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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자의 난과 자수궁과 자수교
    서울의 다리 2022. 3. 17. 05:09

     

    지난주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이성계의 7번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첫째 아들인 무안군 이방번이 이성계의 4남 이방간이 보낸 수하들에게 살해되는 장면이 나왔다. 강씨의 소생을 살려둘 수 없다는 이방간의 소신에 따른 일이었다. 그러자 이방원이 방간에게 아무런 힘도 무안군을 무엇 때문에 죽였냐고 항의하며 격하게 충돌하였다. 그러면서 2차 왕자의 난을 예고하고 있었는데, 이상은 제법 실록에 충실한 대목이었다.

     

    실록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이방석을 없앴지만 이방번은 살려 유배 보내는 인정을 기록하며, 무안군 이방번을 죽인 이방간을 나쁜 놈으로 치부했다. 그러면서 이방간과의 싸움인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의 정당성에 대한 명분을 제공한다. 아무튼 무안군 이방번은 형제들 간의 힘겨룸 속에 희생되는 비운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는데, 바로 그가 살았던 곳이 경복궁 서쪽의 자수궁으로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무안군의 살해를 명령하는 회안군 이방간
    이방간에 죽임을 당한 무안군 이방번
    뒤늦게 달려온 정안군 이방원
    애통해 하는 이방원
    종로구 옥인동 군인아파트 앞 자수궁 터 안내문

     

    실록에는 또 이곳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무안군(撫安君)의 예전 집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이름을 자수궁(慈壽宮)이라 하였으니, 장차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을 거처하도록 함이었다. 세종(世宗)의 후궁(後宮)이 빈전(殯殿)에서 자수궁(慈壽宮)으로 옮겨 들어갔다. (<문종실록> 1, 2권)

     

    세종대왕은 모든 면에 정력적인 사람이이서 소헌왕후 외 5명의 후궁 사이에서 22명(18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그런데 후궁들은 왕이 승하한 후에는 궁궐을 떠나야 했으므로 아들 문종이 그들을 위해 옛 무안군의 집 자리에 살곳을 마련해주었던 바, 그곳이 곧 자수궁이었다. 이후 이곳에는 성종의 얼굴에 스크래치를 내 쫓겨난 성종의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가 머물렀으며, 중종의 부인이었다가 폐비가 된 단경왕후 신씨가 살던 곳도 이곳이다. 단경왕후가 폐비가 된 사연은 앞서 '충암 김정(金淨)과 부인 송씨'에서 말한 바 있는데, 옮겨쓰자면 다음과 같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이른바 중종반정이 성공하여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곧 중종이었다. 이에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는 자연히 왕비(단경왕후)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단 7일만에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인데다 반정에의 가담도 거부하였던 바, 괘씸죄가 씌워져 처단되었고, 딸 신씨 역시 폐비되어 축출된 것이었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애뜻한 사랑의 전설이 전하는 인왕산 치마바위 계곡


    이 자수궁은 광해군 때는 왕궁으로서 중건되었지만, 이후의 기록은 복잡하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이라는 비구니 절로 변했다가 현종 때 혁파되어 사라졌다고도 하고, 영조 때까지 존속하다 1764년 자수궁을 헐어 성균관의 별당인 비천당(丕闡堂) 일량제(一兩齊) 벽인재(闢人齋) 등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아래 <인종실록>의 내용으로 짐작하자면 불교를 믿는 후궁들로 인해 절처럼 변한 것이 꼴보기 싫어 이후 혁파된 것으로 보인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자수궁은 선왕의 후궁이 사는 곳이므로 엄숙하기가 궁금(宮禁)과 다를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미천하고 요사한 여중이 섞여 거처하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늘 불사(佛事)를 하는가 하면 요사한 방법을 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요령(搖鈴)과 목탁 소리가 바깥에서 들린다 하니, 매우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이제 대행 대왕의 후궁도 그리로 나아가 살게 되면 더욱 엄숙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미천하고 요사한 여중들을 일체 문밖으로 내치고 머리를 기르게 하여 사도(邪道)를 억제하소서.(<인종실록> 1권)

     

    다만 경복궁과 자수궁을 연결하던 다리인 자수교는 꽤 오래 존속하였으니, 1840년 김정호가 만든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나타나 있고, 1934년 경성부에서 발행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도 그 사진이 실려 있다. 

     

     

    《수선전도》 속의 자수교 위치(●)
    《경성부사》 속의 자수교

     

    <경성부사>에서는 자수교를 자수궁교라 부르며 '옥인정(町) 261번지의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효자정(町) 전차종점 바로 앞에 있는 전염병원(傳染病院) 순화원(順化院) 가는 도중에 있었다'고 부언했는데, 지금의 옥인동 45-1번지, 자교교회 입구 복개천도로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자교교회는 배화학당을 세운 여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1901년 학교 안에 세운 교회였으나 이후 자수교 근방으로 옮기며 자수교의 다른 이름인 자교(慈橋)를 붙여 자교교회(紫橋敎會)로 불리게 되었다. 한자가 바뀐 것은 이 길이 오래전부터 자하문(紫霞門)길이라 불린 탓일 게다.  

     

    다리는 백운동 계곡에서 발원해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간 골 깊은 백운동천 위에 놓여 있었는데, 교각이 높고, 귀족들이 건너는 다리답게 고급스러운 돌난간으로 장식되었다. 하지만 이 다리도 시대의 흐름을 비켜갈 수 없었으니 1927년 백운동천 암거공사로 인하여 앞서 말한 금청교와 함께 소실되었다.

     

     

    자수교가 있던 자교교회 앞 도로 / 횡단보도 옆 맨홀 뚜껑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자교교회 쪽에서 본 도로 / 멀리 인왕산이 들어온다.
    120년 역사의 자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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