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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두법 실시 후 도피한 지석영과 대한의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8. 26. 08:59

     

    천연두는 1976년을 마지막으로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질병이 되었다. 이는 제2차세계대전 후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을 줄이고자 노력해왔던 세계보건기구(WHO)의 최대 성과라 할 만한 일로서, WHO는 1999년 6월 30일 공식적으로 천연두의 사망 선고를 내렸다. 가히 질병에 대한 인류의 승리라 부를 만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우한 폐렴 찜쪄먹을 역대급 전염병(IV) - 천연두'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 천연두란 질병의 공식 명칭은 '두창(痘瘡, smallpox)'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마마' 또는 '손님'으로 불렸다. 그래서 내 어릴 적만 해도 어깨의 우두 접종 자국을 흔히 마마 자국으로 불렀고, 얼굴의 약간의 곰보 자국도 마마가 스쳐간 흔적이라 표현했다. 또 마마 자국이 심한 사람들도 쉬 볼 수 있었다. 역사적 인물로는 구인후, 오명항, 김육, 김상옥, 김정희 등의 초상화에서 마마 지국을 볼 수 있다. 

     

     

    오명항(1673~1728)의 초상화

     

    천연두라는 악성 질병에 (상감)마마라는 최상급 존칭을 붙인 것은 병을 옮기는 신에 대한 외경심의 표현이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관용을 베풀지 않았으니 고대 이집트 시대 이래로 수억 명의 인류에게 죽음을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죽음의 신은 20세기 들어와서도 극성을 부렸으니 지난 1967년 전 세계 1500만 명에 천연두가 발병해 2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1만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자들의 의견을 따르자면 이 죽음의 신은 거의 현생인류의 탄생과 함께 한 최고(最古)의 질병이다. 천연두는 바이러스에 의한 급성 전염병으로 발열과 발진으로서 병이 시작되는데, 치사율이 30 ~ 35%에 달했고, 생존하더라도 65 ~ 85%는 곰보가 되었으며 그 외도 실명, 관절염, 골수염, 사지변형 등을 일으키는 무섭고도 끈질긴 질병이었다.

      

    인류는 이 무서운 질병을 물리치기 위해 오랜 전부터 노력해 왔는데, 고대 인도에서는 천연두가 걸린 사람으로부터 채취한 딱지를 약화시켜 사람에게 접종시키는 인두술(人痘術)이 시행됐고,* 300년 전의 튀르키예(터키)에서도 소에서 추출한 백신을 접종하는 현대 의학과 흡사한 우두술(牛痘術)이 개발되어 유럽으로 건너왔다. 

     

    * 다만 고대 산스크리트 의학서적에서 인두법을 설명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인도 기원설은 문제가 있는 편이다. 인두법은 천연두에 걸린 환자의 딱지로 만든 진물이나 가루를 건강한 사람의 코에 넣어 면역시키는 방법이다.  

     

     

    튀르키예 천연두 백신 접종 기념우표 / 튀르키예 정부가 1967년 최초로 국가 접종을 한 것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다. 1717년 시행되었다는 날짜를 써 넣었다.

     

    8세기 후반 영국의 농촌에서 일하던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소젖을 짜는 여인들에게는 천연두가 걸리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 건 우연일 수도 있고 터키 우두법의 커닝일 수도 있다. 아무튼 소의 피부병에 감염된 목자(牧子)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한 에드워드 제너는 1798년 소의 고름(우두·牛痘)을 사람에게 접종해 예방에 성공한다. 예방약을 뜻하는 백신(vaccine)이라는 말도 암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vacca’에서 유래했다. 최초의 접종자는 농장 관리인의 아들인 제임스 핍스라는 8세 소년이었다.

     

    제너가 자신의 아들에게 최초 접종을 했다는 것 역시 잘못 알려진 사실이니 미담의 진짜 주인공 메리 몬태규였다. 주(駐) 오스만제국 대사의 부인이었던 메리는 오스만제국에 머물면서 천연두 접종법을 관찰하고 이를 상세히 기록했다. 그녀가 영국으로 귀환한 1718년 이후 이 우두법을 대대적으로 시술했는데 그녀는 망설이는 대사관 의사 찰스 메이틀랜드에게 자신의 아들을 최초로 접종시켰다.

     

     

    메리 몬태규(Mary Wortley Montagu, 1689-1762)

     

    우리나라에서도 우두 종두법을 들여온 사람이 잘못 알려져 있다. 흔히 우두법은 한말의 지석영이 일본에서 배워와 시행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1876년 2월,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기수를 수행하고 갔던 박영선(朴永善)이 최초이다. 그는 한의사이자 역관으로 수신사 일행의 통역을 맡았는데, 김기수 이하 수신사들이 성리학에 쩌든 타성으로 본연의 임무를 등한시하는 동안 (일본의 신문물을 많이 보고 배워오는 것이 목적이었음에도) 그는 열심히 선진과학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한의사답게 그중에서도 일본의 우두술에 집중했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가지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특히 치명률이 매우 높은 두창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인두술로 두창을 예방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박제가 이종인 정약용 남상교 등) 사람의 두창을 사용하는 인두술은 소의 두창(우두)을 이용하는 우두술에 비해 부작용이 적지 않았고 효과도 떨어졌다. (시술 방법은 앞에서 말했다)

     

    하지만 일본은 서양의 우두술로 두창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있었던 바, 박영선은 도쿄 순천당의원(順天堂醫院) 의사 오다키(大瀧富三)에게서 약식으로 우두술을 배우고,(체류기간이 20일에 불과했으므로)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가 저술한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구해 귀국했다.

     

     

    <종두귀감> / 동교(도쿄 대학의 전신)의 중조교(中助敎) 구가 가쓰아키가 1871년 저술한 책이다.

     

    박영선은 귀국하여 자신의 방일 체험, 특히 일본의 우두법을 관훈방(종로 관훈동 일대로 당시는 이곳이 대표적 중인 거주지였다)의 지인과 제자들에게 술회했는데, 이 자리에서 제자 지석영이 우두술에 큰 관심을 보이며 배우려 들었다. 부산의 왜인 거주지 동래와 초량에서는 일본인들이 우두 시술로써 두창을 예방하고 있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 알고 있던 터였기에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지석영의 아버지 지익룡은 근방에서는 한약과 침으로 잘 알려진 이른바 유의(儒醫)였다. 이에 지석영은 어려서부터 의학에 자연스럽게 접근하였고, 한역(漢譯)된 서양 의학서를 통해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행한 우두 접종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박영선에게 배울 수 있는 우두술은 한계가 있었으므로 직접 부산으로 가 일본해군이 설립한 재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 마쓰마에(松前讓)와 도즈카(戶塚積齊)부터  2개월간 우두술을 다시 익혔다. 

     

     

    지석영(池錫永, 1855 ~ 1935) / 형조참의와 대한제국 동래부 관찰사를 지냈다.
    안국동 지석영 집 터 표석

     

    그리고 두묘(痘苗: 송아지에 접종하여 만들어낸 백신 원액)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귀경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에 들러 두살배기 처남을 비롯한 40여 명의 아이들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그는 이때 처갓집에서 못 믿을 사위라는 소리를 들었다 한다)  이것이 1880년 2월경의 일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공개적인 종두법 시술이었다. (날짜는 각 기록이 약간씩 다르다) 지석영은 훗날 이 순간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의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에 합격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처남의 팔뚝에 우두를 놓았을 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매일신보> 1931년 1월 25일자)

     

    * 지석영은 27살 때인 1881년 문과에 급제해 지평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개화 사상을 지녔던 그는 1884년 조세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민씨 정권에 밉보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 박영효의 무리로 엮여졌고, 강진 신지도에 5년간 유폐되었다. 

     

    위의 술회가가 실려 있는 <매일신보> 기사 / '조선의 제너 지석영 선생'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지석영 집안에서 소장하던 종두기계 / 종두침과 종두액, 두장판 등이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두장판에 종두액을 떨어뜨린 후 종두액을 종두침으로 상처를 낸 피부에 묻히는 방법으로써 접종했다. 서울대학교 의료박물관 소장품

     

    자신감을 얻은 지석영은 한성으로 돌아와 1880년 3월 사설(私設)로 우두국을 설치하고 공개적으로 우두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욱 정확하고 효과적인 시술을 위해 1880년 6월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었을 때 김옥균등의 도움으로써 수행원 자격을 획득했다. 이후 그는 동경 내무성 위생국의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를 방문해 제생의원에서 미처 배우지 못했던 두묘 제조법을 배우고 우두술과 관한 여러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후 귀국하였다. 

     

    하지만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신식군대 별기군에 차별받던 훈련도감을 비롯한 구식군대의 군인들은 급기야 폭동을 일으켰던 바, 신체제를 부정하며 모든 개화 문물을 뒤집어엎었다. 이 저항 세력에는 우두술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여긴 무당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석영의 종두 시술소를 군인들과 함께 뒤엎어 불태워 버렸고 나아가 지석영의  처단까지 요구했다.

     

    이에 놀란 지석영이 충주의 처가로 피신하였다가 그해 8월 한양으로 복귀함이 우연찮게도 민왕후(명성황후)와 비슷한데, 어찌 됐든 그는 이와 같은 노력이 빛을 발해 1894년 갑오개혁 때 위생국의 책임자로 종두를 관장하게 되고, 1899년 경성의학교(대한의원 의학부의 전신)가 설립되자 초대교장으로 선임되어 대한제국 의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현재 서울대학병원 내 대한의원 건물(의학박물관) 앞에 세워진 지석영의 동상은 의학 발전에 이바지한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87년 서울대병원과 의대 동문들이 갹출해 세운 것이다.  

     

    서울대학교 의료박물관으로 쓰이는 대한의원 건물
    송촌(松村) 지석영 선생 동상
    시계탑 건물 뒤의 이 표석은 지금은 치워졌다. /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던 만큼 정통성을 계승하고 싶었겠지만 세브란스 병원이 선점한 듯하다.
    제중원이 있던 재동 헌법재판소 내 홍영식 집자리 / 갑신정변 실패 후 주역인 홍영식은 청국 군인들에 의해 죽고 가족들은 이곳에서 집단 자살했다.
    제중원 / 갑신정변 당시 빈사의 민영익을 수술로 회생시켜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버려졌던 홍영식의 저택을 개조해 최초의 서양병원 제중원을 개업한다.
    연세대학교 내 광혜원 건물 / 연세대학교에서 교정 내에 제중원 건물을 복원시킨 후 제중원의 처음 이름인 광혜원의 현판을 걸었다.
    구리개(을지로 입구)로 이전한 제중원 / 1886년 이곳에서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인 제중원 의학교가 문을 열었다. 1대 원장 알렌이 화학, 2대 원장 헤론이 의학, 언더우드가 영어를 가르쳤다.
    이 여인을 아시나요? / 1888년 명성황후 치료 공로로서 정2품 정경부인에 제수된 제중원 의사 애니 엘러스
    정신여교 교정의 애니 엘러스 상
    망우리역사문화공원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지석영 부부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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