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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의 핫 플레이스 혜정교를 아시나요?
    서울의 다리 2022. 3. 3. 00:17

     

    혜정교(惠政橋)는 지금의 광화문우체국 옆에 있던 다리로, 중학천(中學川)을 가로질렀다. 중학천은 백악산 삼청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중학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삼청동의 동쪽을 흐른다 하여 삼청동천으로도 불렸다. 이 하천은 오래전 복개된 까닭에 혜정교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없고, 이렇다 할 사진조차 전하는 게 없다.

     

    하지만 뜻밖에도 혜정교 돌다리 부재의 일부가 탑골공원에 전하는데, 공원 안에 같이 있다가 종묘 앞으로 옮겨진 앙부일구(해시계) 받침대석 역시 본래 혜정교에 있던 것일 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알기 위해서는 <세종실록> 66권의 내용을 참고하는 편이 빠르다. 

     

     

    탑골공원 내의 다리 부재

     

    (세종 16년 10월 2일) 처음으로 앙부일구(仰釜日晷)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 설치하여 일영(日影)을 관측하였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김돈(金墩)이 명(銘)을 짓기를, "모든 시설(施設)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고, 지름에는 둥근 톱니를 설치하였으니 자방(子方)과 오방(午方)이 상대하였다.

     

    구멍이 꺾이는 데 따라서 도니 겨자씨를 점찍은 듯하고, 도수(度數)를 안에 그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요, 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각(刻)과 분(分)이 소소(昭昭)하니 해에 비쳐 밝은 것이요,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즉 새벽과 밤에는 4대문의 개폐를 알리는 타종에 의해 시각을 알 수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려우므로 세종 때 해시계를 처음 만들어 한양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혜정교 부근과 종묘 앞에 둔 것인데, 가마솥처럼 생긴 중앙에는 해그림자를 만드는 둥근 톱니를 두었고, 시계판에는 자방(밤 12시)와 오방(낮 12시)가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그리고  12지신의 몸을 그려 넣었으니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창경궁 앙부일구(仰釜日晷) / 앙부일구의 뜻을 풀이하자면 '하늘을 우러러보는(仰) 가마솥(釜)의 해 그림자( 日晷)'로서, 문자 그대로 솥에 비치는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끔 만든 시계이다.
    종묘 앞 앙부일구 대석
    1930년 발굴되어 탑골공원에 보존되다 2015년 종묘공원이 정비되며 현재의 자리에 놓여졌다.

     

    세종 때 만든 앙부일구(仰釜日晷)에 대해서는 앞서 '퇴보하는 우리의 천문과학 - 앙부일구에 얽힌 일화'에서 설명을 마친 바 있다.  그 앙부일구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기구의 과학적 우수성보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다. 그의 애민정신은 <세종실록> 77권에 다시 다음과 같이 강조된다.

     

    임금이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 낮밤과 기후를 측정하는 기구)를 만들기를 명하여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모두 네 벌[件]인데..... 하나는 천추전 서쪽에 놓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었다.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 가에 놓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놓았다.

     

    앞서 말한대로 그 혜정교가 어디인지는 남아 있는 사진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설(說)은 현 광화문 교보문고 옆과, 광화문우체국 앞과, 동아일보 앞이 있는데, 18세기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혜교(惠橋)라고 표시돼 있는 지점과 우포청(우 포도청) 앞에 있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혜정교의 위치는 지금 표석이 세워져 있는 교보빌딩 쪽이 아니라 길 건너 광화문우체국 옆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중학천이 청계천과 합류되기 전 지점에 놓인 다리'라는 구전(口傳) 및 '다리 옆에 우포청이 있었기에 포청다리라고도 불렀다'는 구전과도 부합된다.

     

     

    혜정교터 표석 / 「중학천 위에 놓였던 다리로 복청교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음」이라는 글귀가 써 있다. 길 건너 광화문우체국과 동아일보 사옥이 보인다.
    교보문고 쪽으로 찍은 사진 / 광화문비각이 보인다.
    《수선전도》의 중학천과 혜교(●)

     

    오래전 근방에 '복청(福淸)'이라는 유명 일식집이 있었다. 1924년 일제가 콘크리트 교량으로 고쳐지으며 일본식으로 개명한 다리 이름을 상호로 쓴 것으로, 지금도 혹간 복청교라는 지명이 쓰인다. 하지만 원래는 '혜정(惠政)'이라는 벨류어블(valuable)한 이름의 다리였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왜놈들에게는 그 이름이 거슬렸을 법하다) 그 뜻에 걸맞은 글귀가 지금의 표석에 써 있는 바, 다시 보자면 아래와 같다.

     

    중학천 위에 넣였던 다리로 복청교라고도 하며, 이곳에서 탐관오리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음.

     

    앞서 말한 대로 이 다리 옆에는 우포청이 있었다. 까닭에 탐관오리의 공개처형 장소로 선정된 것 같으나 실제로 형이 집행된 적은 없고, 대신 큰 솥을 내걸고 '팽형(烹刑)'의 흉내를 낸 적은 있다고 한다. 부패한 관리에 대해 삶아 죽이는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계도의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인데, 당사자는 이후 정말로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

     

    <법률저널>에 따르면, 이러한 가상 팽형에 처해진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 간주돼 장례도 치러지고, 호적이나 족보에도 죽은 사람으로 등재된다 하며, 먹고사는 일, 아이 낳는 일 등, 인간으로서의 삶은 당연히 영위할 수 있으나 아이를 낳아도 '살아 있는 시체'의 아이인 까닭에 사생아가 된다고 한다. (어쩌면 실제 팽형보다 더 잔인한 형벌인 것도 같다)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의 복청교 교명주(橋名柱)
    《법률저널》의 삽화. (하지만 이 같은 아치형 다리가 아니라 일반적인 보다리였다)

     

    요즘도 시행되었으면 좋을 법한 이 형법이 이후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구한말 조병갑 같은 놈의 잔혹한 가렴주구는 결국 동학농민난을 불렀고, 그것은 결국 청·일(淸·日)을 불러들여 망국을 재촉하게 되었다. 조병갑은 탐학도 문제거니와 망국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한 놈인지라 그 죄는 백 번을 죽어도 씼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공무원의 부정부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쇠망의 길을 제공하는 바, 새로 단장되는 광화문 대로에 큰 쇠솥 하나가 걸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탐관오리 조병갑
    1904년 5월 6일 창덕궁 주합루에서 열린 러일전쟁 승전 축하행사 사진
    주한 외국사절은 물론 대한제국 고위 관료도 참석한 이 자리에 조병갑의 얼굴이 보인다. 조선의 망국이 시작된 듯하다. / 천지일보 사진

     

    백악산 중턱에서 발원한 중학천 물줄기는 아래 사진처럼 경복궁 건춘문을 끼고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되었다. 이 하천은 1965년 이미 복개되었는데, 이명박 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하며 중학천도 복원하자는 소리가 있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없던 말이 됐고, 최근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으로 하천 일부만을 상징적으로 복원했다. 물론 인공수로이다. 그래서 지금은 겨울이라 물을 막아두었지만 물이 흐르는 계절에는 제법 운치 있다.

     

    예전에 이 물길 위에 혜정교가 있었다. 다리는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돌다리였으나 육조거리와 궐외각사와 육의전과 청계천을 이어주는 다리로, 한양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은 곳이었고, 거기에 공중시계까지 설치된 그야말로 조선의 핫 플레이스였다. 

     

     

    경복궁 건춘문 앞의 중학천
    경복궁 동십자각 앞의 중학천
    일제에 의해 도로가 넓혀지며 경복궁 서쪽 망루인 서십자각은 사라지고 동쪽 망루 동십자각은 도로로 둘러싸인 섬이 됐다.
    광화문 앞으로도 중학천이 흘렀을까?
    그렇지 않다. 이 사진은 1930년 일제에 의해 광화문이 경복궁 동쪽 담장으로 옮겨졌을 때 찍은 것이다. 사진 속 다리는 염상섭의 《삼대》에서 언급된 종친부 다리이다. (건너편에 종친부가 위치한다)
    복원된 중학천 / 지금은 약식으로 짧게 복원되었지만 중학천은 동십자각에서 곧장 이곳 교보빌딩 뒤로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되었다.
    일부 복원된 중학천 석축 유구
    1965년 중학천 복개 당시의 사진 / 천지일보 사진
    경복궁 건춘문 앞의 중학천 돌다리 / 우포청 앞 혜정교도 이 같은 평교(平橋)였다.
    혜정교는 길 건너 왼쪽 버스 지나가는 곳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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