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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취 없이 사라진 오류동 번지 없던 주막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 22. 20:20

     

    우리가 사극을 볼 때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 주막 씬이다.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들이 이곳에서 막걸리나 국밥을 먹거나 하룻밤을 쉬어가는 장면은 정말로 익숙하다. 일례로, 인기 드라마였던 <허준>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드라마 허준의 주막 씬

     

    아무튼 드라마 속의 나그네는 숙식을 겸할 수 있는 이른바 주막이라는 곳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시대의 주막이 요즘의 음식·숙박업소처럼 흔했으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되는데, 사실은 엄청난 고증 오류라고 한다. 허준(許浚, 1539~1615년)과 동시대 사람 윤국형(尹國馨,1543~1611년)이 쓴 <갑진만필(甲辰漫筆)>의 내용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중국은 방방곡곡 점포가 있고 술과 음식, 수레와 말을 모두 갖추고 있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간다 해도 단지 은자 한 주머니만 차고 가면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으므로 그 제도가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가난하여 시전이나 행상 외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농사로만 살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것은 술과 물, 꼴과 땔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싣고 가는데, 먼 길일 경우 말 세 마리에 싣고, 가까운 길이라도 두 마리 분량은 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괴로워한 지가 오래다. 

     

    위 윤국형의 글에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주막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행하는 유동인구가 선결 조건이 될 터이나 농업사회인 조선에 있어 공무(公務)를 제외하고는 여행할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무로 인한 숙식은 앞서 말한 역원(驛院)에서 해결할 수 있었던 바,(☞ ' 양재역참, 혹은 말죽거리라 불리던 곳에서') 주막이 그리 존재할 일이 없었다.

     

    한양 남쪽의 이태원,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과 전관원은 서울을 대표하는 4대 역원이었는데, 서울 서초구 신원동이나 고양시 신원동이 본래 있던 역원을 대신하여 새로 조성된 신원(新院) 주변에 형성된 마을에서 비롯되었다 하는 것을 보면 서울과 그 근교에는 위 역원 외에도 많은 공용여관이 존재한 듯하다. 서울 인덕원과 경기도 장호원, 퇴계원 등은 옛 역원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이다.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의 이태원 터 푯말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주막은 17세기 후반에 들어서 출현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조선 후기 상업이 발전하며 수요에 따른 공급이 생성되었던 것이니,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서울은 물론이요,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중요한 길목인 문경새재, 충청도의 천안 삼거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花開), 한지와 농산물의 집산지인 전주 등에는 대규모 주막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보부상(褓負商)이나 객주, 거간 등의 신종직업은 주막이라는 장소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필시 그들이 주막촌의 주 고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 주막촌들은 특수한 경우이고 촌락 10∼20리 사이에 주막 하나 정도가 위치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 고찰이다.

     

     

    이형록(李亨祿, 1808-?)이 그린 「눈 내린 주막풍경」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의 주막 풍경

     

    1883년 인천 개항 이후로는 서울~인천 간의 교역량이 많아지며 그 경유지인 소사, 오류동에 주막촌이 형성되었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00년 7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며 오류동의 주막촌은 급속히 사양길로 들었고,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부근에 많았다는, 그래서 오류동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1970년대 경인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가로수가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그곳 주막거리 자리에는 '객사'라 불리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기와집이 남아 있었다. 객사는 지방 관아에 딸린 건물이니 그것이 객사일 리는 없겠고 아마도 옛 역원 건물로 짐작되는데, 과거 그 일대가 주막이 즐비했던 주막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도, 객사도 주막거리도 없고 아래 표석만이 과거를 증언한다.

     

     

    오류동 120번지 길가의 '주먹거리 객사' 표석
    표석에서 본 경인로 / 과거 이 길에 버드나무와 주막이 즐비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곳 객사는 임오군란 후 청군에 의해 청나라 텐진으로 끌려갔던 흥선대원군이 1886년(고종 22) 연금에서 풀려나 귀국하던 길에 쉬어갔던 유서 있는 곳이다. 아울러 청일전쟁 이전까지 청나라 관리들의 한양 왕래 시 숙소로도 이용됐던 역사성이 있는 장소이나  개발의 여파에 밀려 철거돼 버렸다. 

     

    그곳 객사는 일제시대에는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 간부 고미네(高峰)의 별장으로 쓰였고, 광복 이후에는 조준기 씨가 살았다. 광복 이후 그 집은 마당 가운데 있던 오래된 목련나무로 인해 목련나무집이라 불렸다. 흐드러진 백목련이 장관이었던 그 집은 '조 아무개 가옥'이란 식의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될 수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사라져는데, 그때 목련나무도 함께 사라진 듯하다. 

     

     

    철거되기 전의 주막거리 객사 / 구로구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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