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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무계정사 터에는 요정 건물이 옮겨와 앉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9. 25. 20:42
* '안견의 몽유도원도 & 안평대군의 무계정사'에서 이어짐.
신숙주의 배신에 관한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고 본 블로그에서도 여러 번 다뤄 따로 쓸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은 안위는 궁금한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살생부에 이름이 올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신숙주처럼 배신을 한 것은 아니니 안견의 고육지책 생존 스토리가 윤휴 (尹鑴, 1617~1680)의 <백호 전서(白湖全書)>에 전한다.
안평대군은 당대의 예술가들을 모두 가까이 두었지만 특히 안견의 그림을 좋아해 그가 잠시도 문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까닭에 그는 본의 아니게 무계정사에 매인 몸이 되었다. 그런데 무계정사는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모였고, 자연히 수양대군 무리와 대립하는 주요 장소가 되었다. 이에 안견은 그들의 말을 귀동냥하며 곧 불어올 피바람을 예견했다.
안견은 그 피바람을 피하고 싶었다. 비록 안평대군의 황감한 은혜를 입어 화공(畵工)으로서는 드물게 종4품 호군(護軍)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렇다고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정치가도 권력가도 아닌 자신이 괜한 정권 다툼에 희생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에 안견은 꾀를 내어 안평대군이 북경에서 입수해온 귀한 먹 용매묵(龍媒墨)을 몰래 품 속에 넣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안평대군은 먹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사방을 찾았다. 그때 안견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품에서 먹이 떨어졌다. 안평이 크게 노했을 것은 당연지사이니 이후 안견은 무계정사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안견은 이렇게 화를 면했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일어난 1453년 그해 가을, 무계정사도 사라졌다. <단종실록>에 방룡소흥(旁龍所興, 호방한 용이 일어남)의 땅과 반역 모의의 장소로서 여러 번 지목되고 있는 무계정사가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해 10월 12일에는 “처음부터 지을 장소가 아니었으니 무계정사를 철거하라”고 사간원의 상소가 있었으며, 10월 25일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고 아뢴 죄목 중의 으뜸이 방룡소흥의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그와 같은 땅에 뉘라셔 감히 집을 짓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향후 600년이 지난 후로도 그곳은 그저 야산으로만 남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14년, 이곳에 난데없이 요정 건물이 옮겨왔다. 종로 3가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梧珍庵)이라는 유명한 요정이 철거되며(2010년) 그 부재와 신재(新材)가 섞인 무계원(武溪園)이란 이름의 한옥이 들어선 것이었다. 2012년 국토해양부가 '한옥건축지원 사업' 대상으로 오진암을 선정한 까닭에 (한옥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전통문화시설로서 그때까지도 빈 땅이던 무계정사 자리로 이전돼 왔다고 한다.
앞서 '정인숙의 선운각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에서도 말했지만 오진암은 삼청각, 선운각, 대원각 등과 더불어 장안의 유명한 기생집이었다. 오진암은 1910년 대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말 유명 화가이자 문화재 수집가 송은(松隱) 이병직이 살던 집이었으나 1953년 식당으로 문을 열었다. 오진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때였으니 마당에 큰 오동나무를 상호로 내걸었다.
오진암은 서울시 1호 등록 식당이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반 시민을 상대하는 식당이 아닌 고급 요리집이었다. 아마도 빈대떡 신사가 무전취식을 하다 매를 맞았을.....
그리고 오진암은 이른바 요정정치로 대변되는 당대 퇴폐적 밀실정치의 한 장소로 이용됐고, 이후로는 일본인들을 상대하는 국가가 인정한 공식 기방으로 쓰였다. 억지로나마 미화하자면 외화 획득에 이바지한 애가(哀家)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시대의 조류에 밀리며 지금은 그 장소에는 이비스앰배서더라는 이름의 호텔건물이 들어섰다.
단지 그뿐이지 오진암에 대해서 기생집 이상의 무엇을 말할 것은 없다. 굳이 역사성을 따지자면 종로 협객 김두한의 단골집이라는 것과,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사전 논의한 장소라는 것뿐이나, 그렇다고 내가 그 건물의 이전에 대해 특별한 불만을 가진 것은 없다. 단지 그렇다는 것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무계정사를 낳은 아름다운 그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지금 우리나라에 없으며, 또 앞으로는 진본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대로 소장자인 일본 덴리대학 측은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더 이상 진본 전시를 안 한다고 선언했다. 우리의 역사 유물을 가지고.....
그 몽유도원도의 발문에는 다음과 같은 안평대군의 글이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도원에서 만난) 은자(隱者)의 옷차림이 아직도 눈에 선하도다
그림을 그려 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충분히 천년을 전하여 봄직하도다
그림이 완성된 후 사흘째되는 정월 밤에
치지정(致知亭)에서 다시 펼쳐보며 이 글을 짓는다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後三日正月夜
在致知亭因故有作무계정사는 무너졌지만 안평대군의 바람대로 그림은 1000년을 남아 전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장소가 일본이다.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금 덴리대학(天理大學)이 소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추정할 수는 있다.
일본에서 제일 오랜 기간 소장했던 사람이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인 시마즈 히사요시로, 후에 여러 사람을 거쳐 덴리대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마즈 히사요시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제4진으로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후손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2차 진주성 싸움 및 사천성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사천성 전투 이후 명나라 군사들은 그를 '귀석만자(鬼石曼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석만자'의 발음이 '시만쯔'로, 시마즈와 비슷하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조선측 기록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조선측에 많은 피해를 끼친 무장인데, 그놈은 조선 출정에 용운화상이라는 다이지지(大慈寺) 주지승을 대동하였고 그 자의 눈썰미를 앞세워 조선 절들의 유물을 약탈했다. 그리고 그중에 고양시에 있는 대자암(大慈庵)이 있었다.
고양시 대자암은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당시는 대찰이었다. 용운화상이란 놈은 자신이 주석하던 가고시마 다아지지와 사찰명이 같은 대자암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 절을 뒤진 결과 대박을 터트렸다. 안평대군이 계유년의 난리를 피해 숨겨놓은 몽유도원도를 비롯한 빛나는 유물들을 무더기로 발견했던 것이었다.
* 대자암은 조선 태종 18년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13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어머니 원경왕후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같은 해 세운 사찰이다. 이 사찰은 암자로 명명되긴 했지만, 조선 초 흥천사, 흥덕사, 진관사 등과 함께 한성 인근에 있는 왕실 원찰로 조성돼 국가로부터 노비와 사전(寺田)을 부여받는 등 당시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대자암 소유 토지가 250결(약60만 평)에 이르고 스님 120명을 비롯해 수백 명의 대중이 상주한 대형사찰이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출처: 불교신문)
물론 이것은 추정이다. 하지만 현재 하버드대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평대군의 묘법연화경 사경문(감지금자묘법연화경·紺紙金字妙法蓮華經)*과 도쿄박물관 오구라 컬렉션을 목록에 있는 행서칠언율시축(34.1×56.5cm의 1폭 종이묵서), 그리고 덴리대학의 몽유도원도는 대자암에 있었을 법하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의 기록으로, <세종실록>에는 "승도(僧徒)들을 크게 모아 불경(묘법연화경)을 대자암으로 이전하였다. 금을 녹이어 경(經)을 쓰고, 수양, 안평 두 대군이 내왕하며 감독하여 수십 일이 넘어 완성되었는데, 이때 대군, 제군이 모두 참여하였다"(1446년 5월 27일)고 쓰여 있고, <문종실록>에도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금자(金字) 화엄경(華嚴經)을 만들어 대자암에 봉안하였다"(1450년 2월 18일)고 쓰여 있다.
* 안평대군의 묘법연화경 사경문은 임진왜란 때 약탈된 후 일본 GHQ(미군정)에서 문화재담당이었던 그레고리 핸더슨에 의해 하버드까지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혹자는 세종시대 학문·예술의 큰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의 사망은 융성했던 당대의 문화발전이 후퇴되는 비극을 낳았다고 말한다. 안평은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한 미술품 수집가로서, 신숙주는 "안평대군은 서화의 소문을 들으면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후한 값을 주고 구입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구입한 송나라 곽희(郭熙)와 이성(李成)의 그림을 비롯한 다수의 미술품 중 지금 전해지는 것은 단 한 점도 없다. 1453년 무너진 무계정사와 함께 그것들도 함께 사라졌음이다.
그러한 마당에 몽유도원도가 전해짐은 가히 기적 같은 일이다. 그래서 몽유도원도는 계유년의 피바람을 피해 미리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곳이 수양대군도 손댈 수 없는 선조의 원찰 대자암일 것이라는 상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지금은 덴리대가 애지중지하는 보물이 되었는데, 미술평론가 박경환 선생의 글에 따르면 그것을 환수할 기회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1947년경 초대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구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당시 국내 실정 때문에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그즈음해서 어떤 골동품상에 의해 국내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광수, 장택상, 최남선 등이 직접 보았다고 한다. 전형필, 최순우 씨에게도 구입을 권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국내 사정과 이런저런 이유로 국내에 잡아놓지 못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런 걸작을 자주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아직도 연구할 것들이 참으로 많은데 언제 그런 일들이 가능할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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