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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교와 광통교는 같을까, 다를까?
    서울의 다리 2022. 2. 24. 02:14

     

    광교와 광통교는 같을까, 다를까? 대광통교(大廣通橋)는 또 뭘까? 청계천을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을 아니 가질 수 없다. 분명 광교를 지났는데 비슷한 이름의 광통교가 다시 나오고, 또 대광통교라는 말도 심심찮게 쓰이기 때문이다. 이 의구심을 부추기는 것이 광교 옆 신한은행 본점 입구에 있는 옛 광통교 표지석와 광통교 모형이다. 거기에는 분명, 서울 정도 500년을 기념해 그 4분의 1로 축소해 복원해놓았다고 쓰여 있음에도 서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청계천 시작점에서 곧바로 광통교를 만나게 된다. 

     

     

    신한은행 앞 광통교 미니어처와 표지석
    신한은행 건물과 광교
    광교와 광통교는 같을까, 다를까?

     

    광교(廣橋)의 의미는 '넓은 다리'이다. 이 말은 틀림이 없으니 길이(12.3m)보다 폭(14.4m)이 더 넓은 흔치 않은 다리다. 반면 광통교(廣通橋)는 '넓이'보다는 '통행량'이 강조된 의미로 들린다. 실제로도 그러하니 광통교는 광통방(廣通坊)에 있는 큰 다리라는 뜻의 대광통교(大廣通橋)의 줄임말이다. 이렇게 보면 광교와 광통교는 흡사 다른 다리같다. 그리고 위의 조형물을 보더라도 두 다리는 상이한 다리로 여겨지니 광교는 지금의 광교 자리에 있던 아래의 다리이고,↘

     

     

    광교 신한은행 앞에 1/4로 복원된 다리

     

    ↖청계광장 쪽에 있는 다리는 광통방에 있던 광통교처럼 여겨진다. 근방에 있는 안내 표지판도 광교와 광통교를 구분하고 있는 까닭에 광교와 광통교를 상이한 다리로 여기지 않을 재간이 없다. 하지만 계속 이런 얘기를 떠들면 더 헷갈리듯 하니 이만 결론을 내릴까 한다. 두 다리는 같은 다리로서, 1958∼1961년에 걸쳐 청계천이 복개될 때 묻혔던 다리가 2003년 이명박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공사 때 다시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 세상이 변해 본래의 광교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청계광장 쪽에 어정쩡하게 복원된 것이다.  

     

     

    청계광장 쪽에 복원된 다리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기 전 청계천 암거공사(暗渠工事)에 묻힌 어둠 속 광통교의 적외선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그 자리는 필시 지금의 광교 아래였겠지만 이후 이명박 시장 시절, 복원 프로젝트를 맡았던 대림산업과 삼성건설의 관계자들은 그 자리에 복원시키지 못했다. 그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현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니, 그 자리는 과거와 달리 사람보다는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이 됐고, 그리하여 예전의 폭과 기둥으로는 지금의 어마어마한 교통량과 하중을 감당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서쪽으로 155m 밀려나 인도(人道)로서 자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그 어정쩡한 복원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니, 우선은 옛 광통교와 생뚱맞은 교량 하나를 이어 붙인 게 정말로 네맛도 내맛도 아니다. 예전에는 청계천 물길이 넓은 곳도 있고 좁은 곳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수표교 쪽은 넓었고 광통교 쪽은 좁았다. 그런데 지금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폭의 구간이 이어지니 광통교 쪽은 결국 다리를 이어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상한 모습이 됐다. 옮겨 복원한 것까지야 이해되지만 이 이상한 모습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상한 모습으로 연결된 다리 / 청계광장 쪽
    이상한 모습으로 연결된 다리 / 광교 쪽

     

    그리고 이어붙인 교량 쪽으로 수로를 만들어 예전에 물이 흘렀던 광통교는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 다리가 됐다. 그러한 까닭에, 청계천의 복원 설계에 있어 좀 더 고증에 충실했더라면 지금의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볼 때마다 새록새록하다. 다만 한 가지 좋은 것도 있으니 광통교 교각 양 벽면에서 조선 초 옛 정릉을 장식했던 병풍석과 우석(隅石, 병풍석 사이를 잇는 돌)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종의 기원(III)ㅡ기구한 운명의 흥천사 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광통교 건설에는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묘를 장식했던 돌들이 사용됐다. 부인 강씨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던 이성계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을 소집해 정교한 조각과 아름다운 문양을 새긴 돌들로써 무덤 주위를 장식하게 하였던 바, 그와 같은 세련된 문양의 돌들은 이후 왕들의 능묘에서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신덕왕후 강씨와의 관계가 무지무지하게 나빴던 이방원은 광통교의 축조에 그녀의 무덤인 정릉의 돌들을 사용케 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스틸컷

     

    실록에는 "의정부에서 계(啓)하기를 '광통토교(土橋)는 비가 오면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의 옛 석물을 이용하여 돌다리[石橋]를 만들고자 합니다' 라고 건의하니 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했지만, 이것이 이방원의 의중임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리 축조에 사용된 석물 중에 덩굴무늬 가운데에 보관(寶官)을 쓴 신장(神將)이 거꾸로 자리하고 있는 것 또한 이방원의 의중을 헤아린 석공들의 자발적이고 고의적인 의도임 또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광통교 다리 아래
    거꾸로 처박힌 신장석
    광통교 축조에 사용된 정릉의 석물들 / 보관을 쓴 신장, 불교 용구인 금강저와 요령 등 고려시대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릉의 석물은 기둥에도 사용됐다.
    개성 공민왕릉의 병풍석 / 정릉은 공민왕릉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분명 이와 같은 시류를 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언급하는 자들은 없었으니 광통교나 부재(部材)의 미적 요소에 관한 글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토목국 촉탁(囑託)으로 일하던 오카타 미츠(岡田貢)는 자가 이를 주목해 《경성토목협회보》에 글을 올렸다. 광통교에 새겨진 조각은 서울 안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는 수작(秀作)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그럼에도 역사성으로나 미술사적으로나 문화재의 가치가 있는 이 다리는 여전히 문화재 지정 논의에서 배제돼 있다. 그 복원이 서툴렀던 탓이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기수(技手) 스기야마 노부조(杉山信三, 1906-1997)가 찍은 1930년대의 광통교
    성북구 정릉동의 신덕왕후 릉
    이곳 석물의 대부분은 현종 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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