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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전교 / 청계천 다리의 대표적 엉터리 복원
    서울의 다리 2022. 7. 14. 23:59

     

    청계천의 첫 다리인 모전교는 청계천에 걸쳐 있는 22개 다리 중 가장 엉터리 복원된 경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사진에는 분명 평교(平橋) 형식의 돌다리였음에도 궁궐 금천에나 놓였을 법한 휘황찬란한 다리가 놓였기 때문이다. 보다 멋있는 다리를 만들겠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혼자 따로 노는 까닭에 볼수록 안습이다. 그래서 과정을 알아보았더니 과연 사연이 있었다. 중앙일보 2005년 3월 18일 자 기사에서 밝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복원된 모전교의 차도와 인도
    모전교 인도교
    반대 방향에서 본 모전교 인도교

     

    ▼ 기사 내용의 축약

     

    완공 예정의 청계천 모전교가 이명박 서울시장의 지시로 모양을 바꿔 새로 만들게 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명박 시장은 8일 청계천 복원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모전교 하단 아치의 곡선미가 떨어져 청계천 시점부 첫 교량으로의 상징성이 약하다"며 설계를 변경해 재시공토록 지시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모전교의 실제 모습이 설계도면· 조감도와 차이가 있어 보이고 너무 밋밋한 감이 있어 이 시장이 복원공사 완공 전에 시정토록 한 것"이라고 부언 설명을 했다.

     

    그러나 현장 관계자는 "시공은 설계도면 ·조감도대로 이뤄졌으며 전면 재시공을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며 "별 다른 대안이 없지만 일단 16일부터 재시공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모전교는 다른 곳에서 만들어와 현장에서 조립하는 조립형 교량이 아니라 기초부터 만들어나가는 현장 시공방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아치 부분을 재시공하려면 이미 만든 부분을 상당 부분 잘라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상 다리 설계부터 시공까지 새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설계변경과 재시공에 들어간 청계천 모전교 / 중앙일보
    모전교의 위치

     

    이렇게 되자 '올바른 청계천 복원을 위한 연대회의'에서는 "청계천과 교량은 이 시장의 사유물이나 공적이 아니라 서울시민 모두의 자산"이라며 "본인의 미적 관점과 맞지 않는다고 재시공을 지시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발상"이라는 지적이 나왔고, 또 이에 앞서 한겨레 신문은 2004년 11월 문화재 연구가인 이순우씨가 국립중앙도서관의 자료들을 뒤져 모전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발굴해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한겨레> 2004년 11월17일자 1·10면). 

     

     

    1937년 일본의 문화재 기술자 스기야마 노부조(杉山信三)가 찍은 모전교 사진 / 한겨레 신문

     

    이렇듯 진실이 표면화되자 당시 이명박 시장은 "이번에 공개된 옛 다리 사진들에 대해 전문가들로 하여금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도 있다. 그러나 정작 청계천 완공일이 다가오자 서울시는 "사진이 발굴됐을 때는 이미 모전교 하부 기초공사가 완성된 상태였으며 사진에만 의지해 다리를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조선건축양식에 근거, 창덕궁 금천교의 양식을 도입해 아치교 형태로 건설했다"고 발뺌하였고, 결국 위의 가짜 모전교를 완공시켰다.

     

    '노가다' 시절 이명박 시장의 주특기였던 밀어붙이기식 시공이 청계천 다리 공사에도 통용되었음이다. 이에 모전교는 옛 모습이 아닌, 그리고 서울시에서 밝힌 창덕궁 금천교 양식도 아닌, 경복궁 영제교 난간과 상판에 유럽 스타일 아치형 다리를 가진 그로테스크한 모양으로서 공사 개시 14개월여 만인 2005년 9월 30일 준공되었다. 삼성건설과 대림산업이 건설을 맡았고 30여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신한은행에서 20억 지원) 

     

    규모는 길이 19.5m, 폭 27.3m로 청계천 22개 다리 중 가장 짧은데, 양 옆의 2개 인도와 차도를 함께 만든 까닭에 길이보다 폭이 훨씬 넓다. 그리고 인도와 차도를 확연히 구별한 까닭에 사람들은 차도는 다리가 아니 줄 알지만, 차도 또한 모전교의 일부이다. 아무튼 복원된 모전교는 아래 저래 이상하다.

     

     

    광통교에서 바라본 모전교

     

    지금 모전교 옆에는 광통교가 가까이 붙어 있는데, 앞서 '광교와 광통교는 같을까, 다를까?'에서 말한 것처럼 본래 신한은행 본점 앞에 있던 광통교가 교통량의 하중을 견딜 수 없기에 위쪽 150m 지점으로 옮겨 복원된 것이다. 이에 두 다리가 매우 가깝게 붙게 돼 볼품 사납게 되긴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였다 하겠다. 다만 늘어난 강 폭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옛 다리와 현대식 다리가 이어진, 이도 저도 아닌 희한한 다리가 생겨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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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모습으로 연결된 다리 / 광교 쪽
    이상한 모습으로 연결된 다리 / 청계광장 쪽

     

    반면 모전교의 첫 설계도면은 인도를 따로 구분해 되도록 과거의 형태를 살리는데 맞춰졌고 시공도 그렇게 했다.(중앙일보 사진 참조) 게다가 청계천의 첫 다리로 출발하는 까닭에 폭도 좁게 맞출 수가 있었다. 따라서 마음만 먹었다면 옛 사진을 기초로 해 조선시대의 모전교를 그대로 재현할 수도 있었지만, 그저 멋있는 다리를 선호한 탓에 지금의 그로테스크한 다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현재 과거의 모습이 확인된 청계천의 다리는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교의 8개이다. 하지만 이중 옛 모습대로 복원된 다리는 하나도 없다. 모두 늘어난 강 폭으로 인해 길이가 맞지 않기 때문이었으니 현재 장충단 공원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수표교마저 옮겨올 수 없어 지금의 목교(木橋)가 놓였다. 그래서 나는 모전교가 부활하지 못한 것이 더욱더, 그리고 두고두고 아쉽게만 여겨진다.

     

    형태가 확인돈 청계천의 옛 다리들 / 하지만 이중 옛 모습대로 복원된 다리는 없다.

     

    모전교 부근에는 과거 과일을 팔던 과전(果廛)이 있었다. 과전은 다른 말로 모퉁이 가게라는 뜻의 모전(한문으로는 隅廛)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것이 소리값만 같은 모전교(毛廛橋)로 변화되었다. 문헌에 따라서는 본래 청계천에 있던 다리는 '웃모전교'라 부르고, 남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창동천 위의 다리는 '아래모전교'라 불렀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통상 '웃모전교'는 모교(毛橋), '아래모전교'는 무교(武橋)라 불려졌다고 말하는데, 신빙성이 있다. 

     

    무교로 불린 이유는 그 위쪽에 조선 시대 무기와 군수물자를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군기시가 있었던 까닭이다.(현재의 서울신문사·프레스센터 빌딩 부근) 또 그와 같은 연유로서 조선시대 이곳은 용산강 새남터, 서소문 밖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형장으로 쓰였으며, 주로  급히 처형해야 할 죄인이 이곳에서 참수됐다고 한다.

     

    오늘날의 무교동(武橋洞)이라는 지명은 이 다리에서 유래했다. 즉 무교로 불린 '아래모전교'가 현재 모전교 모태라 할 수 있겠는데, '웃모전교'와  '아래모전교' 모두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청계천을 복개할 때(태평로에서 무교동 사거리 지점까지) 사라진 것으로 짐작된다. 2005년 복원 당시 차도 양쪽으로 인도를 두었던 까닭에 그 두 인도교가 '웃모전교'와 '아래모전교' 의 복원으로 착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저 우연의 일치이다.  

     

     

    아래에서 본 모전교
    복원된 모전교는 인도와 차도의 교각 곡률(曲率)도 다르다. 이 또한 엉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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