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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비윤씨와 지혜의 다리 종침교
    서울의 다리 2022. 4. 18. 06:35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廢妃) 윤씨가 어떻게 폐비가 되었는지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의외라는 것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르다는 뜻이다. 즉 드라마에서는 성종의 와이프 윤씨가 폐비가 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은, 그리하여 결국은 사약을 받고 죽게 되는 것은 왕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피를 낸 일이 단초이다. 그리고 용안 스크래치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왕이 그녀의 몸종 일홍과 관계를 가졌던 까닭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전 윤씨는 자신의 생일날 성종이 자신의 처소를 찾아줄 것을 기대했으나 야심토록 왕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래서 나인에게 왕의 소재를 알아보게 하니 모처(某處)에서 일홍이라는 무수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윤씨로서는 눈이 돌아갈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모처에 쳐들어가 어찌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한바탕 난리법석을 떠는데,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왕을 밀치는 과정에서 실수로 얼굴에 스크래치를 내게 된다.

     

     

    드라마 속의 폐비 윤씨

     

    이렇게 되고 보니 왕으로서도 열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성종은 윤씨를 내칠 결심을 하고 정승 등을 불러 회의를 연다. 그리고는 "궁중의 일을 말하는 것은 정말로 쪽팔리는 일이나....."라는 서두로서 지난밤 일을 낯낯이 말한다. 중전을 내쫓을 마음이 이미 단단히 선 것이었다. 

     

    "궁곤(宮壼. 궁중)의 일을 여러 경(卿)들에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이 매우 중대하므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중궁(中宮, 중전)의 소위(所爲)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간(內間)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예전에 중궁의 실덕(失德)이 심히 커서 일찍이 이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경들이 모두 다 불가하다고 말하였고, 나도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혹은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비록 내가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소치(所致)이지마는,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해서 어찌 중궁에 처(處)하게 하여 종묘를 받드는 중임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후궁(後宮)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그릇되게 이러한 거조(擧措)를 한다고 하면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이 소소(昭昭)하게 위에서 질정(質正)해 줄 것이다. 옛날에 한(漢)나라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인종(仁宗)이 모두 다 왕후를 폐하였는데, 광무제는 한 가지 일의 실수를 분하게 여겼고, 인종도 작은 허물로 인했던 것이지마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2일 기사)

     

    왕은 중국의 고사까지 들먹이며 윤씨의 폐비를 기정사실화했지만 신하들은 모두 반대했다. 만일 나중이라도 중전 윤씨의 아들인 세자(연산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폐비에 찬성한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할 터, 극력으로 말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은 다만 요식행위일 뿐 결심이 선 성종은 결국 윤씨를 궐 밖으로 내쫓았고, 나아가 폐비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賜死)시켰다. 훗날 왕이 된 연산군은 간신 임상홍의 고변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마침내 일진광풍이 부는 것은 알려진 그대로이다. 

     

     

    사사당하는 윤씨

     

    그런데 이상의 스토리 가운데 정사(正史)인 것은 <성종실록>에 실려 있는 성종의 발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야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심지어 '용안의 스크래치'도 정사에는 없고 《기묘록》이라는 개인 사서에 전한다. 《기묘록》은 1638년(인조 16)에 김육(金堉)이 기묘사화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인 만큼 기묘사화에 앞선 갑자사화의 일까지도 기록하게 된 것이다. 기타 《아성잡기》 《야언별집》 《부계기문》 《소문쇄록》 《미수기언》 등에도 폐비 윤씨에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시 폐비 윤씨의 일은 그만큼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기묘록》에는 사약을 먹고 피를 쏟은 윤씨가 피 묻은 수건을 어머니에게 주며 "세자가 크면 이것을 보이고 어미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더라고 전해주시오"라는 발언을 담아 장래의 피바람을 예견하고 있고, "나를 건원릉 가는 길에 묻어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달라"는 발언도 실려 있다.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서 매년 제사를 올리므로 그때 무덤 속에서 임금과 동행하는 세자를 보겠다는 뜻이었다. 이 애절한 스토리가 월탄 박종화의 소설 <금삼(錦衫)의 피>에 실리고, <조선왕조 오백년>이라는 드라마 극본과 같은 제목의 역사 전집을 쓴 신봉승의 펜에 실렸다. 이후로 이것이 역사 드라마의 모본(母本)이 되며 마치 정사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고양시 서삼릉 내에 있는 폐비윤씨의 회묘
    우연찮기는 하나 《기묘록》의 유언 대로 폐비윤씨는 건원릉 가는 길인 청량리 회기동 어드메에 묻혔다. 회묘는 지금 경희의료원 자리에 있었다. 건원릉과는 좀 멀지만, 아무튼 회기동의 지명은 그래서 생겨났다. 회묘(懷墓)가 비슷한 글자인 회기(回基)로 변한 것인데, 1969년 회묘가 서삼릉으로 옮겨지며 지명만 남게 됐다.

     

    야사인 《파수편(破睡篇)에는 윤씨가 죽을 때 토한 피가 수건이 아니라 흰 비단 적삼에 배는데, 월탄 박종화는 이 부분은 《파수편》을 참고한 듯하다. 이후 어머니가 그 피 묻은 적삼 조각을 몰래 보관하고 있다가 간신 임사홍에게 보여주고 임사홍은 다시 이 적삼을 연산군에게 보여주어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피 묻은 적삼 일화는 왕조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실록에선 그저 연산군이 우연히 폐비 윤씨의 아버지 이름을 듣고 궁금해하다 폐비 윤씨 사사를 알게 됐다고 적혀 있다. 연산군은 이날 식음을 전폐했다.

     

    또한 드라마에서는 성종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윤씨의 폐위를 주도하고 사약을 내라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록에서는 그저 성종의 분노만이 눈이 띈다. 역사적 사실만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윤씨가 폐비가 된 이유는 불명(不明)이다. 윤씨가 투기가 심했다고 돼 있지만 성종의 여성편력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 38살로 비교적 단명했음에도 왕비 3명과 후궁 10명을 두었고, 총 29명의 자녀를 생산해 태종 이방원과 다산왕(多産王)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8명으로 2위라는 말도 있으나 그게그거다) 어쩌면 윤씨의 투기가 자연스러울수도 상황이니 이것이 윤씨가 폐비가 된 사연의 불편한 진실인지도 모른다.*

     

    * 《파수편》에서는 오히려 인수대비가 "주상이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음으로써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 또한 보전하지 못했다"고 성종을 꾸짖고 있다. 

     

    오늘 말하려는 종침교(琮琛橋) 스토리는 《명신록(名臣錄)》에 그 주인공인 허종(許琮)이 등장한다. 《명신록》은 조선시대 명신들의 언행과 사적을 모은 책으로 19세기 초에 발간된 저자 불명의 사서이다. 이 책에서 허종은 무술년(1478년)에 임금이 중전을 폐위하려 들자 한무제(漢武帝)가 폐한 진황후의 예와, 맹황후를 폐한 송나라 인종의 예를 들어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진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허종이나 동생 허침(이후 좌의정을 지냄)은 폐비 윤씨에게 사사(賜死)를 명하는 악역을 담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몰린다. 

     

    아래 적선동 종침교 터 표석에 쓰여 있는 내용은 바로 그것을 말함으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 성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종(許琮)과 허침(許琛) 형제가 갑자사화의 화를 면한 일화가 얽혀 있는 경복궁 입구 다리 터

     

     

    적선동 하나은행 앞 종침교 터 표석
    김정호가 1834년 완성한 필사본 지도책 《청구도(靑邱圖)》 수록 '도성전도'에서 종침교를 찾아볼 수 있다. 종침교 위쪽으로 내수사와 장흥고가 보인다.
    장흥고 터 표석 / 서울경찰청 앞에 내수사의 창고로 쓰이던 장흥고 터 표석이 세워졌다. 내수사는 조선시대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청으로 세조 12년부터 고종 31년까지 존속됐다.

     

    갑자사화는 왕위 된 연산군이 윤씨 폐위와 사사에 관련된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이세좌(李世佐) 등 관료 수십 명을 죽이고,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등 10여 명의 시신을 부관참시한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허종과 허침 형제는 어떻게 그 화를 면했을까? 양천 허씨 문중에 전하는 형제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당시 적선방(積善坊)에 그들 형제의 누이가 살고 있었다. 그 누이는 '백살 할머니'로 불릴 정도로 오래 살았고, 또 그만큼 지혜가 깊어 똑똑하다는 허종 허침 형제도 어려운 일은 늘 누이에게 묻곤 했다. 형제는 이번에도 지혜를 얻고자 누이의 집을 찾았다. 누이는 단박에 사태를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너희들의 어린 시절, 네 집 종이 우리 어머니를 죽이는 일에 관여했다 하면 너희가 크면 그 종을 가만 놔두겠느냐?"

     

    형제는 모골이 송연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까? 어찌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백살 할머니가 담담히 되물었다. 

    "여기 오다가 다리를 건넜느냐?"

    "예. 건너기는 했습니다만....."

    "허면 갈 때는 그 다리에서 떨어지거라."

     

    형제 역시 단박에 그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다치면 회의에 불참할 명분을 얻게 되고 왕명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잘못되면 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형제는 그래서 다시 물었다. 

    "예? 그러다 죽게되면....?"

     

    백살 할머니의 대답은 이번에도 담담했다. 

    "그 높이에 죽기야 하겠느냐? 또 어차피 받아놓은 죽음이거늘 조금 일찍 죽는다고 뭐 그리 아깝겠느냐? 적어도 네 자손들은 보존되지 않겠느냐?"  

     

    돌아가는 길, 형제는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앞서 다리를 건너가던 허종이 정말로 다리를 헛디뎌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동생 허침은 다친 형을 업고 돌아와 돌보느라 몸살이 났던 바, 어쩔 수 없이 궁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훗날의 화를 면하게 되었다.*

     

    * 역사적으로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가 사사를 명하는 역할을 좌승지 이세좌가 맡게 되는데, 그는 갑자사회 때 연산군에 의해 사형당한다.  

     

    조선시대 그 다리는 경복궁 왼쪽을 흘러내리는 백운동천 물과 내시부(내시의 일을 관장하는 간청) 앞을 흐르는 승전색(承傳色, 내시부의 다른 이름) 물이 합쳐지는 곳 아래에 있었는데, 이후 다리는 형제의 이름을 따 종침교가 되었다. 형제의 이름은 동네 이름으로도 쓰였으니 1894년 갑오개혁 때 종교동이라는 정식 동명으로 등재되었으나 일제시대에 내자동과 적선동으로 분할되며 사라졌다.

     

    종침교는 줄여서 종교(琮橋)라고도 불렸으며 그 흔적이 종로구 사직로8길 종침교 터 표석 근방에 위치한 종교교회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종교교회는 배화학당을 건립한 캠벨 선교사가 필운동 교내에 세운 채플이 기원으로, 120년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교회이다. 그런데 지금은 앞서 말한 자수교 근방 자교교회의 한자가 변한 것처럼 한자가 변해 옥홀 종(琮)이 아닌 마루 종(宗)을 쓰는데, 앞서 말한  갑오개혁 때 종교동(宗橋洞)으로 등재된 까닭이다. 흔히 종교교회의 이름을 Religion의 종교로 오해하나 보다 깊은 뜻(?)이 있다.

     

    참고로 허종(1434~1494년) 허침(1444~1505년) 형제는 조선시대 청백리 명단에도 올라 있다. 두 사람 모두 문과에 급제에 재상까지 오른 훌륭한 인품의 인물이었으며, 특히 허종은 문관이면서도 여진족을 정벌하는 임무를 맡아 수차례 북정(北征)에 나섰고,1467년에는 함길도병마절도사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문무겸전의 인물이다. 종참교는 1927년 이후 백운동천이 복개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종침교는 교회 앞 횡단보도 (차량 지나는 곳) 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시대 복개 되기 전의 백운동천
    허종 숭모비 / 서울 강동구 고덕동 산 93-2 허종 후손 묘역 내에 위치한다.
    허종의 손자 가선대부 제양군 허순(許淳)의 묘 / 양천허씨대종회 사진
    묘역 근방의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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