 술잔을 올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기쁨을 드렸다.

     

    현종 7년 병오 정월 4일에 공이 별세하니 향년 57세이다. 임금께서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다음 달 양주 어등관암(於登寬岩)의 언덕에 묻으니, 외조·증조의 분묘가 이곳에 있다.

    옹주는 소경대왕의 딸로 온빈 한씨(溫嬪韓氏) 소생이다. 한씨는 중고(中古)에 임금의 총애를 받은 재상인 계순(繼純)의 6세손이다. 옹주는 소경대왕이 승하하기 4년 전인 갑진년(선조 37년) 2월 22일에 태어나 다음 갑진년 4년 후인 정미년(현종 8) 9월 24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였다. 다음해 3월 같은 언덕에 합폄하였다.

     

    자식이 없어 형의 아들 덕휘(德徽)를 후사로 삼았는데 지금 한산 군수(韓山郡守)가 되었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처경(處經)이다. 또한 측실에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덕찬(德纘)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온화하고 검약하며 행실은 바르고 매우 자애로왔도다. 귀하면서도 낮추고 부유하면서도 빈한하게 지내니 선행을 쌓는 집안에는 대대로 인재가 있으리라. 숭정(崇禎) 무진 후 45년(영조 8) 임자 7월 일에 세우다.

     

     

    새 신도비
    새 신도비에서 바라본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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