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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오군란과 진령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5. 22. 01:18

     

    임오군란을 일으킨 훈련도감의 사졸(士卒)들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쉽게 제압했다. 그리고 선혜청 습격에 이어 궁궐까지 쳐들어오니 주적(主敵) 1호로 지목된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가장 먼저 끌려와 흥선대원군이 좌정한 창덕궁 중희당 계단 아래서 주살되고, 주적 3호였던 전 선혜청 당상 김보현도 역시 이곳으로 끌려와 목숨을 잃었다. 주적 2호였던 영돈녕부사 이최응은 그들에 앞서 저 세상으로 갔다.

     

     

    남대문시장 입구 선혜청 터 표석 /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밀린 훈련도감 등의 구식군대는 오랫동안 급료가 체불되었고 뒤늦게 지급 받은 양곡마저 불량미에 모래 등이 섞여있던 바, 1882년 7월 주무 관청인 선혜청을 습격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민왕후의 척족(戚族)과 수족이던 자들을 제거하고 나니 다음 목표는 자연히 민왕후가 되었다. 이에 궁 안은 중궁을 잡으라는 소리로 시끄러웠으며 실제로도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무예별감 홍계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민왕후는 일단 북촌 윤태준의 집(지금의 정독도서관 부근)에 숨었으나 불안한 마음에 충청도 음성 민응식의 집으로 토꼈다가 다시 충주 노은면 이시영의 초가로 옮겨 은거했다.

     

     

    중희당의 부속 건물들 / 창덕궁 중희당은 정조가 세자를 위해 지은 건물로 이후 내전의 주요 정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흥선대원군과 밀약한 조대비가 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의 왕위 계승을 선언한 곳도 중희전으로 지금은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만 남았다.
    동궐도에 그려진 중희당 / 중희당은 창덕궁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려졌다. 앞에 놓여진 측우기, 풍기대(풍향계), 앙부일구(해시계), 소간의(천문관측기구) 등이 보인다. 중희당은 1891년 이후 이유 없이 사라졌다.
    창덕궁 단봉문 / 민왕후는 상궁의 옷으로 변복하고 구사일생으로 이 문을 빠져나온다.
    단봉문 틈으로 보이는 창덕궁

     

    이시영의 집에 살며 한양에서 온 대감 부인으로 위장했던 민왕후는 갑갑한 마음에 한 시골 무당과 가까이 지냈다. 자칭 관우 딸의 환생이라고 하는 박씨 성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데 그 무당은 오매불망하던 민왕후의 한양 복귀일을 맞추는 점괘로 민왕후의 혼을 쏙 빼놓았다.

     

    * 이름도 본관도 밝혀지지 않은 천것으로, 청상과부가 된 후 호구의 해결을 위해 무당이 되었다고 하며 타고난 미모에 말재간이 있어 무난히 밥은 먹었다고. 이 정도일 뿐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야사에는 무당 박씨의 이름이 박창렬(朴昌烈)이라고 전해지나, 김창렬이라고 하는 그 아들의 이름과 겹치니 이 또한 옳은 것 같지 않다.

     

    고종은 임오군란이 진압되자마자 곧바로 민왕후를 수소문해 충주의 소재를 확인했다. 이에 곧 영의정 홍순목을 필두로 하는 문무백관 60명으로 민왕후를 모셔오게 하니 그때가 8월 초하루였다. 따라서 8월 중순에 환궁한다고 했던 박씨 무당의 예언은 틀린 셈이나 일각이 여삼추였던 민왕후에게는 매우 정확하고 신묘한 점괘로 여겨질 만했다. 물론 박씨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지만 조선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 점괘였다. 조선으로서는 더없이 불행한 일이었다.

     

     

    민왕후와 진령군과의 만남 스토리가 전해지는 충주 백운암

     

    민왕후는 환궁하며 박씨를 데려갔다. 이후 박씨는 궁에서 민왕후와 같이 먹고 자다시피 했는데, 나인들과 달리 격 없이 달라붙으며 입안이 혀처럼 구는 그녀에게 민왕후는 더욱 마음을 빼앗겼다. 자신이 아니라 관우의 딸이 해주는 것이라는 안마 또한 정말로 효험이 있는 듯 한번 받고 나면 개운하기 그지없었다. 민왕후가 그의 안마와 감언이설에 중독되어 갈 즈음 박씨가 먼저 제안을 했다. 궁에서의 생활이 지속되자 나인들은 박씨의 존재가 점점 부담스러워졌고, 박씨 역시 불편해졌던 것이었다.

     

      "중전마마. 소인이 마마께 황감한 은혜를 입고 있사오나 주위의 눈총이 이밥 속의 겨 보듯합니다. 차라리 가까운 데 관성대제(관우)의 사당을 지어주시면 그곳에서 머무르며 나라의 평안과 세자마마(순종)의 강녕을 빌까 합니다."

     

    민왕후 역시 그것이 좋겠다 여겨져 물었다.

     

      "네 생각이 갸륵하구나. 혹시 어디 봐 둔 곳이라도 있느냐?"

     

      "예. 흥덕동 숭교방(崇敎坊) 골짜기를 지나다 부친(관우)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부친의 초혼(招魂)에 적합한 길지(吉地)인 듯합니다."

     

    그녀가 지목한 곳은 창덕궁 서쪽 성균관과 가까운 곳으로 효종 때의 재상 우암  송시열의 거처가 있던 곳이었다. 즉 박씨는 과거 대감집 자리를 제 거처로 삼겠다는 대담한 생각이었지만 민왕후는 오히려 좋아라 답했다.

     

      "흥덕동이면 멀지 않구나. 그리하라. 네게 궁을 자유로히 출입할 수 있도록 정식 군호(君號)를 내려주마."

     

    군호는 적출(嫡出)이 아닌 왕자나, 종친 및 훈신(勳臣)에게 임금이 군을 봉할 때 주는 이름으로, 직급으로 보자면 장상(將相)의 반열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대감급이었는데, 정말로 그녀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무당에 걸맞은 군호가 하사되었다. 아무리 무속이 판치는 미개한 시절이었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울러 흥덕동 숭교방 골짜기에는 진령군의 사저와 북관왕묘(北關王廟=북묘)가 만들어졌으니, 일대의 민가들이 철거되고 송시열의 후손마저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1902년 동판화에 그려진 북묘의 위치(오른쪽 위 □)

     

    관왕묘의 공사는 1882년 말에 시작해 이듬해 가을에 끝났던 바, 적잖은 규모의 사저와 묘당(廟堂)이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 지금 혜화동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일대도 전부 묘역(廟域)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83년 10월 21일 관왕묘가 완공되자 고종은 문무백관들은 물론 왕세자까지 대동하고 친히 그곳에 왕림해 참배했다. 까닭에 창덕궁에서 관왕묘까지 새로 어도(御道)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이상의 말도 안되는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계미년 10월 21일 왕이 돈화문을 나가 북묘에 배향하였다. 왕이 찬례(贊禮)에 따라 판위(板位)에 내려서서 찬의(贊儀)의 복창에 따라 관왕 앞에 4번 절하고 왕세자도 4번 절했다.(贊禮導上降復位, 贊儀唱四拜, 上行四拜禮, 王世子行四拜禮) 절을 마친 후 찬례대로 관우 장군의 신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과 왕세자가 망료위에 배향하고.....도승지 이교익이 향을 받들고 동부승지 김낙진이 향로를 받드니 왕이 3번 향을 살랐다.....

     

     

    하마비(下馬碑) / 이곳에 북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이다.
    우암구기(尤菴舊基) 표석 / 우암 송시열이 살던 곳이라는 쓰여진 시대를 알 수 없는 비석으로 송시열 사후 그가 살던 마을 입구에 세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증주벽립(曾朱壁立) / 우암 송시열이 동네 바위에 중국의 증자와 주자처럼 살겠다는 철저한 사대주의의 정신을 각자(刻字)했다. 오른쪽은 서울시가 세운 안내문으로 이곳이 송시열의 집 터라고 명시됐다.
    북묘가 있던 곳의 지금 풍경

     

    이후 이곳은 북묘라 불려지며 정치 1번지가 되었던 바, 고관대작들은 물론이요 남편을 출세시키려는 부인들, 묘당에 돈을 희사하고 한 자리 얻어내려는 모리배들이 들끓었다. 실제로 많은 수령방백들이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모두들 알랑방귀를 뀌어댈 수밖에 없었다. 탐관오리 출신 고관인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밖에도 세상의 날건달들이 한 자리씩 넘보며 모여들었다.

     

    그런 날건달 가운데 이유인(李裕仁)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유인은 경상도에서 상경해 무과에 합격했으나 관직의 적체로 출사하지 못한 이른바 한량(閑良)이었다. 일제시대 발행된 <별건곤(別乾坤)>이란 잡지를 보면 이유인은 협잡꾼으로 세월을 보냈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랄까, 진령군에게 접근한 그는 자신을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의 화신이라고 속이고 다른 협잡꾼들과 공모한 귀신 현신(現身)의 트릭을 보여주었다. 자신도 뛰어난 무당이라는 것이었다.

     

     

    <별건곤> / 개벽사에서 정론지 <개벽>에 이어 만든 잡지로, 가벼운 읽을거리를 표방했으나 한용운의 '조선은 어디로 가나?'와 같은 계몽의 글도 실렸다. 1926년 11월 1일부터 1934년 7월 1일까지 통권 74호가 발행됐다. '별건곤(別乾坤)'은 '별천지'와 같은 말로 보통과 다른 특별한 세계를 뜻한다.
    개벽사 터 푯말 / <개벽> <별건곤> <어린이> 등을 발행한 개벽사에 대한 안내 동판이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수운회관 대문 기둥에 붙어 있다.

     

    그것이 진정으로 통했는지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였다. 그리하여 이유인은 진령군의 양자가 되었는데,(<매천야록>에 '아들이라 했으나 추문이 들렸다'고 적힌 내용 등을 고려하면 양자라기보다는 내연관계가 맞을 것이다) 이후 진령군을 따라 궁에 드나들며 궁에서 행해지는 대소 굿판을 도왔다.

     

    당시 진령군은 밤마다 고종과 왕비를 만나 무언가를 속닥였고 그것은 다음날 왕명으로 하달되었던 바, 몇년 전 청와대를 마음대로 출입하며 대통령을 휘두르던 최서원이라는 여자의 경우와도 매우 흡사했다.(더욱 흡사한 것은 같은 짓을 한 최서원 아비 최태원은 진짜 사이비 무속인이었다는 사실! 진짜 사이비 무속인?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

     

    이에 이유인도 왕실을 우습게 보기 시작했으니,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지켜주는 나라의 영산(靈山)이었습니다. 그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각 쌀 한 섬과 돈 10만 냥을 바치면 나라가 태평해지고 부강해질 것입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이것이 시행에 옮겨졌다. 세부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총 1만2천석과 12만냥이라는 거금이 국고에서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었다. 이에 빈궁했던 국고는 더욱 쪼들리게 되었는데, 그 돈의 거의가 진령군 모자의 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임은 굳이 확인을 안 해도 알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유인은 관직에도 나갔으니 1887년 10월 14일 고종의 특명으로 희천군수가 되었고 이후 양주목사, 병조참판, 함경도 병마절도사, 법무대신으로 승승장구하였다.

     

    부패한 정국,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이 세상이었고, 무능한 국왕 밑에서 어디로 발을 딛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대로 생각 박힌 사람은 있었으니 1894년 형조참의 지석영은 목숨을 걸고 진령군과 이유인을 탄핵했다.

     

    신이 전국의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해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진령군은 신령의 힘을 빙자해 위로는 임금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기도의 명목으로 민간의 재물을 축내며 매관매직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요사스런 계집 진령군과 그 아들에 대해 살점을 씹어 먹으려 합니다.

     

    아! 세상의 민심이 그와 같은데 이를 탄핵하는 자는 귀양을 보냈으며, 반면 그 당사자는 문책하지 않고 오히려 끼고 도니 백성들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데 속히 상방검(尙方劍)으로써 두 죄인을 주륙하고 그 머리를 성문에 매달도록 명하시오소서.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신 후 숨어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뽑아 각자 합당한 직무를 맡겨 협력하여 충성하게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임오군란이 1882년에 일어났으니 진령군은 10년 이상이나 권력을 향유한 셈이었다. 진령군은 이와 같은 탄핵에도 끄떡없이 버텼으나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며 민왕후가 시해되자 힘을 잃었고, 그 얼마 후 진령군도 죽었다.(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각 전승이 다르다) 하지만 이유인의 득세는 민왕후 사후로도 지속된 듯보이니 1904년 봉상시 부제조 송규헌(宋奎憲)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특진관 이유인은 변변치 못한 술수를 가지고 외람되게 은총을 받았으며 요사한 도(道)와 잡된 술수로 대궐 안을 어지럽힌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노릇입니다. 이유인은 기실 그간 창귀(娼鬼, 남창 귀신) 노릇을 한 것이니 속히 사헌부에 내맡겨 명백히 죄를 다루어야 마땅한 줄 아옵니다. 

     

    송규헌의 상소는 이유인의 정체와 비리를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귀양은 면했다.(1894년 진령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사간원 정언 안효제는 고종의 진노를 사 전라도 절해고도로 귀양 갔다) 이상 진령군과 이유인에 대한 글은 나 역시 그렇고 어디나 대동소이한데, 거의 유일한 기록인 <매천야록>을 참조한 때문일 것이다. 그 <매천야록>을 쓴 선비 황현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비분강개해 자결했다. 안효제는 귀양살이가 끝나자 만주로 가 무장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혼란의 시대에도 선비정신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데자뷰가 박근혜 정부에서 있었다.(진령군이라는 이름이 우리 귀에 친숙해진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선비정신의 데자뷰는 없었으니 국정을 농단하는 무당의 딸 최서원(최순실)에 대해 누구도 질타하지 않았다. 훗날 사건이 터지자 그들은 오히려 위증을 했으며,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자는 최서원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이름을 들은 바도 없다고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다가 들통이 났다.

     

     

    거짓말로 일관하는 김기춘

     

    김기춘. 1939년 경남 거제에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3학년 때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에 빌붙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를 '김똘똘'이라 부르며 사랑했고, 이후 5공화국 시절까지 대공수사국장,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등의 요직을 섭렵했는데 대공수사국장 시절에는 어부 간첩사건을, 법무부 장관 시절에는 강기훈씨 유서 대필 사건 등을 조작해 공안정국을 주도했다. 제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박근혜 정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어 화려하게 정치권에 컴백했다.

     

    이후 대를 이은 대통령의 총애 아래, 어리석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며 실세 환관과 같은 권력을 휘둘렀으니 실제적인 대통령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로 죄과는 작게 치러, 박근혜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2017년 구속되어 징역 4년을 선고받았으나 최장 구속 기간인 1년 6개월을 채워 2018년 8월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 다시 재판 거래 의혹에 연루되었으나 무사했다. 아무튼 미꾸라지 같은 정치인이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최서원이 아니라 바로 이 자 김기춘을 지목하였지만, 역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 권력 기생충은 결국 이렇게 됐지만 감방 안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의 북묘묘정비 / 명륜동 북묘에 있던 것으로, 비문은 고종이 직접 지었고 민영환이 글씨를 썼다. 관왕(관우)께서 꿈에 나타난 자신과 민왕후를 두 번 구한(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고마움을 절절이 담았는데, 국왕이 이 모양이니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북묘 본당
    북묘 비각 / 북묘는 일제에 주권이 넘어간 1910년 이후까지도 존속했으나, 1913년 총독부의 국유재산 매각공고에 북묘 택지 4,273평과 건물 311평이 고시됐다. 한 나라를 망친 비극의 현장치고는 너무도 흐지부지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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