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례문 현판 이야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2. 7. 01:33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쓴 이유에 대해서는 앞서 '백악주산론과 남대문'에서 설명했다. 숭례문의 이름을 지은 자는 백악주산론의 주창자 삼봉 정도전인데, 그는 자신이 백악주산론을 주장함으로써 경복궁과 숭례문이 화산(火山)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던 바, 방화(防火)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던 듯하다. 그래서 현판을 종서(縱書)하는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된 것이다.
~ 하지만 그 가상한 노력이 무상하게 숭례문은 2008년 2월 11일 새벽, 70살 먹은 어떤 또라이의 방화에 의해 전소됐다. 그놈은 징역 10년을 먹었는데 복역 중 죽지도 않고 2018년 만기 출소했다.
그렇다면 1396년(태조 5) 창건된 숭례문 현판 글씨를 최초로 쓴 사람은 정도전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종의 기원(II)ㅡ신촌 봉원사 종과 덕산 사건'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촌 봉원사 명부전에 걸린 편액은 그의 글씨이다. 이성계는 사랑하는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원찰(願刹) 흥천사 명부전의 현판을 정도전에게 쓰게 했는데, 흥천사가 이방원에 의해 훼철되며 이후 그 현판이 봉원사에 걸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숭례문 현판 글씨 역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맏형이 되는 양녕대군 이제(1394∼1462)가 썼다고 말하고 있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경회루(慶會樓)의 현판을 쓴 인물이니 만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태종 이방원의 성격으로 보자면 숭례문에 걸린 정도전의 글씨를 그냥 두고 볼 위인이 아닌 바, 필력이 높던 양녕대군에게 다시 쓰게 하였을 개연성이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의 경회루 현판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신헌의 글씨임)
고종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도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내내 '숭례문 편액 글씨는 양녕대군의 솜씨'로 인식했던 듯 보인다.
하지만 이설(異說)도 만만치 않으니, 글씨라면 한가락한다는 추사 김정희는 암헌(巖軒) 신장(1382∼1433, 신숙주의 부친)이 썼다고 확신했고, 조선후기 학자 정동유와 이유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명필인 죽당(竹堂) 유진동(1497~1561)이 썼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분분한 설을 정리한 건 2019년 붙잡힌 중년의 장물아비였다. 그자는 2008년에 담양 몽한각에서 도난당한 물품들을 되팔려다 붙잡혔는데 그중에 숭례문 현판과 같은 글씨의 목각판이 있었다. '崇' '禮' '門' 3자가 새겨진 이 목판은 양녕대군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는 서울 지덕사(至德祠, 양녕대군의 사당) 소장본을 모본으로 하여 그 후손들이 다시 판각한 것으로 알려진 물건이었다. (그 사실이 함께 회수된 양녕대군의 초서 목각판 '후적벽부' 부기에도 명시돼 있다)
서울 지덕사는 양녕대군의 무덤 곁에 지어진 사당으로, 몽한각 목각판의 모본으로 찍은 것으로 짐작되는 탁본이 전한다. 이 모본은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李承輔, 1814~1881)가 1865년(고종 2) 경복궁 복원을 위한 영건도감의 제조(총책임자)로 있을 때 확보한 목판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것이 사라졌지만, 앞서 말한 이유원이 1871년 탈고한 백과사전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이승보가 숭례문 개색(改色) 건으로 현판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몽한각 목각판은 1887년(고종 24) 지덕사의 것은 모본으로 복각했다고 전하는 바, 이상을 보자면 숭례문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의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지덕사 양녕대군 글씨 탁본 등은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 당시 땅에 떨어져 부숴진 숭례문 현판을 재현하는 데도 일익을 하였다. (그 사실이 숭례문 앞 안내문에 간단히 설명돼 있다) 당시 현판 글씨는 손상을 입지 않았으나, 목각판과 비교해 볼 때 '崇'자와 '禮'자에서 개별 획 삐침의 형태, 폭, 연결 등에서 일부 달라진 부분이 확인돼 이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그간 세월의 흐름에 따른 노후와와 6.25전쟁의 상흔으로 짐작되는 부분인데, 아무튼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숭례문과 현판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시킨 지평리 전투 (0) 2022.02.12 '화포'(II)ㅡ 화기도감과 나선정벌 (0) 2022.02.08 '화포'(I)ㅡ이순신 장군 전승 신화의 비결 (0) 2022.02.01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I)-윤택영의 재실 (0) 2022.01.31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 -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 (2) 2022.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