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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서 가장 긴 다리 전곶교(살곶이다리)
    서울의 다리 2022. 2. 20. 05:35

     

    중랑천 箭串橋를 과거에는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하다. 串의 독음이 '관'과 '곶'의 두 가지이기 때문인데 아마도 전곶교로 읽혔을 것이다. 串이 지명으로 쓰일 때는 대개 '곶'으로 읽히는 까닭이니 강화도 갑곶(甲串)은 그 대표적인 용례이다. '서울지명사전'과 '위키백과'에서도 전곶교을 손을 들어준다. 

     

    그런데 근방에 있던 조선시대 한양 주변 4대 역참(驛站) 중의 하나인 箭串院은 전관원으로 읽힌다. 광희문 밖 전관원은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과 더불어 한양의 역참을 대표하는데, 그것은 한 번도 전곶원으로 불린 적이 없다. 그래서 箭串橋의 독음은 앞서 말한 강감찬,(or 감한찬)의 邯 및 <자산어보>(or <현산어보>)의 玆와 더불어 당분간은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다.

     

    하지만 독음에는 어려움이 없으니, 그것을 대신에 살곶이다리라고 부르면 무리가 없다. 실제로도 중랑천의 그 다리는 전곶교보다는 살곶이다리라는 말로 더 많이 불렸을 것이다. 그곳 중랑천의 옛 지명이 '살곶이 내'여서이니 다리의 이름은 통상 그 다리가 걸린 물길의 이름을 따름이 통례이다. 

     

     

    눈 내리는 살곶이다리
    보물 & 사적 표지석과 수습된 다리의 부재
    멀리서 본 살곶이다리

     

    '살곶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화살이 꽂혔다'는 뜻이다. 그 말이 연유되게 된 스토리로서 두 가지가 전하는데, 첫째는 함흥에서 돌아온 이성계가 중랑천까지 마중 나온 (미워하는 자식) 태종에게 쏜 화살이 실패하여 다른 곳에 꽂히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매사냥을 즐겼던 태종이 매사냥 터인 이곳에 자주 행차하여 화살을 쏘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출전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고 후자의 출전은 《태종실록》이다. 나는 후자를 믿는 편으로, 매사냥 터로 유명했던 일대가 매봉산(응봉)의 이름으로 남아 있고, 태조 4년 그곳에 해당 관청인 응방이 설치됐다는 기록 또한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요즘 뜨는 뷰 매봉산 팔각정에서 보는 한강

     

    이곳은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편리성이 주목된 곳으로, 《세종실록》에는 영의정 유정현과 건축기술자 박자청에게 세종이 특별히 술을 하사하고 살곶이 내[箭串川]에 다리 놓는 일을 독려하는 등의 애민정신이 드러나 있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고, 성종 13년(1482)에 이르러 스님들을 동원해 겨우 완공시킨다.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성종이 스님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며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명이 있다.

     

    하지만 '제반교'라는 명칭은 《중종실록》에 한두 번 거론된 것 외에는 나타나지 않는 바, 계속해서 살곶이다리라는 명칭이 우세했던 듯 보인다. 아무튼 완성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다리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기술력과 인력으로서 가로 기둥 4열, 세로 기둥 16열 총 64개의 돌기둥에 화강석 청판을 얹은 폭 6m, 길이 76m의 다리를 완성시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이 다리는 그만큼의 효용이 따랐으니 조선 500년 내내 한양과 남쪽 지방을 잇는 중요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조선 성종 때 완공된 이 다리는 내가 어릴 때에도 그 자리에 놓여 있었는데, 다만 그 모양이 반쪽씩 달라 의아해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연유는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분개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무리수를 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그렇다고 조선 500년 동안 백성들의 길이었던 다리를 뜯어 석재로 사용했다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으며, 또한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500년 동안 다니던 길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나 그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낭설일 가능성이 크다. 요즘 용어로서는 마타도어다. 살곶이다리는 잘 만들어진 돌다리로서 굳건하였기는 하나 큰물에는 때때로 무너지기도 하였으니, 근대의 기록으로는 1913년에 일제가 콘크리트로써 상판을 보강한 적도 있었고, 저 유명한 1925년의 을축대홍수 때는 다리의 중간 부분이 망실되었다. 이후 1972년 망실된 한쪽 구간을 콘크리트 교각과 상판으로 보강한 것이 어릴 적 내가 보았던 살곶이다리의 모습일 것이다.

     

     

    한강철교를 박살낸 을축대홍수
    을축대홍수에 잘려나간 살곶이다리

     

    일제는 이 다리를 대신해 1938년 그 옆으로 철근 콘크리트 교각인 성동교를 가설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간 사용해온 살곶이다리는 쓸모없게 되어버렸으니, (차마 없애지는 못하고) 1972년 반쪽씩 이상하게 복구된 형태가 최근까지 이어지다 2010년 정비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옛 모습으로 완전 복원되지 못한 채 콘크리트 교각 구간에 화강암 청판만 얹었던 바, 밑에서 보면 여전히 양념반 후라이드반이다.   

     

     

    성동교
    살곶이다리 옛 구간
    교각 이음새 구간
     양념반 후라이드반의 다리 
    한양대 쪽의 청판은 적어도 순조 때의 것이고
    뚝섬 쪽의 청판은 2010년 것이다.
    옛 구간의 다리 밑은 이러하다 / 결구가 짱짱함
    옛 다리를 건너는 어린이들 너머로 2호선 전동차가 지나가고 있다.
    아무튼 옛 모습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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