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우즈벡 출신 장군 온달이 죽은 곳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12. 21. 20:14

     

    <삼국사기> '온달전'에 나오는 바보 온달이 우즈베키스탄 아버지와 고구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라는 사실은 앞서 자세히 언급했다. (☞ '구국의 영웅이 된 다문화가정 출신 온달과 아차산성') 그리고 그가 성장해 선비족이 세운 나라 북주(北周)의 침입에 맞서 고구려를 지켜낸 이야기도 언급한 바 있다. (☞ '북주를 격퇴한 우즈베키스탄 혼혈아 온달')

     

    오늘은 그가 이와 같은 공로로 고구려 귀족의 성(姓)인 고(高)씨 성과 승(勝)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후 고토(故土)수복을 목표로 남진해 신라와 싸운 일 및 그의 남진 루트, 그리고 신라 북한산성(지금의 아차산성)에서 화살을 맞고 안타깝게 전사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볼까 한다.  

     

     

    온달이 주둔했을 구리시 아차산 시루봉 보루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겐트 / 타슈겐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른 결과이다.
    타슈겐트의 모스크
    타슈켄트 하즈라트 이맘 광장 / 타슈켄트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먼저 온달 아버지의 출신국을 다시 짚어보자면 그는 중앙아시아에 있던 강국(康國)이나 석국(石國) 사람이었을 것이다. 당시 활발한 대외 교역을 벌였던 소그디아(SOGDIA)라는 나라에 대한 중국 사서의 표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인 <전당문(全唐文)> 권999 '강국왕 오륵가전(康國王烏勒伽傳)'이나 <북사(北史)> 권 97 '강국전(康國傳)', <구당서> 권 198 '위서 관씨지'에 실려 있는 소그디아는 강국(康國), 혹은 석국(石國)으로 표기된다. 

     

     

    당대 화폐 속의 석국 사람
    타슈켄트 교외에 거의 흔적만 남아 있는 옛 석국의 유허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명예교수는 구체적으로 온달이 '강국인과 고구려인의 혼혈아'라고 주장한 바 있다. 2012년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한·중앙아시아 국제학술회의에서 '혼혈아 온달설'을 처음 편 지배선 교수는 "온달은 당시 강국(康國)이라 불리던 소그디아의 왕족 출신이 고구려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라는 주장과 함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백제의 사서, 중국 사서에서 온(溫) 씨는 오로지 소그디아 강국(康國)에만 존재하며, 그것이 왕족 성씨"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삼국유사> '진덕왕본기(眞德王本紀) 2년 기사'에 나오는 "김춘추를 호위하며 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갓과 옷차림'으로 위장, 고구려 병사의 칼을 대신 맞고 죽은 온군해(溫君解) 역시 소그디아 출신이다"라는 주장을 폈는데, 그에 대한 증거자료로써 <신당서(新唐書)> 권 221 '강전(康傳)'에 나오는 "남자 20세가 되면 이익을 도모할 수만 있으면 안 가는 나라가 없었다"고 쓰인 소그디아 장사꾼에 대한 기록과, 경주 원성왕릉에 서 있는 서역인 상을 들었다.

     

     

    소그디아의 전통의 포체테(산낭)라 불리는 작은 뒷주머니를 차고 있는 원성왕릉 서역인 상 / 오른쪽 아래는 당나라 시대 제작된 등짐을 맨 소그디아 상인 피규어 (미국 필라델피아 박물관)
    1965년 발굴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 차가니안과 시 왕국의 사절이 강나라 바르후만 왕(649~651년)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고구려 사신의 모습도 그려졌다. (오른쪽 두 사람)
    전체 모습 / 우즈베키스탄의 알리세프 박사(역사학)는 "고대 무역사에 따르면 소그디아인의 활동 영역이 한반도까지 미쳤을 것"이라며 "소그디아인이 고구려에서 결혼해 온달을 낳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소그디아의 위치
    원성왕릉의 또 다른 서역인상
    그의 허리춤에도 산낭이 달려 있다. /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대 복식 연구자가 무인상의 허리의 산낭이 소그디아 전통의 포체테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 교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온달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워 웃음거리가 됐다'(容貌龍鍾可笑)거나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다녔다'는 기록은 "신분 질서가 엄한 고구려에서 오늘날 다문화 가정 출신 자녀가 겪은 것과 같은 어려움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온달의 용력이다.

     

    현장법사(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는 강국에 대해 "이곳 왕들은 호탕하고 용맹하다. 대부분 용사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투할 때 그들 앞에 맞설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더불어 주목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 현종 시절 '안사의 난'(755~763년)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이다. 록산은 소그드어로 '밝음'이라는 뜻의 '로흐샨'을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그 역시 강국(康國) 핏줄이었던 까닭에 강록산(康祿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안록산의 출신지는 당나라 영주(營州) 유성현이지만 아버지는 소그드인이며 어머니는 돌궐인이었다. 그는 이러한 코카서스계 혼혈아의 특질로 힘이 장사였다고 하는 바, 그 무용(武勇)을 바탕으로써 당나라 전체 군세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평로·범양·하동 세 곳의 절도사 자리를 겸하고 결국은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751년 수도 장안성을 점령하고 대연(大燕) 황제에 오르니, 오호십육국시대의 후조(後趙, 319~351) 황제 석륵(石勒)과 더불어 코카서스계 백인이 중국 황제에 오른 유이(唯二)한 인물이 됐다.

     

     

    수도 장안성을 함락시키는 안록산 / '떠돌이 음유시인의 블로그'에서 빌려온 이미지
    당시의 당나라 기병 / 당삼채 토용
    내가 생각하는 안록산의 이미지 / 실제 당나라 색목인(色目人) 용병을 그린 당대의 그림이다.

     

    온달은 그와 같은 용력을 국가를 위해 썼다. 그리하여 북주(北周)가 쳐들어 왔을 때는 배산벌 전투에서 북주의 대군을 물리친다. 온달의 승전이 기록된 아래 <삼국사기> 기록의 후주(後周)는 북주를 말하는 것으로, 3대 황제인 무제(武帝)는 오랜 기간 양강(兩强)으로 존립하던 북제(北齊)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 뒤(577년) 다음에는 천하 통일을 노려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한 후 병사했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치자 왕(평원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벌에서 맞서 싸웠다. 온달이 그 선봉을 맡아 힘을 다해 싸우니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이에 그 여세를 몰아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이기니 전공을 논함에 있어 온달을 첫 번째로 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길 "이자는 나의 사위다"하며 예로써 온달을 맞이하니 대형(大兄)의 작위를 주었다. 이로부터 온달은 왕의 총애를 받으니 위엄과 권세가 날로 더해졌다.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一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寵榮尤渥 威權日盛

     

     

    남북조 시대 말기 지도(560년)
    주무제 우문용(543~579)
    배산벌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하북성 보정시 배산촌

     

    이와 같은 큰 공을 세운 온달을 당시의 왕인 평원왕이 치하하지 않았을 리 만무할 터, 위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비로소 자신의 사위로 받아들인 후 대형(大兄)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기록에는 없으나 아마도 이때 고구려 귀족의 성씨인 고(高)씨 성과 승(勝)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이니, 이에 감읍한 온달은 훗날 다시 한 번 조국 고구려를 위해 봉사할 의지를 피력한다. 평원왕의 다음 왕인 영양왕(嬰陽王)에게 표를 올려 신라에게 빼앗긴 고토(故土) 수복을 위해 출정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삼국사기/온달전>) 

     

    이때 그가 한 말이 "계립현(鷄立峴)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이후 남하한 온달은 603년 신라 북한산성(지금의 광진구 아차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의 침공 소식을 접한 진평왕이 직접 1만군사를 이끌고 북한산성(현재의 아차산성)에 와 고구려군을 격퇴시켰다고 돼 있는 바, 이상은 고구려와 신라의 전투가 기록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알려진 대로 온달은 아차산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던즉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나오는 고승을 온달로 여겨도 무리가 없다. 고승은 당시 사령관으로서 제5관등인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이상의 직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성은 당시 신라가 한강 이북을 방어하는 요새로서 시굴 조사에서 통해 '북(北)', '한(漢)', '한산(漢山)' 등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 등이 출토된 바 있다. 다음 회에는 고승 장군의 아차산성 전투와 남진 루트를 추적해보기로 하겠다. 

     

     

    온달이 강 건너를 바라 보았을 아차산 시루봉 보루
    시루봉 보루에서 보이는 한강
    온달이 전사한 아차산성 / 성벽 하단부만 남아 있다.
    아차산성의 모양새와 출토유물 장소
    출토유물 / 고구려의 토기와 기와, 신라 시대의 토기(단각고배 등), 기와, 금속기 등이 발견되었다. 출토유물로써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후대에 신라에게 빼앗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온달이 말한 계립현과 죽령의 위치
    벽화 속 고구려 중기병 모습
    벽화 속 말 탄 고구려인의 모습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