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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쓰시마) 정벌군이 출정한 옥수동 두모포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9. 7. 23:04
고려말 왜구는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명나라 해안에도 자주 출몰해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우리나라 병제(兵制)에도 큰 영향을 미친 명나라 척계광(戚継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이 왜구들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저술한 병서인데, 그 서두에는 왜구들이 휘두르는 장도(長刀)에 명나라 군사들이 얼마나 겁을 먹고 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 왜구를 그저 노략질하는 해적떼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왜구·倭寇라는 한자의 구성 자체가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무장한 왜의 정규군이었다.
고려말 왜구는 해안 도시 약탈을 넘어 내륙 깊숙이까지 침투해왔으니 1376년(우왕 2) 7월 최영 장군이 그것들과 싸워 크게 이긴 홍산대첩은 지금의 충남 부여에서 벌어진 전투이고, 1380년 이성계가 큰 승리를 거둔 황산은 지금의 전북 남원에 있다. 당시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 왜구들은 사람과 말이 모두 쇠 갑옷으로 무장한 정예 군대로서 표현돼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라고 왜구의 침탈이 그칠 까닭이 없었으니 조선은 국초(國初)의 혼란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이르자 대규모 선제 타격으로 왜구의 공격을 막고자 나섰다. 1419년(세종 1) 대마도(쓰시마) 정벌이 그것으로 왜구의 거점인 대마도를 쓸어버리려 나선 것이다. 이는 순차적으로 볼 때 1389년(고려 창왕 1) 1월 박위 장군의 1차 대마도 정벌, 1396년(태조 5) 12월 김시형 장군의 2차 대마도 정벌에 이은 제3차 대마도 정벌에 해당되지만 지금까지와는 아예 규모가 달랐으니,
명장 이종무 장군이 삼군도체찰사(三軍 都體察使)라는 이름의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삼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뽑아 올린 대규모 병력이 대마도로 출정한다. 그런데 그 출정 장소가 아래의 교과서 지도를 비롯해 모두가 거제도로 되어 있어 마치 경상도나 동래(부산)의 수군이 나선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대규모 원정군이 출정한 곳은 한강 두뭇개 나루, 즉 지금의 옥수동 옥수전철역 앞 한강이었다.
이 원정이 얼마나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는지는 임금인 세종과 상왕 태종이 도성 밖 동남쪽 5리 거리에 있는 동호 두뭇개 나루까지 직접 나와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삼군도절제사 최윤덕 이하 여덟 장군의 출정을 격려하고 원정대의 출항을 지켜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때가 세종1년(1419) 5월 18일로 <세종실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상왕과 임금이 두모포(豆毛浦) 백사정(白沙汀)에 거둥 하여 이종무 등 여덟 장수를 전송하고, 상왕이 친히 여러 장수와 군관에게 술을 줄 때, 환관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술을 치게 하고, 여러 장수에게 활과 화살을 주었다. (아직 태종이 군권을 쥐고 있던 때라 상왕이 행사를 주괌함)
이때 출정한 병력의 규모가 얼마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그해 6월 17일 거제도를 경유하여 최종 목적지인 쓰시마로 향할 때는 병선 수효가 경기도선(船) 10척, 충청도선 32척, 전라도선 50척, 경상도선 126척, 총계 227척으로, 이 배에 총수 17,285명의 병력과 65일치 군량을 나눠 싣고 출정하였다.
조선 원정군은 6월 20일 대마도에 상륙하여 첫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이후 왜선 129척과 주거지 1,939호를 소각하고, 왜구 114명을 참수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고 (포로 21명은 송환) 7월 1일 거제도로 귀환하였는데, 이 원정을 기해년(1419년)의 정벌이라하여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 선제 타격은 크게 효과를 보아서 이후 대규모의 왜구 침탈은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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