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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아리고개 넘어 서울대병원으로 진격한 북한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7. 18. 20:18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6.25전쟁은 시작됐다. 이후 서부지역은 황해도 옹진반도, 개성·장단·연천지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는 이곳이 모두 3.8도선 안에 속한 남한의 영토였다) 하지만 워낙에 방비가 미약했던 탓에 방어선은 곧 무너졌고 문산·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이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말았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1시경 미아리 최후방어선마저 뚫고 서울로 진입했다. 전쟁 개시 불과 3일도 안 돼 수도 서울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이었다. 가까워지는 포격 소리에 이미 장안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어 피난민이 몰리기 시작했으나 피난길은 여의치 않았다. 한강다리가 6월 28일 새벽 2시 40분경 폭파됐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어선 지 2시간도 안 돼 벌어진 일이었다.  

     

     

    70년대의 미아리고개 / 6.25전쟁 당시만 해도 꽤 높은 고개였으나 1964~1966년 시행된 도로공사로 레벨을 크게 낮추었고 돈암동~미아리간 1300m 구간의 확장공사가 실시되었다.
    지금의 미아리고개 / 미아동 방면
    지금의 미아리고개 / 서울시내 방면
    고개 마루의 미아리고개공원 사적비 / 뒤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보인다.
    사적비 안내문 / 미아리고개에 얽힌 슬픈 과거와 역사적 아픔을 새롭게 인식해 보고, 그리하여 우리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제작되었다고 함.
    사적비와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공연작의 콘트라스트 / 사적비 옆으로 보이는 '얇은 경계'라는 공연안내문 제목이 흡사 그날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하다. '얇은 경계'는 죽음을 바라보는 유한한 인간의 내면을 다룬 미국 극작가 루카스 나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밖의 미아리고개에 얽힌 역사들

     

    1592년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 임금은 임진강을 넘자마자 부리나케 배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은 어두운 강 건너를 바라보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사의 데자뷔가 360년 만에 일어났다. 당시 많은 피난민이 한강인도교로 몰렸고, 사람들은 끊어진 한강 다리 앞에서 울부짖었다.

     

    정부의 거짓 발표에 속은 결과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일찌감치 서울을 떠나 도주했으나 (27일 새벽 3시) "끝까지 서울을 사수하겠으니 동요하지 말고 군 작전에 협조하라"는 대통령 육성 방송은 이후로도 48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중앙방송국(HLKA)은 "북한군이 침공해 왔고 일시 밀렸으나 국군이 반격을 개시해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했고, 26일에는 "국군이 해주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평양 원산을 향해 진격 중"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하지만 방송 내용과는다르게 포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더불어 몰려드는 피난민에 시민들은 보도 내용이 모두 거짓임을 눈치챘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피난 보따리를 꾸려 한강인도교로 왔지만 다리마저 폭파돼 버리고 만 것이었다. (당시 다리 위로는 수많은 피난민과 차량 50여 대가 건너던 상황이었다. 다리 폭파로 희생된 사람은 800명 정도로 추산된다) 

     

     

    1950년 7월 3일 미 공군기가 북한군의 남진 저지를 위해 한강철교를 폭격하고 있다. 오른쪽이 6월 28일 폭파된 한강인도교이다.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그런데 그나마 피난 대열에도 끼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서부지역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과 이들을 치료하던 의료진이었다. 북한군은 미아리고개를 넘어선 후 선봉 기갑인 9전차 여단(류경수의 제9땅크여단) 소속의 1개 대대가 서울대병원으로 진격했다. 미아리고개에서 서울대병원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북한군의 출현에 병원 경비를 맡았던 국군 1개 소대와, 부상병 가운데 운신이 가능한 군인 80여 명이 병원 뒷산으로 가서 황급히 전열을 꾸려 저항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리하여 지휘를 맡은 조용일 소령 이하 군인들은 모두 사살당하고, 북한군은 곧바로 병원 안으로 난입해 1천명에 달하는 부상병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부상병만을 사살했으나 나중에는 환자복을 입은 일반 환자들까지 모두 죽였다. 이 가운데는 정신병동 입원 환자와 소아과 병동의 어린이, 그리고 보호자들도 있었다. 북한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병원을 샅샅이 뒤져 숨어 있던 환자 등을 끌어내 병원 연료용 석탄더미 속에 생매장하거나 보일러실에 가둔 후 석탄에 불을 질러 죽였다.

     

     

    훗날 수습된 시신들
    서울대병원에 보관된 당시의 유골들 / 그해 9월 서울이 수복된 뒤 미군이 학살 현장을 정리했을 때 수습한 유골만 1000구가 넘었다.


    충격적인 내용은 더 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박명자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간호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동원되어 서울대병원에서 부상자 치료를 도왔다) 그때 북한군과 함께 온 부역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좌경사상에 경도되어 전쟁 전 월북한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었는데, 그들이 인민군 군의관이 돼 병원으로 돌아와 국군 부상자, 반공 성향의 의사와 간호사, 직원 등을 분류해 주며 학살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이처럼 무섭다. 당시 북한군들이 저지른 만행은 1864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을 뭉개버린 것이었다. 제네바 협정 제1조는 「전쟁당사국은 당장의 적대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부상병, 포로, 조난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군은 이것을 모두 개소리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1987년 발효된 고문받을 우려가 있다고 여겨지는 중한 근거가 있는 다른 나라로의 추방·송환·인도를 금한다」는 유엔 고문방지협약 3조를 위반한 현실로서 이어져오고 있다. 이번에는 대한민국에서 저지른 일이다.

     

     

    위 사건을 추념해 건립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의 현충탑
    당시의 만행과 시대를 함께한 병원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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