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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감영과 개화기의 돈의문(서대문) 밖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 26. 20:13

     

    속칭 서대문으로 불리던 돈의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설명한 바 있다. 돈의문 인근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들을 말하자면 우선은 1645년 김종서 대감의 집에서 시발된 계유정난을 들 수 있겠고,(☞ '계유정난 그날의 김종서') 근대에 이르러서는 1886년 일어난 을미사변, 즉 명성왕후 시해 사건 때 일본 공사관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가 이끄는 무리가 이 문을 통과해 경복궁으로 난입한 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 - 그날의 진실')

     

     

    돈의문이 있었던 서대문 고개 네거리
    서대문 농업박물관 앞 김종서 집 터 표석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자행된 서대문의 철거도 중요한 사건일 텐데,(☞ '한양 성문 이야기 - 유일하게 없어진 서대문') 앞서 포스팅한 경성역(서대문역)이 폐쇄된 일도 사건이라면 사건일 수 있겠다.(1919년 3월 31일) 현대에 들어서는 백범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포병 장교 안두희에 살해되는 비극이 벌어졌다.(1949년 6월26일) 경교장은 예전에는 고려병원의 현관으로 사용되며 살해 현장마저 창고 같은 것으로 쓰였는데, 지금은 사적(제465호)으로 승격되어 매우 잘 관리되고 있다.  

     

     

    김구의 사저로 쓰였던 경교장
    김구가 피살된 경교장 집무실
    혈흔과 탄흔이 남아 있는 김구의 옷

     

    1960년 일어난 4.19의거도 빼놓을 수 없을 터인데, 당시 부정 선거의 원흉이던 이기붕의 집은 오래전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되었다. 이기붕 일가는 성난 시민들이 몰려오자 집단자살했으나 그 사망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무엇이 있다. 이기붕 가족은 아들 이강석의 총에 의해 살해되고 이강석은 스스로 총을 쏴 자살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나 그렇게 믿기에는 사건의 정황이 너무도 석연치 않다.  

     

    이기붕 일가 사망 미스터리

     

    계엄사의 발표대로 1960년 4월 28일 오전 5시 40분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에게 먼저 총질을 하고 자신을 쏘았다면 3발의 총성이 나고 잠시 간격을 두었다 2발의 총성이 나야 하는데, 이날 발표는 잇달아 4~5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했다. ▲다른 가족은 모두 한 발에 갔고 이강석만은 자신의 가슴과 머리에 2발을 쐈다고 했는데, 검시 결과 양쪽 다 단번에 숨을 거둘 수 있는 급소였다. 따라서 검시관은 1발을 쏜 후 머리나 복부에 다시 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전했다. ▲사건 당시 이무기 비서가 바로 옆방에 있었는데 사건 이후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식구 중 어느 누구도 한 줄의 유서나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이기붕의 집
    이기붕 집 터에 건립된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기념도서관은 경교장이 있는 강북성심병원과 연접해 있으며 경교장 위쪽으로는 2017년 9월, 서대문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개장했는데 옛 새문안동네를 '서울형 도시재생' 방식으로 개조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는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이 재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기존 가옥 63채 가운데 총 40채가 활용되었다. 나머지 집들은 헐어 중앙 광장을 조성했는데 문화공연이 자주 개최된다. 하지만 활성화되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돈의문 박물관 마을의 옛집

     

    '임오군란의 현장 서대문 천연정과 청수장'에서 일차 언급이 있었지만 4.19혁명기념도서관 · 적십자병원 부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경기감영이 있었다. 감영은 해당 도의 행정, 군사 등에 관한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관찰사(감사)가 있는 곳으로, 관찰사는 부윤(시장), 목사, 대도호부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을 예하에 거느렸고, 감영(監營)에는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육방(六房)을 두고 해당 도를 다스렸다. 육조(六曹)의 지방판인 셈이었다.

     

    경기감영은 현재의 경기도청에 해당되고, 경기감사는 경기도지사에 해당되나 지금의 경기도지사보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경기감영은 1896년(고종33) 8월, 13도제(道制)가 시행되면서 수원으로 옮겼는데 정조시대 만들어진 수원행궁 터에 감영이 자리했다. 이후 한양 경기감영 자리에는 광무 7년(1903년)에 한성부(서울시청)가 들어섰던 바, 아마도 근대서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듯하다.   

     

    ※ 경기감영과 한성부의 혼란

     

    서울은 그 전에는 4대문 안만이 서울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확장되어 한성부의 권한도 따라 확장되었으나 경기감영과의 부처 개념이 모호할 때가 많았다. <대한매일신보>에 1910년 7월 10일자에 실린 "경기도에 수원관찰부가 있고 또 한성부가 있는 것이 행정상 불편하다 하여 내부에서는 한성부를 폐지하고 (수원)관찰부를 경성에 두려고 지금 준비 중인데 수원관찰부를 옮길 기한은 본년 말이나 되리라더라"는 기사는 이를 대변하다.

     

    실제로도 경기도청은 이후 서울 광화문 앞으로 옮겨져 오랫동안 존속되었는데, 나도 어릴 적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치안본부로 쓰일 때의 기억일 터이다. (광화문 앞 경기도청은 1967년 다시 수원으로 옮겨가고, 1970년 12월부터 1986년 8월까지는 내무부 치안본부 건물로 쓰였다. 입구 경비가 삼엄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지하철 서대문역 4번 출구 근방의 경기감영 터 표지판
    1903년 경기감영 자리에 들어선 한성부
    1909년 옛 의정부 자리에 서양식으로 건립된 경기도청
    경기도청의 위치 / 1946년 미 군정청(1945~1947)으로 쓰일 때의 사진이다.
    경기도청은 의외로 오래 건재했으니 1986년까지 광화문 앞에 있었다. /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옮겨간 후 내무부 치안본부, 서울시 경찰국 별관 등으로 쓰이다가 철거되었다. 왼쪽 첨탑 건물은 한국일보사 사옥이다.
    경기도청사 구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효원로 1에 위치한 경기도청사 구관은 2017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967년 6월에 준공되어 이후 광화문에 있던 도청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당시의 경기도청사 / 지금은 2021년 신축된 광교 신청사로 이관되었다.
    개화기의 서대문 경기감영지 / 중앙에 정문인 포정문과 그 왼쪽으로 선화당 지붕이 보인다. 포정문 옆 긴 건물은 경성감옥 분관, 그 위가 돈의문이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서양식 건물은 애스터하우스 호텔과 프랑스공사관이다.
    개화기의 돈의문 성곽. 오른쪽에 프랑스공사관이 보인다.

     

    경기감사가 근무하던 경기감영 정청(政廳) 건물은 선화당(宣化堂)으로 불렸으며 이는 팔도 정청의 명칭이 모두 같았다. 선화당을 비롯한 경기감영의 전각 중 지금 남은 것은 없고 선화당 현판만이 전하는데,(추정) 같은 자리에 실물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원주의 강원감영 선화당에서 서울 선화당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울러 리움박물관의 '경기감영도'에서도 감영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 역시 추정되는 그림이나 경기감영이 틀림없을 것이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 / 위키백과 사진
    경기감영도(부분)
    경기감영도(전체) / 19세기에 그려진 135.8x442.2cm의 12폭 병풍이다.

     

    1896년 이후 서대문 경기감영 터은 한성부 외에도 1900년대 초에 징상평양대(徵上平壤隊, 평양에서 올라온 진위대대)가 주둔하였고, 관립 경교보통학교(京橋普通學校)가 설립되었으며, 1914년부터는 고양군청 청사 및 마포 경성감옥의 분감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형태가 유지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1921년 서대문 경찰서가 신축되고 1923년 적십자병원 간호부양성소와 적십자진료소(1926년 일본적십자 조선본부병원으로 개칭됨)가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교란되었다. 선화당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는 1980년대 유석당빌딩과 박영빌딩이 들어서며 원지형을 완전히 상실했다.  

     

    경기도청 상상도 / 가운데 건물이 정청인 선화당이고 왼쪽 문이 정문인 포정문이다.

     

    감영 앞으로는 만포천이 흘렀는데 그 만포천에 놓인 다리가 경교(京橋)로 위의 경교장 명칭은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경교는 감영 창고인 경영고(京營庫) 근처의 다리라는 뜻으로서 원래는 경고교(京庫橋)이나 줄여서 경교가 되었다. 이는 앞서 말한 종침교가 종교가 된 것, 자수교가 자교가 된 것과도 유사하다. 경교는 경기감영 입구에 있었다 하여 경구교(京口橋), 혹은 경영고(京營橋)라 불려진 기록도 있다. 만포천에 대해서는 앞서 '만초천 청파교와 캠프킴 내의 일본 다리'에서 자세히 더듬어 본 바 있다.

     

     

    ▼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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