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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구문(광희문)에 대한 기억
    한양 성문 이야기 2021. 12. 26. 06:44

     

    어릴 적 퇴계로 입구에 있는 광희문(光熙門) 근방에서 살았다. 그때는 문은 있었지만 문루는 없었고, 까닭에 문의 명칭이 광희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랬으니 당시는 너나없이 시구문이라 불렀다. 동네 어느 유식쟁이의 설명을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4대문으로 시신이 드나들 수 없었고 오직 이 문을 통해 도성 안의 시신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시구문(屍口門?)이라 부른다는 것이었다.

     

    시구문 부근 동네의 이름이 신당동(新堂洞)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죽은 자에 대해 염을 하거나 굿을 하는 신당(神堂=무당집)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다는 것인데, (※ 갑오개혁 때 新堂洞으로 바뀌었다) 도성을 나온 시신들은 성밖 황학리 공동묘지와 무수막(무쇠막=금호동) 산비탈에 묻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유식쟁이도 문의 정식 명칭이 광희문이라는 것은 몰랐던 듯, 그에게서 광희문이라는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다. 

     

     

    지금의 광희문
    광희문의 안쪽
    서울역사박물관의 1971년 시구문 사진 / 내가 살던 시절에는 내내 이 모습이었다.
    1955년 임응식 작가가 찍은 시구문 /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다.

     

    반면 한국관광공사의 자료에 의거한 <다음백과>의 설명은 생소하니 거기 실린 광희문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보다시피 <다음백과>의 설명은 의외로 어렵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은 도저히 알아듣기 힘들다.

     

    그래서 다른 것(<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을 찾아보니 '광희문은 수구문이라고 불렸다'며 역시 수구(水口)와 수구문이 강조된다. 그래서 '아마도 동대문 옆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가까우므로 수구문으로도 불렸나 보다' 하고 혼자 생각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곳은 내내 시구문이었을 뿐 수구문으로 불린 적은 없다. 그 문으로 물이 흐른 적은 더더욱 없다. (수구문이란 아마도 시구문 변해서 형성된 명칭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2004년 DDP 공사 때 발견된 이간수문
    광희문과 이간수문의 위치

     

    그 문으로 시신이 나간 것은 맞다. 내가 그것을 본 적은 없지만,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서울시가 전투(일명 남대문 전투)에서 죽은 대한제국 군인들의 시신이 가까운 남대문이나 서소문(소의문)으로 나가지 않고 멀리 광희문 밖에까지 와 버려진 것을 보면 대한제국 시절까지도 관습이 지켜진 듯하다. 하지만 서소문 역시 주검 이 (아래 사진) 남대문 전투에 대해서는 앞서 '대한제국 최후의 날(II) - 남대문 전투'에서 포스팅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앞서 말한 유식쟁이의 설명과 달리 광희문 뿐 아니라 소의문도 사신의 운구에 이용됐다. 그럼에도 대한제국 군인들의 시신이 멀리 광희문 밖에 버려진 이유는 남대문 전투에서 패퇴한 군사들이 소의문을 통해 퇴각한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소령)이 권총으로 자신을 머리를 쏴 자살했다. "나 박승환은 국은을 입은 지 몇 해나 되었으나 나라가 망해도 왜놈 하나 참하지 못했으니 만번을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다. 그런 내가 너희들에게 해산하라는 말을 어찌 전하랴. 차라리 죽음으로써 사죄하리라. 대한제국 만세!" 이것이 그가 남긴 유서였다. 


    박승환의 자살 소식과 함께 유서도 공개되었다. 그러자 제1대대 박승환 휘하의 군인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일제가 1차 해산 대상으로 삼은 인원은 3,441명이었으나 일기 탓으로 모인 인원은 200여 명에 불과했는데, 그중 제1연대 제1대대 소속 100여 명이 해산에 불응하고 서소문 시위대 영내로 들어가 일제가 봉인한 무기고를 뜯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군 51연대와 교전을 벌였다. 중대장 남상덕 참위가 지휘하는 대한제국군은 제2연대 제1대대가 합세하며 한때 우세한 전력 속에 대치했으나 일본군 기관총 부대가 증파되며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날 대한제국 시위대는 호치키스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 3개 대대와 맞서 시가전을 벌였고, 특히 숭례문 위에 진을 친 일본군과의 전투가 치열히 전개되며 일대는 피바다를 이루었다.(이날의 전투가 남대문 전투라 불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대한제국군은 급격히 개전(開戰)하는 바람에 탄약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던 바, 총알이 바닥나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백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정오 무렵에 이르러 장교 13명을 비롯한 68명 사망, 100여 명 부상이라는 참패에 가까운 결과를 내고 서소문 밖으로 물러나게 되었다.(포로는 516명이었다)

     

     

    대한상공회의소 인근의 서울시가 전투지 표지판
    중앙일보 사옥 인근의 대한제국 시위대 병영터 표석
    1907년 9월 7일자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린 광희문 밖에 버려진 대한제국 군인의 시신
    위 신문에 실린, 시신을 찾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 / 일뤼스트라시옹은 이때 100여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광희문에 얽힌 그 밖의 사건을 보면, 반란을 일으켜 인조를 쫓아낸 이괄이 안현전투에서 패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갈 때 빠져나간 문이 광희문이었고,(☞ '이괄의 난'의 성패를 가른 안현 전투')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망갈 때 빠져나간 문 역시 광희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괄의 난이 부른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이니 이괄은 나름 복수를 한 셈이랄까....?(☞ '삼전도비에 관한 불편한 진실'

     

    숙종 때의 희빈 장씨(장희빈)의 시신이 나간 곳도 이곳이었다. 한때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세자(훗날의 경종)의 어머니였음에도 시신의 운구에 4대문이 허락되지 않아 평민처럼 시구문을 빠져나와야 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광희문은 시구문의 별명이 훨씬 더 어울리는 곳이기는 하나 정작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광희문이 시구문(屍軀門, 屍口門, 尸口門)으로 불렸다는 기록은 없고, 유사한 근거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이 문의 정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광희문이었던 것이다. 

     

     

    광희문의 옛 사진 / 1711년(숙종 37) 3월 개축되며 숙종의 재가 하에 남한산성 문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nbsp;위와 같은 시기의 사진 / 광희문이라는 현판은 1719년(숙종 45)에 이르러 비로소 걸렸다.
    이사벨 비숍이 찍은 1890년대 광희문과 성벽
    헤르만 산더가 찍은 1907년의 광희문
    1907년 광희문 밖 / 공동묘지 무덤가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다.
    1901년 일제가 발행한 엽서 속의 광희문 안팎
    광희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이렇게 된다.
    1975년 정비 공사 때의 광희문 / 이때 퇴계로 확장을 위해 남쪽으로 15m 옮겨지고 문루가 중건됐다
    1975년 복원공사 준공식 사진

    ▼광희문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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