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종의 기원(IV)-근정전 향로를 만든 종은 어느 절 것이었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3. 20. 05:56

     

    고종 2년(1865) 4월 흥선대원군은 근정전을 비롯한 경복궁 전각의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안동김문 60년 세도 밑에서 찌그러져 있던 이씨왕조의 권위 회복을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270년간 폐허로 남겨진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되살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에 전대미문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된 것이니 마찬가지로 전대미문의 권력을 틀어쥔 흥선대원군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근정전과 같은 전각은 20세기 말엽에나 복원됐을까?)

     

    문제는 돈이었다. 흥선대원군은 피폐해진 국가 재정으로 인해 공사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원납전(願納錢)을 거두었다. 문자 그대로라면 원하는 사람만 내는 자발적인 돈이었으니 실제로는 세금처럼 강제로 거두어들였던 바, 원망하며 내는 원납전(怨納錢)이 되었고, 상평통보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상승시킨 당백전(當百錢)은 심각한 물가 앙등과 인플레를 불러왔다.

     

    아울러 복원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역도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또한 그러면서 건축자재로써 사라진 것들도 부지기수였으니 경희궁 전각 등이 훼철되었다.  

     

     

    겸재 정선의 《경복궁》 / 18세기 폐허로 남은 경복궁을 그렸다. 그가 살던 옥인동에서 바라본 광경으로 왼쪽으로 경회루 연못과 기둥들, 앞쪽으로 육축부만 남은 영추문이 보인다. 가운데 ㄱ자 집은 경복궁 터를 관리하던 궁감(宮監) 건물로 여겨진다.
    영추문
    경복고등학교 안에 있는 겸제 집터 표석
    겸재의 집 인곡정사(仁谷精舍)가 있던 옥인동 군인아파트 / 겸제는 52세 때 옥인동으로 이사 와 인곡정사를 짓고 84세까지 산다.
    당백전 (실물 크기)

     

    그러는 가운데 1866년 2월 8일 경복궁 공사현장으로 동종 하나가 달구지에 실려 들어와 깨부숴졌다. 광화문 서쪽에 방치돼 있던 동종으로 길이 9자 2치(276cm), 지름 6자 5치(195cm) 두께 9치 7푼(29cm)의 대종이었다. 부서진 종은 근정전 사방 모서리의 향로와 토수(吐首:  빗물로부터 처마 서까래를 보호하기 위해 씌우는 동물머리 조각품)와 당백전 제조 등에 쓰였는데, 경회루 연못에 잠겨 있던 청동 용 두 마리도 필시 이때 녹여진 종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당시의 근정전 향로 / 지금은 사라진 용 머리 향로 뚜껑이 보인다.
    1997년 경회루 연못에서 발견된 청동 용 조각/ 大淸同 治四年 乙丑 壬午 壬戌爲始 九月初十日 壬申'이라고 각자돼 있는 바, 경복궁 중건 때인 1867년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경회루 연못

     

    이상은 경복궁 건축기록인 <경복궁영건일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거기에는 이보다 5개월 전 운종가 포목전 사람 600명이 동대문에서 가져온 또 하나의 종이 나온다. 높이 8자 6치(258cm) 지름 5자 5치(160cm) 두께 9치 5푼(28.5cm)의 대종으로, 세조 때 흥천사에서 주조된 종이었다.(☞ '종의 기원 IIIㅡ기구한 운명의 흥천사 종')

     

    다행히도 이 종은 살아 남아 동대문(흥인지문)을 거쳐 광화문 누각에 걸렸다. 이후 종은 덕수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1468년)에 만들어진 또 다른 흥천사 종은 흥천사가 폐사된 후 원각사에 걸렸는데, 원각사가 폐사된 이후로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보신각 종을 대신하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야외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일제시대 광화문에 걸렸던 흥천사 종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신각 종 / 높이 318㎝, 입지름 228㎝로 현존하는 종 가운데 성덕대왕신종 다음으로 크다
    원래 보신각 종이 있던곳 / 지금은 성덕대왕신종을 모사한 종이 걸려 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 / 1467년(세조 13년) 경천사탑을 모방해 지어졌다.

     

    이쯤 되면 경복궁 중건 때 파괴된 동종은 어느 시대 어느 절에 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종은 남아 있는 사진도 없고 기록 또한 없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종에 신숙주가 쓴 명문(銘文)이 있었다는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뿐이다. 종이 세종~세조 연간에 제작되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세종실록>에 그것을 좁힐 수 있는 문장이 실려 있다. '흥천사의 종을 옮겨다가 남대문에 달게 하였다'는 것이다. (<세종실록 > 28권, 세종 7년 기사)

     

    즉 세조 때 만들어진 위의 흥천사 2개의 종(광화문 종과 보신각 종) 외에 세종 때 만들어진 또 하나의 종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 종이 남대문에 걸리게 되었으므로 세조 때 다시 하나를 주조했다는 말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 종은 명종 때 위기를 맞이하니 왕이 '흥인문·숭례문 안에 둔 두 개의 큰 종을 내수사에 주라'고 전교한 것이다. 즉 당시는 국초에 반짝했던 불교가 크게 쇠퇴한 후였던 바, 내수사로 하여금 종을 녹여 총통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조달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원(政院, 비서실)에 전교하기를,

    "흥인문·숭례문 안에 둔 두 개의 큰 종을 내수사에 주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방치해 둔 물건을 하루아침에 까닭없이 내수사에 주라고 명하시니 보고 듣는 자가 해괴하게 여길 것 같아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쓸모없어 버려 둔 것을 내수사에 보내서 사용하게 하는 것도 무방한 것이고 자전(慈殿,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분부도 계시고 해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 개인 생각이란 뜻) 두 개의 종은 원각사와 정릉사에 있었던 유물이다. 유사가 일찍이 그것을 깨뜨려서 총통을 만들게 하자고 청했을 때에는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내수사에 주라고 명하니 장차 무엇에 쓰겠단 말인가. 그것이 결국 절간의 물건이 되리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 여러 사람들이 보는 것을 엄폐할 수 없는 것과 같은데, 또 자전의 분부라고 핑계하니, 아, 그것이 옳지 않은 줄 안다면 자전의 분부라고 해서 반드시 따라야 하겠는가? (<명종실록 > 29권, 명종 18년 기사)

     

    이렇게 이때도 위기를 넘긴 국초(國初)의 동종이건만, 선말(鮮末)인 고종조에 이르러서 명(命)을 다하게 되었다. 차근히 살펴보면, 이 종은 세종 때 만들어져 흥천사에 있다가 왕의 명령으로 남대문으로 옮겨졌는데, 이후 명종 때 용해돼 총통의 재료로 쓰일 뻔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어찌어찌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결국 흥선대원군의 퍼런 서슬에 파괴되고 만 것이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