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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동의 총성과 신교파출소와 신교서울의 다리 2022. 3. 22. 01:37
앞서 말한 자수교가 자수궁과 경복궁을 연결하기 위해 만든 다리라면 신교(新橋)는 선희궁(宣禧宮)과 육상궁(毓祥宮)*을 연결하기 위해 만든 다리였다. 까닭에 같은 백운동천(白雲洞川)을 건너는 다리라 해도 만든 시기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자수궁은 세종의 후궁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궁이니 다리 역시 국초(國初)에 만들어졌겠으나,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를 모신 사당인 만큼 다리 역시 조선말에 만들어졌다.
*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빈이씨나 숙빈최씨나 모두 정비(正妃)가 아닌 까닭에 종묘에 배향되지 못하고 따로 사당을 지어 제사 지냈는데, 영조는 선희궁과 육상궁, 두 사당의 참배의 편리를 위해 새 다리를 건설한 것으로 전해온다.
따라서 김정호가 만든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그 위치가 표시돼 있으나, 그에 앞서 저술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인왕산 아래 백운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동남으로 흘러 자수궁교(慈壽宮橋)와 금청교(禁淸橋)를 지난다'라고만 설명돼 있고 신교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신교는 <한경지략>이 저술된 1830년부터 <대동지지>가 제작된 1864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다리 이름 역시 '새로 만든 다리'라는 뜻으로 붙여진 듯하다.
지금의 신교동 명칭은 이 신교의 이름을 빌려 명명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 때 이 지역 동 이름이 생겨날 때는 지금의 신교동은 물론이요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등 지역을 전부 아우렀다. 이후 여러 동이 분화하며 신교동은 축소되었으나 '신교'라는 이름은 여러 곳에 남았던 바, 효자동 행정복지센터 옆의 신교파출소와 맞은편 신교소방서는 대표적이다.
신교파출소는 청운파출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언제, 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979년 10월 26일까지는 분명 신교파출소였다. 내가 날짜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날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을 때, 가장 먼저 신고 전화가 접수된 곳이 바로 궁정동 안가 입구에 위치한 신교파출소라는 기사를 본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생생하니, 그 일은 현대사에 있어 정말로 큰 사건이었다.
당시 죽은 차지철의 명언 대로 '각하가 곧 국가'이던 시절에 각하가 급사했기 때문이다. 18년 동안 권력을 잡았던 독재자가 쓰러졌으니 모두 서울의 봄이 오리라 여겼지만 역사는 뜻밖에도 퇴행했다. 아무튼 역사적인 그날의 생생한 기억들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박흥주 대령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총을 김재규에게 건네 준 박흥주는 현역군인이기에 단심으로 사형이 확정·집행되었는데, 금호동 산꼭대기 12평짜리 집에 10월 27일 새벽 4시에 찾아와 잠자는 두 어린 딸의 볼의 입을 맞추고 갔던 그는 그것이 자식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육사 18기로 모든 면에서 동료들보다 뛰어났던 그는 그 때문에 김재규의 눈에 들어 중정(중앙정보부)에서 일했지만, 청렴 강직했기에 플루트를 불고 싶다는 딸의 소원을 끝내 들어주지 못했다.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절규하던 그 어린 딸의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을 때 경호동(棟)의 대통령 경호원(경호부처장) 안재송은 가장 먼저 반응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자유권총 부문에서 10위 안에 든 아시아 유일의 선수로써 대통령 경호실에 스카우트된 그는 가슴속의 총을 꺼내 25m 앞의 박카스 병을 맞히는 데 0.7초밖에 걸리지 않았던 속사수요 명사수였다. 그가 가슴속에 손을 넣었을 때, 그 자리에 같이 앉아 있던 김재규의 부하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이 준비하고 있던 총을 먼저 뽑아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며 외쳤다. "총 뽑지 마! 움직이면 쏜다!… 야, 우리 같이 살자!"
박선호가 같이 살자고 한 사람은 앞에 앉아 있는 정인형 경호처장과 안재송이었다. 박선호와 정인형은 해병대 간부후보생 동기로 둘도 없는 친구였고, 안재송 역시 해병대 간부후보생 출신의 아끼는 후배였다. 하지만 자신의 사격 솜씨를 믿은 것일까, 아니면 경호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함일까, 잠시 정인형과 눈을 맞추는 듯하던 안재송이 총을 뽑았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총을 들고 있는 사람보다 빠를 수는 없었을 터, 그는 곧바로 박선호의 총을 맞고 절명했다. 그 순간 총은 뽑은 정인형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각 안가의 주방에서도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경호관 김용섭과 경호실 김용태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여기서 내가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던 유성옥이다. 유성옥은 박선호의 승용차 운전기사였는데, 박선호의 직계부하인 궁정동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의 명령에 무장을 하고 있다가 명령에 따라 청와대 경호원 사살에 동참했다. 그는 법정에서 심경 및 범행에 참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시 그 상황이 와도 똑 같이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짤리니까요."
유성옥은 당시 36살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학교는 고작 중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으며 이후로는 미군부대 쓰레기 수거 등 생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산에 버려진 나무들을 주워 도시에 내다 파는 등짐장수를 했다. 남들이 힘들다고 하는 군대가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편안한 곳이었으니 적어도 뱃가죽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심각한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 제대해도 특별히 할 것이 없었던 그는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중사 예편 후 나름 운 좋게 중정 운전기사가 되었다가 거사에 가담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생계형 거사자였던 셈이다.
다시 신교로 돌아가 보면, 그 다리가 있던 곳에는 2017년 8월 신교 터 안내판이 세워졌다. 청와대 입구 효자로 건너편 새마을금고 앞 땅으로, 청운파출소와는 대각선으로 마주 본다. 그 안내판에는 옛 사진 및 다리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신교를 복원했을 때의 전경' 그래픽까지 2장 첨부했다. 그래서 백운동천이 복개되며 사라진 다리 중에서 가장 위치와 형태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다리가 됐다. 안내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신교는 청계천 발원인 백운동천의 상류에 있었던 돌다리이다.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화궁을 인왕산 아래 지으면서 놓았다. 1920년대 백운동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며, 난간석 6기가 청운 초등학교 내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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