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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초천 청파교와 캠프킴 내의 일본 다리
    서울의 다리 2022. 11. 17. 02:10

     
    만초천(蔓草川)은 지금은 생경한 이름이지만 1960년대까지도 서울 서쪽을 가로질러 흐르던 큰 하천으로, 서울역사편찬원에서 펴낸 <서울지명사전>은 만초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
     
    서대문구 현저동 무악재(길마재)에서 발원하여 서대문 사거리, 서울역, 서부역, 청파로, 원효로를 따라 원효대교 지점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줄기로서, 옛날 이 냇가에 만초(덩쿨이 무성한 풀)가 무성하였다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넝쿨내, 만천, 무악천, 욱천이라고도 하였다. 길이는 7.7㎞이고 유역의 폭이 매우 좁은 장방형이며 중, 하류로 내려오면서 점점 넓어져 호리병 형상을 하고 있는데, 1967년 이후 복개가 시작되어 지금은 물줄기를 찾을 수 없다. 욱천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 고종대에 편찬된 서울 지리지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도 설명은 비슷하다.
     
    경성 서쪽 모악(母岳)에서 발원하여 성을 감싸고 돌아 남쪽으로 흐르며, 반송방(盤松坊)의 혁교(革橋)와 돈의문 밖 경영교(京營橋, 경교), 소의문 밖 신교(新橋)와 이교(圯橋, 헌다리), 숭례문 밖 염초청(焰硝廳), 청파 남쪽의 주교(舟橋, 배다리)를 거쳐 만초천을 이뤄 서남으로 흘러 용산강(龍山江)으로 들어간다.
     
     

    19세기 《경조오부도》에 표시된 만초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물줄기는 꽤 장하였던 듯, 고려 말의 학자 목은 이색은 만초천에서 불을 밝혀 민물 게잡이를 하는 풍경을 '만천해화'(蔓川蟹火)라 이름 짓고 남경팔경(南京八景) 중의 하나로 꼽았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초 태종이 이 만초천을 한강의 조운로(漕運路)와 연결되는 운하로 만들려 했다는 사실인데, 욕심은 꽤 있었으나 왕궁과 도로 건설 등 국초의 기반 공사가 너무 많아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 만일 그때 운하가 건설됐다면 서울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을 뿐더러 운하의 새벽 물 안개가 도심을 적시는 운치 있는 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만초천은 복개되어 물줄기를 전혀 찾을 수 없고 용산 미8군 영내에 130 미터 정도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물줄기를 서소문동에 있는 주상복합아파트 건물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 지도는 한 일본인이 복개되기 전의 만초천을 표시한 것으로 아래쪽 만초천 줄기에는 서소문아파트라는 표시가 있다. 마포 쪽 만포천을 먼저 복개하고 그 위에 길이 120여 미터의 아파트를 건립한 것인데 그로 인해 활처럼 휜 서소문아파트가 생겨난 것이다.
     
    *  1972년에 건립된 서소문아파트는 만초천 하천의 곡선을 따라 지어진 까닭에 어찌 됐든 당시에는 파격적인 형식미를 갖춘 건물로 자리하게 되었다. 아울러 요즘의 주상복합아파트(1층은 상가, 2층 이상은 주택) 형식을 취해 생활이 편리했으므로 부자와 연예인이 많이 입주했고 까닭에 '연예인 아파트'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하천 위에 지어진  까닭에 홍제천 위에 지어진 유진상가, 도로 위에 지어진 낙원상가아파트 등과 더불어 대지지분이 없는 건물이 되었다. 그런데 이 아파트가 지어질 때와는 달리 건축법이 바뀌어 지금은 하천 위에 건물을 짓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재개발·재건축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10년간 단 1건의 매매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교통이 편하고 값이 싸 전·월세는 꾸준하다고.
     
     

    위가 만초천, 아래 구부러진 길이 서소문아파트다
    만초천을 따라 휘어진 서소문아파트
    서소문로에서 본 서소문아파트
    미8군 내의 만초천 지류

     
    만초천의 흔적은 또 숙대입구 역 부근의 갈월동 지하차도와 갈월동 굴다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전 쌍굴다리와 굴다리로 불린 이 다리는 모두 만초천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긴 것이었다. 즉 일제시대의 전차와 경부선 열차가 그 위로 지나갔던 것인데, 그것이 고착화돼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아울러 갈월동 지하차도를 나와 서울역 쪽으로 올라가 만날 수 있는 청파로 319 세계평화통일가정본부(구 통일교 본부) 앞 '청파 배다리 터' 표석 역시 만초천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갈월동 지하차도
    갈월동 굴다리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 속의 만초천 물길 / 위쪽 동그라미가 갈월동 지하차도이고 아래쪽이 갈월동 굴다리다.

     
    즉 예전에는 청파로 길을 따라 만초천이 흘렀던 것이니, 성현(成俔)의 문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 '청파석교기'(靑坡石橋記)에는 연산군 시절 이곳에 처음 돌다리가 놓였다고 기록돼 있다. 표석에도 조선시대 돌다리 터라고 돼 있는데 그러면서도 '청파 배다리 터'라고 표시된 이유는 정조임금이 화성 능행길에 이곳에 배다리를 놓아 하천을 건넜기 때문일 터이다. 숭례문을 나와 만포천을 건넌 정조임금 일행은 용산강(한강)으로 가 다시 노량진까지의 긴 배다리를 설치했다.(☞ '정조가 설계한 배다리와 용양봉저정')
     
    원래의 자리를 좇자면 청파교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300미터 정도 북쪽 물길 굽어지는 자리(현 서계동 한화빌딩 부근)에 놓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선전도》 속의 청파 배다리(●)
    청파교 표석

     
    놀라운 것은 일제시대 일본군이 만초천의 지류에 건설했던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의 교명주(橋名柱, 다리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가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코바야카와'는 임진왜란때의 선봉장 가운데 한 명인 코바야카와 타카가게(小早川隆景)를 말함이다. 그에 대해서는 앞서 '벽제관 전투와 용산의 왜·명 강화비'에서 말한 바대로 벽제관전투에서 명나라 이여송의 부대를 박살 내 명나라 군대를 다시 북쪽을 내몬 자이다. (하지만 행주산성에서 대패했다)
     
     

    코바야카와 타카가게(1533~1597)

     
    이 다리는 일찍이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그 존재를 밝혔다. 잘 알려진 대로 얼마 전 우리에게 반환된 용산미군기지는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코바야카와교는 20사단 보병 17연대 병영 입구에 있었다. 일본군들은 당시 용산 주둔지 내에 이와 같은 일본식 이름을 여기저기 갖다 붙였는데, 그 망동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확인한 바 있다.
     
    융경산(隆景山, 타카가게야마) · 사방견산(四方見山, 시호미야마) · 선견산(船見山, 후나미야마) · 월견대(月見台, 츠키미다이) · 용대(勇台, 유다이) · 하강(霞ケ岡, 카스미가오카) · 학강(鶴ケ岡, 츠루가오카) 따위의 지명이다. 일본군이 붙인 지명은 아니지만, 만초천은 욱천(旭川, 아사히 가와)으로 불렸는데 해방 후에도 한동안 그렇게 불리다 1970년대 초 복개되며 사라졌다.  
     
     

    민족문화연구소가 확인한 코바야카와교 교명주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수록된 코바야카와교
    위의 사진이 실린 기고문

     
    용산미군기지 내에서는 캠프 킴(CAMP KIM) 동남쪽 담장의 모서리 기둥 역할을 했다. 캠프 킴은 미8군의 보급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유명한 8군 무대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2년 전 국방부가 반환받은 캠프 킴 부지는 지금 철거가 한창인데, 얼마 전 지나는 길에 일견해보니 옛 출입문과 입구 쪽의 건물 2동을 제외하고는 건물부터 담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헐려 철거된 폐기물만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코바야카와교 교명주가 있던 곳도 다를 게 없었다. 
     
     

    캠프 킴 출입구
    철거 중인 캠프 킴 내 건물

     
    ※ 2024년 1월 22일 전쟁기념관을 다녀오다 캠프 킴 쪽을 보았다. 캠프 킴 기지는 아직도 철거 중인 듯했는데, 앞서 둘러졌던 황색 천 가림막이 흰색 철판 펜스로 바뀌어 있었고, 또 뒤로 약간 물러난 듯 보였다. 혹시나 해서 길을 건너 보았다. 그리고 전에 보지 못했던 코바야카와교 교명주를 곧바로 발견했다. 반가웠다. 생각해보니 이 교명주는 앞서 설치됐던 황색 천 가림막 안에 가려졌던 것 같다. 전에는 아래의 긴 축대도 가림막 안에 있었다. 
     
     

    발견된 코바야카와교 교명주
    전쟁기념관 쪽으로 찍은 사진
    자이아파트 방면
    위는 이렇게 생겼다. 손이 많이 간 교명주임을 알 수 있다.
    교명주로부터 축대가 이렇게 이어진다.
    반대쪽으로 찍은 사진 / 예전에는 이 축대 아래로 코바야카와 가와로 불리던 만초천 지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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