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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꺽정은 정말로 오간수문으로 탈출했을까?
    한양 성문 이야기 2021. 12. 19. 01:52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썰은 어느덧 그 옆에 위치한 오간수문(五間水門)으로 이어진다. 명종 시대(1545~1567년)의 명화적(明火賊) 임꺽정(林巨正)이 전옥서(典獄署) 옥문을 부수고 일당을 구출한 후 이 오간수문을 통해 탈출했다는 것이다. 이상은 오간수문을 말할 때 매양 붙어 다니는 스토리다. 그런데 그 얘기는 정말일까? 궁금해서 한번 찾아보았다. 우선 임꺽정의 스토리가 등장하는 <명종실록>을 보자. 

     

     

    종각 영풍문고 앞의 전옥서 터 표석
    오간수문을 상상해볼 수 있는 동대문 옆 이간수문
    청계천 변에 어설프게 재현된 오간수문
    임꺽정의 근거지로 전해지는 양주 불곡산

     

    포도대장 김순고가 아뢰기를, "풍문으로 들으니 황해도의 흉악한 도적 임꺽정의 일당인 서임이란 자가 이름을 엄가이로 바꾸고 숭례문 밖에 와서 산다고 하므로 가만히 엿보다가 잡아서 범한 짓에 대하여 추문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지난 9월 5일에 우리가 장수원(長水院)에 모여서 궁시(弓矢)와 부근(斧斤)을 가지고 밤을 틈타 성안에 들어가 전옥서의 옥문을 부수고 우리 두목 임꺽정의 처를 꺼내가려고 하였다. 

     

    그 처를 꺼낸 다음 오간 수구(五間水口)를 부수고 나와야 하는데,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이 비록 알더라도 모두 잔약한 군졸들이라 화살 하나면 겁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중에 곤란하게 여기는 자가 두 사람이 있어 그들을 다 죽였다. 후에 우리 두목의 처가 형조의 전복(典僕)에 소속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중지하였다.(<명종실록 26권)>

     

    황해도 도적 임꺽정은 명종 14년(1559년)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다. 기존 도적의 유형인 밤도둑이 아니라 백주대낮에도 약탈과 살인을 일삼음은 물론 관아를 습격하고, 체포에 나선 개성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을 역으로 공격해 살해하기도 한 간 큰 도적으로서 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선전관 정수익을 대장으로 하는 500명의 토벌대를 보내지만 황해도 평산에서 임꺽정의 유격전술에 대패하고 만다. 이후 더욱 세력을 불린 임꺽정은 평안도 성천과 맹덕 · 강원도 철원 · 경기도 양주까지 세력을 뻗치고 1560년에는 이윽고 한양까지 나와바리를 넓힌다.

     

    그러자 명종은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러 이름 높은 전라도병마절도사 남치근을 한성판윤(서울시장)으로 임명해 한양 수호와 임꺽정 토벌을 명하고, 그해 음력 8월 임꺽정의 아내가 장통방(서울 종각 일원)에서 붙잡힌다. 이어 9월에는 임꺽정의 참모인 서임(=서림)이 남대문 밖 동네에서 체포되는데, 그를 추국한 결과가 위 <명종실록>의 내용이다. 지난 9월 5일에 장수원(의정부시 호원동)에서 무리가 회합한 후 한양으로 잠입하여 전옥서의 옥문을 부수고 임꺽정의 처를 구출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그녀를 죽이지 않고 형조의 노비로 삼는다는 말을 듣고 계획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다시피 임꺽정은 전옥서에 잠입한 적이 없고 오간수문으로 탈출한 일도 없다.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그는 의적(義賊)이지도 않았으니 오히려 양민의 재물을 탈취하고 인명을 해친 잔혹무도한 도적에 나서지 않는 자였다. 다만 그는 민가뿐 아니라 대갓집과 관가도 털었던 바, 그 자체로도 민중의 우상이 될 수 있었다.

     

    당시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여왕으로 군림하던 시절로 그 척족들이 끼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는 윤원형이나 윤임 같은 자들로서,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관(官)이 도적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큰 희열이요 대리만족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이유도 문정왕후의 척족에게 화전으로 붙여먹던 땅을 빼앗긴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훗날 일제시대 때 벽초 홍명희가 그 사실에 초점을 맞춘 대하소설 <임꺽정>을 연재해 조선일보의 판매부수를 치솟게 했는데,(월북 작가인 탓에 <임꺽정> 10권짜리 전작은 2005년에 들어서야 출간됐다) 개인적으로는 <왕십리>의 작가 조해일이 쓴 임꺽정에 대해 쓴 두 편의 단편, 즉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소문으로 들은 임꺽정이 관아를 습격해 사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및 황해도 구월산에서 토벌대에 포위된 임꺽정이 토포사 남치근과 벌이는 설전(舌戰)과, 토벌대의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는 이야기에 피가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다.  

     

    ~  사실은 조금 다르니, 실제로 임꺽정은 구월산에서 탈출하여 도망가나 결국 남치근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에 1562년 1월, 황해북도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보름 후 처형되었다.

     

    철원 고석정 / 관군에게 쫓긴 임꺽정이 이곳 바위에서 뛰어내려 꺽지라는 물고기가 되어 도망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를 바란 민중들의 염원이 담겼다.
    고석정의 겨울
    충북 괴산읍 제월1리 제월대에 세워진 홍명희 문학비의 내용 / 다른 월북 인사와 달리 홍명희는 숙청 당하지 않고 부수상까지 오르며 천수를 누렸다.

     

    겸제 정선(1676-1759년)이 그린 아래의 <동문조도(東門祖道)>는 동대문 밖에서 전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사람들의 모습은 드러나 있지 않으나 조도(祖道)가 '전별하는 의식'을 뜻하는 단어라 하니 그렇게 이해하는 것인데, 아마도 당시에는 동묘(東廟)에서 전별 모임이 이루어진 듯 그림 중앙에 동관왕묘(동쪽에 있는 관우 사당)가 부각됐다. 그 오른쪽은 낙산이고 아래로는 청계천이 흐르는데, 지금은 사라진 연못 동지(東池)가 생각보다 크게 자리하고 있으며 바로 밑으로 철창 촘촘한 오간수문이 보인다.(화살표)

     

     

    정선의 동문조도 / 1746년경의 동대문 지형이다.
    동대문, 동묘, 오간수문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옛 지도
    동관왕묘(동묘) 전경

     

    오간수문은 앞서 '동대문이 흥인지문이 된 때는?'에서 인용한 <태조실록> 9권의 내용 대로 1396년 동대문이 건립될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510년 동안 굳건했으나 1907년 나라가 기울어질 때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당시 중추원 참의였던 유맹 토목국장이 청계천이 원활히 흐르도록 다섯 개의 수문을 모두 헐어버렸던 것이다. 이후 그 자리에 일제가 콘크리트로 된 근대식 다리를 건설했는데,(오간수교) 1921년 6월 동대문에서 광희문까지의 전차 노선이 신설되면서 전차가 달릴 수 있는 철교가 놓여졌다가 1960년대 청계천이 복개되며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문지 등과 함께 사라졌다.

     

     

    전차가 달릴 때의 오간수교
    오간수교 아래 청계천 유적 안내문

     

    개인적으로는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복개된 청계천 위의 고가와 아스팔트 덮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시킬 때 왜 오간수문은 내버려두었나, 심히 유감스럽다. 2003년 청계천 복원 공사 당시 오간수문의 기초 유구들이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까닭에 당시 문화계와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오간수문을 복구하라는 청원이 있었지만 끝내 무산되었고, 발굴 당시 수거된 부재들만 중랑하수처리장 공터에 방치돼 있다. 

     

    오간수문은 1907년 철거될 때의 사진 등이 남아 있으며, 청계천을 복원 공사 당시 수습된 기초 유구들은 광통교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량이 옛 모습 그대로 발굴되어 의지만 있었다면 복원이 가능했다. 만일 그랬다면 서울시의 또 하나의 명물이 되었을 것이며 한양도성 유네스코 등재에도 도움이 되었을 터, 두고 두고 아쉬움 마음 금할 길 없다.  

     

    당연히 청계천 하천물을 가로 질러 세워졌을 오간수문은 지금 천변 벽에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재현돼 있는데, 그것도 수문을 가로막은 토사가 준설되지 않아 위쪽 반원형만 남은 사진대로 재현시켜놓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것이 토사가 가로막힌 모습임을 몰랐던 것일까?) 그래서 옛 오간수문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자리에서 발굴된 이간수문처럼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 마치 개구멍 같은 흉한 모습이다.

     

    그래 놓고도 그 옆에는 1760년 영조대왕이 오간수문에 행차하여 준설을 독려하는 모습을 그린 《어전준천제명첩》과 이를 상찬한 준설가(浚渫歌)라는 시(詩)를 장식으로 새겼다. 그나마 그 장식이 다리 바로 밑에 새겨진지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근방의 세워져 있는 위 안내문에 따르면 오간수문지는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함께 사적 제46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위 안내문이 세워진 곳이 필시 오간수문지였으리라 여겨진다. 

     

     

    어전준천제명첩 / 영조의 청계천 준설 공사는 연인원 21만5300명이 동원된 조선 최대 토목공사였다.
    오간수문 미니어처 / 청계천박물관
    오간수문지 출토 유물
    누가 흘리고 깄을까?
    1907년 철거되기 직전의 모습 / 준설되지 못한 토사가 상부까지 쌓여 있다. 아치 옆의 돌다리는 통행을 위해 후대에 교각 위로 돌을 가로 질러 만든 것이다.
    그걸 요따구로 재현시켜 놨다. 헐~
    보다 중요한 건 정작 이 자리에는 오간수문이 없었다는 사실이니
    오간수문은 지금 왜가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 사진은 강화부성 석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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