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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ㅡ그는 왜 살해당했나?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8. 31. 01:54
혜화동의 역사에 관해서는 이미 너 댓 차례에 걸쳐 글을 올렸는데도 아직 쓸 말이 태산이다. 해방 후 격동의 역사가 숨어 있는 이승만의 집 이화장(梨花莊), 남로당의 거점이었던 박헌영의 집 혜화장(惠化莊)에 대해서는 아직 입도 못 뗐다.(박헌영에 대해서 쓰지 못한 것은 아직 그가 살던 혜화장을 찾지 못한 이유도 있다. 그 적색분자에 대한 표석 같은 것을 세웠을 리도 만무하고) 그래도 언젠가는 쓰게 될 터인데, 아무래도 여운형의 일생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는 몽양(夢陽) 여운형이 암살당한 장소를 나타내는 표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 1947년 7월 19일 해방정국의 남한 정치지도자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그는 그 이전 이미 10여 차례의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11번째 테러를 당해 결국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많은 공격을 받은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극심하게 전개된 좌·우의 대립 속에서 좌·우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까닭이다.
남들이 좌·우 분열할 때 여운형은 끝까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잘 알려진 그대로 한반도는 해방과 동시에 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며 분단되었고, 국민들도 좌우로 나뉘어 시끄러웠다. 그는 당시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고 미국 및 소련 군정의 최고위 인사들과도 교류가 가능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 직전 일본의 패망을 직감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민족지도자 여운형에게 해방 후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치안을 부탁했을 정도로 일본에서도 그 인물됨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정보를 바탕으로 해방 1년 전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이를 모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했다. 건준은 삽시간에 남한의 모든 지역에서 면 · 동 · 리 단위까지 조직이 정비되었다. 이에 건준은 해방정국의 최대 정치조직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써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을 발족시켰으나 미군정과 이승만 지지자들의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미군정에서는 조직을 갖춘 여운형을 택해 김규식·여운형 조합을 초대 대한민국 정부의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삼고자 했다. 그것이 무난한 출발이라 여긴 것인데, 이승만의 경우는 독선과 똥고집이 싫었고 미국과 연줄이 없는 김구는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 김규식은 한국전쟁 때 납북당하며 우리에게는 잊힌 인물이 되었지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뻔한 사람이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된 이후 일관해온 외교적 독립운동으로 일찍부터 미국정부에 각인되었다. 어릴 때는 선교사 언더우드의 고아원에서 자랄 정도로 불우했는데, 동래부 관리를 지내던 아버지 김지성이 민씨정권의 대일무역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유배당해 죽고 어머니는 6세 때 여읜 까닭이다.
청년시절에는 서재필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에 근무하다 그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가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노크대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재학 중 학내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스피치가 뛰어났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 김구 등과 함께 남북통일 노선을 견지했고 미군정에 의해 초대 대통령 감으로 내정되었으나 여운형이 암살당하며 그 또한 날개가 꺾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해 만포진 근방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분위기가 이와 같이 흘러가자 이승만 측에서 긴장했다. 노선을 같이 한다고는 하지만 김구 측에서 볼 때도 여운형은 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일 정도는 아니었을 터이나, 결정적으로 그가 신탁통치를 찬성하며 모두에게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12월, 연합군의 주축이었던 미국, 영국,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각국 3명의 외무상이 참석)를 열어 한반도의 38도선을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로서 태평양전쟁의 피해국인 한국이 오히려 분단의 피해를 입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회의 결과, 먼저 남북한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임시 정부와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국이 협의한 다음 5년간의 신탁 통치를 실시할 것이 결정되었다.
신탁통치란 한국이 그 네 나라의 위임통치 하에 놓이는 것을 의미했던 바, 즉시 독립을 바라던 대다수 국민들은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북한은 나름대로의 계산 속으로 신탁통치를 찬성했다. 언젠가 미국과 영국은 물러가게 될 터 그 틈을 이용해 적화시키겠다는 것이 김일성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때 여운형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나섰다.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세워져 38도선이 고착화되면 남북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송진우가 가장 먼저 신탁통치를 찬성했고, 가장 먼저 암살되었다)
남로당의 총수 박헌영도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으나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는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섰다. 까닭에 지금은 박헌영도 암살의 배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로 지난 2007년 7월 여운형 서거 60주기를 맞아 열린 몽양 추모 심포지엄에서 "몽양을 박헌영 측에서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 명예교수) 암살의 배후로 가장 널리 알려진 주장은 이승만을 따르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설이고, 미국이 사주했다는 설도 지지를 받고 있다.
*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바라는 미국의 속내를 알고 있었음에도 여운형은 김일성과 소련군정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5번이나 38도선을 넘나들었다. 통일정부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그만큼 헌신적이었지만 오히려 미군정의 주의조치를 받았다. 이때 여운형은 이렇게 말했다. "내 집 안에서 내가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객이 웬 상관인가?"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결국 암살당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 일행이 타고 가던 승용차를 트럭 한 대가 가로막았고, 그 사이 암살범이 근접 사격으로 차 안을 저격했다. 세 발의 총을 맞은 여운형은 즉사했다.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과 단독범행임을 강조했다. 그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6.25 발발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이후 공소시효가 지난 1974년 2월, 사건의 공범이라는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사건의 가담자임을 자백했다. 자신들은 여운형이 민족분열의 책임자라고 생각해 범행을 저질렀으며 배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남양주에 사는 김흥성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도 나섰지만 앞서의 애국충정만을 되풀이했다. 이들은 배후에 대해서는 끝내 부인했고 경찰 또한 밝혀낸 것이 없다.
좌·우익 모두 앓던 이가 빠져서인지 장례는 좌·우 합동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조선왕조 국장에 못지않게 성대히 치러졌다. 장례기간에는 그를 싫어했던 좌·우익 인사가 모두 애도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유해는 성북구 우이동 묘지에 안장됐다. 그런데 국립묘지가 조성된 뒤에도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로 옮겨지지 않았고, 독립유공자로도 지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암살범들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 영웅 행세를 하고 다녔다.
이는 미군정과 초대 이승만 정부에서 줄곧 표방해 온 반공 이데올로기의 탓으로, 좌익과도 손을 잡은 여운형은 결코 애국선열이 될 수 없었다. 그 2년 후 암살당한 김구와 비교할 때 여운형이 한없이 초라한 대접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그의 아들 딸들은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고 여운형도 애국지사로 추앙받고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남한 정부에서 반대급부가 창출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세월이 좋아져 그에 대한 평가도 원만해졌고, 우이동 묘소에 대한 참배도 자유롭다. (안 믿어지겠지만 얼씬도 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경기도 양평 북한강가 신원리에 있는 그의 생가는 모두 무너지고 초가 하나만 남았었지만 지금은 몽양여운형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전시 자료도 꽤 알차다. 기념관은 2011년 개관하였으며 이듬해 국가보훈처에 의해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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