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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에 이르는 절 철원 도피안사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3. 1. 24. 12:20

     

    우리나라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고찰(古刹) 도피안사의 도(到)자는 '이를 도'  자를 쓴다. 즉 '피안에 이르는 절'이라는 뜻인데, 어학사전에 따르면 피안은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필시 불가의 최종 목표일 그곳을 <위키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해탈한 후의 내세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저쪽 언덕'이다.

    피안이란 윤회의 세계에서 수행을 통해 열반의 세계로 도달하는 과정을 고통의 땅에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행복의 땅에 도착하는 과정에 비유한 데서 생긴 말이다. 즉 생로병사의 고통, 탐욕, 어리석음 등으로 윤회하는 이 세계를 '이쪽 언덕'이라는 뜻의 차안(此岸)이라고 하고 반대로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자유로운 깨달음의 세계를 저쪽 언덕이라는 뜻의 피안이라고 한다. 여기서 뗏목은 불교의 진리이고 뗏목을 저어서 가는 노력은 수행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을 바라밀이라고 한다. 바라밀은 '저쪽 언덕에'와 '도달하다'라는 뜻이 결합한 말이다. 이것을 한자로 번역하여 '도피안'이라고 한다. 한국의 도피안사라는 절의 이름이 바로 '도피안'이다.

     

     

    도피안사 일주문

     

    예전에는 이 절에 가기가 정말로 피안에 이를 정도로 힘들었다. 휴전선 북쪽 민통선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출입이 자유로운데 그래도 불편한 교통 탓인지 일반 관광객은 많지 않은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좋다. 더욱이 도피안사는 그리 큰 절이 아닌 데다 낮은 구릉에 둘러싸인 까닭에 고즈넉함이 항상심처럼 유지된다. 구정연휴에 이곳을 찾았을 때 그와 같은 느낌은 예전과 다름없었는데, 다만 일주문이 생기고 소박한 맞배지붕 작은 당우였던 대적광전이 팔작지붕의 큰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피안사 대적광전

     

    도피안사는 옛 절로서는 드물게 건립연대가 명확하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당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조성하여 철원에 있는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소 등에 싣고 운반하는 중 이 불상이 없어졌다. 이에 사방을 찾아 헤매다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서 발견하여 865년(신라 경문왕 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고,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 불상이 유명한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불상 역시 조성 연대가 명확하다. 불상의 뒷면에 조성 시기와 동기를 새긴 100여 자에 이르는 긴 명문의 덕분인데, 이로써 경문왕 5년 이 지방의 신도 1,500여 명이 결연(結緣)하여 조성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높이 91cm의 이 철조비로자나불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같다는 평을 듣는다. 부처님의 머리 모양인 육계가 뚜렷하지 않고 긴 눈매와 은은한 미소로서 바라보는 모습이 그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인데, 예전에는 개금(蓋金)되어 있어 모양 사나웠으나 지금은 금칠을 벗겨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 비로자나불은 좌우 협시불을 두지 않았으며 여느 절과 달리 불단이 번잡하지 않고 정갈하여 눈에 띄는 것이라곤 향로와 정화수, 그리고 촛불 하나뿐이다. 대적광전을 신축할 때 만들었음직한 닷집은 화려하나 붉은 배색의 탱화와 잘 조화되어 거북함이 없는데, 탱화 속 부처와 보살들의 광배는 초록색 어둔 톤으로 처리해 오히려 영롱하다. 어느 분의 솜씨인지는 모르겠으나 수작임에 분명하다.  

     

     

    국보 제63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불상 뒷면의 명문

     

    그리고 이 불상에는 현대판 전설도 전한다. 도피안사는그 위치가 위치인지라 6.25전쟁 중에 무사할 리 없었다. 절은 전쟁 중 폭격을 당해 모두 불타 폐허가 되었고 불상도 폐허 속에 파묻혔다. 그러다 전쟁 후인 1959년 당시 육군 15사단장이던 이명재 장군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지금 내가 땅속에 묻혀 있어서 너무 답답하다. 나를 좀 꺼내달라" 호소했다. 꿈을 꾼 이튿날 이명재 장군이 전방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민가에 들렀는데, 집주인의 모습이 꿈속에서 만난 불상과 너무나 흡사했다.

    깜짝 놀란 이 장군이 장병들을 데리고 집주인과 함께 꿈속에서 들은 대로 폐허가 된 절터로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절터 바닥에는 불상의 육계가 땅 위에 솟아 있었다. 이에 이명재 장군이 데려온 여러 장병들이 불상을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워낙 땅 속에 깊이 박혀있던지라 불상은 꿈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명재 장군이 바깥에 드러난 불상의 얼굴을 정갈하게 씻은 뒤 자신의 군복을 벗어 입혔더니 그제야 불상을 꺼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 덕분에 철불을 다시 도피안사에 봉안하고, 이명재 장군이 절 재건을 지원했다고 한다. 지금도 도피안사 대적광전 안에는 이때 발견했던 철불과 함께 이명재 장군 그리고 당시 불상을 처음 발견했던 장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렸다. (이상 <나무위키> 참조)

     

     

    이명재 장군
    불상을 최초 발견하고 꺼낸 고주찬 대령
    대적광전에 걸린 사진 / 가운데는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들의 이름이다.

     

    말한 대로 도피안사는 6.25전쟁 중 폐허가 되어 옛 당우는 전하는 것이 없고 본래 절이 세워졌던 신라 때의 것은 위 철불과 함께 삼층석탑이 유이(有二)하다. 높이 4.1m의 이 화강암 석탑은 기단부가 8각형이라 이채로운데 이와 같은 형태는 토함산 석굴암삼층석탑과 더불어 유이하다. 하층기단의 상하에는 연꽃잎이 예쁘게 조각되었고 그 사잇돌인 8각 면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어 더욱 아름답다.

     

    (만일 이 면석이나 탑신에 현대 석탑들처럼 온갖 조각들을 입혔더라면 정말로 답답했을 것이다. 요즘 봉헌되는 사찰의 탑들은 기계의 편리성에 편승한 기교들이 넘치는 탓에 어지럽고 경박하다)  

     

     

    보물 제223호로 지정된 도피안사 삼층석탑
    탑의 기단부
    대적광전에 본 삼층석탑

     

    절 구경을 마치고 내려가려는데 스님 한 분이 대적광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목탁소리와 함께 낭랑한 예불 독경이 들렸다. 청정한 장소에서 맞은 참으로 청정한 아침이었다. 

     

     

    아침 예불을 드리러 가는 스님
    도피안사 전경
    도피안사 부근의 철원 향교

     

    반면 이른바 법보사찰이라는 천년고찰 해인사에서는 더럽기 그지없는 추문이 들려왔다. 주지스님 성추문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휩싸인 것인데 상대는 비구니였다. 추문이 언론에 보도되자 당사자인 현응스님은 처음에는 무고를 주장하며 법적 대응을 을러댔으나 결국 사퇴를 했는데, 16일 후임자를 뽑는 과정에서 상황이 더 꼬였다. 해인총림 임회 과정에서 관계자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했고, 결국 1명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성추문에 이어 폭력사태까지 벌어진 것이었다. 

     

    더러움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해인사 소속 고위 승려들이 지난해 12월 태국 치앙마이로 골프 원정을 다녀왔다는 보도가 뒤를 이었다. 그들이 사복을 입고 골프를 치는 사진도 실렸다. 음력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는 승려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수행에 힘쓰는 이른바 '동안거' 기간이지만 범계(犯戒)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2년 전 여름 '하안거' 때도 골프를 쳐 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해당 승려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죄송하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지난 12월, 교인 5명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인천 모교회 목사가 구속되었다는 보도에 이어 19일  MBC TV  '실화탐사대'에서는 '선택받은 신도' 편이 전파를 탔다. 어릴 적부터 20년 동안 교회를 다녔던 신도에 대해 성추행과 성폭행 등 무려 17차례나 성범죄를 저지른 또 다른 목사의 비행이 보도되었는데, 평소에도 이 자는 목사를 하나님처럼 섬겨야 한다며 수입 30%의 헌납을 강요했으며, 교인들은 이 자의 요청으로 최고급 차량까지 뽑아주었다고도 했다.  

     

    이번 일에도 불교계와 기독교계는 일부 성직자의 일탈이라 치부할 것이다. 의당 있는 일이라 이제는 그들도 무감한 듯한데, 이를 받아들이는 신자들도 무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분명 이번에도 "우리 스님은, 우리 목사님은 안 그래요"가 그들의 반응일 터이다. "우리 집 개는 안 물어요"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더러우면 깨끗한 곳을 찾는 게 인지상정이겠거늘 본인도 더러워서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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