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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하필기에 기록된 천마산 보광사 중수기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3. 2. 24. 19:29

     

    <임하필기(林下筆記)>는 조선 말기의 문신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39권 33책의 기록으로 경학(經學), 역사, 지리, 시문(詩文), 금석(金石), 풍속, 민담 등이 망라된 필기류(筆記類) 편저이다. 이 책은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가 있거니와 읽을거리가 풍부해 일찍이 국역번역본이 나왔다. 원본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6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축쇄본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이유원은 백사 이항복의 9세손으로, 1841년 과거에 급제한 후 의주부윤·전라도 관찰사·성균관 대사성·형조판서·예조판서 등의 관직을 거친 후 1864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아 정치적 부침과 충돌이 잦았는데, <임하필기>는 흥선대원군 집권 후 한직으로 떠돌 때 집중적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871년(고종 8)에 그의 별서였던 천마산(天摩山) 임하려(林下廬)에서 탈고하였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임하려는 '숲 속의 움막'이란 뜻으로 그가 별서를 꾸민 경기도 남양주 천마산 아래 가오실 마을에는 지금도 임하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대원군 섭정시절, 한직인 수원유수를 역임한 후 이곳 가오실 마을로 들어와 땅을 사고 거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평소 부러워 한 서계(西溪) 박세당의 양주 석천동(현 의정부 장암동)과 같은 별서를 꾸미고자 하였으나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이 하면서 그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였던 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가곡리 마을의 '가오복지' 표석 / 이유원의 친필로서 자신이 조성한 별서의 내원 영역을 규정하는 이정표로 짐작된다. 가오(嘉梧)는 가곡리의 옛 이름이다.

     

    그리하여 1875년(고종 12)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고, 1882년에는 전권대신(全權大臣)의 자격으로 임오군란으로 발생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제물포조약에 조인했다. 그 때문인지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그를 파렴치한처럼 나쁘게 묘사했으니, "왜놈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어 죽은 왜놈들에게 5만원, 군비로 50만원을 배상해야 했고, 왜병이 서울에 주둔하게 만들었으며, 사절단을 보내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게 만들었다"며 흥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금액은 당시 조선정부 1년 예산의 1/3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바, 돈이 없었던 조선정부는 결국 일본에서 연리 8%의 고율의 차관을 빌려와 배상금을 줘야 했다. 그리고 공사관 보호를 명목으로써 요구한 일본군의 조선국 주둔 요청도 그대로 수용하였던 바, 대병력인 일본군 1개 대대의 합법적 주둔을 용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6개조의 제물포조약은 일본의 야심을 그대로 관철시킨 대표적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조선 진출의 교두보를 제공한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래서 황현은 그를 박영효와 같은 유(類)의 인간으로 취급했지만, 이유원은 박영효가 앞장서서 추진한 복식개혁에는 반대했다. 또한 황현은 이유원의 치부(致富)도 지탄했으나,(<매천야록>에 의하면 서울까지 왕래하는 남양주 80리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 그 돈은 결국 독립자금으로 환원되었다.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거부(巨富)를 상속받았던 이석영은 한일합방이 된 1910년 가곡리 6000석 토지와 가옥 등 자신의 전 재산을 환금해 만주로 갔고, 그 돈을 전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씀으로써 조선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나중에 별도의 설명이 있겠지만 남양주시 홍유릉 앞에는 이석영 6형제의 독립운동정신을 기린 '리멤버 1910'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이곳 마당인 이석영 광장에는 6개의 자연석을 건물 초석처럼 깔아 놓았다. 이 돌들은 이석영이 살았던 화도읍 가곡리 마을에 가져온 들들로, 당시 함께 만주로 간 6형제들(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을 의미한다. 그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이리라. 

     

     

    리멤버 1910
    이석영 마당의 6개 초석
    리멤버 1910의 이석영 흉상

     

    ※  이석영은 1885년 서른 살에 문과에 합격하여 수찬, 승지, 비서원승을 거쳐 종2품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문과에 합격했던 이유원의 친자(親子)가 병으로 사망함에 가까운 친족으로써 그의 양자가 되었는데, <매천야록>은 그 일도 나쁘게만 보았으니 석영의 자질을 보고 욕심이 나 양자로 빼앗아갔다고 적었다. 아무튼 그는 이유원의 양자가 되어 이른바 '삼한 제일 갑족'이라 불릴 만큼의 거부가 되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희사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투사가 되어 싸웠으나 말년에는 상해에서 빈민으로 겨우 연명하다 죽어 그곳 공동묘지에 묻혔다.   

     

     

    리멤버 1910의 6형제 초상 / 이시영은 조국 광복 후 이 땅에 돌아와 대한민국의 부통령이 되었으나 나머지 5형제는 모두 타국의 고혼(孤魂)이 되었다.

     

    아무리 줄여도 이유원에 관한 이야기는 축약시키기 힘들다. 하지만 이쯤에서 끊고 주제인 전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의 별서가 있던 화도읍 수동리 가오곡 마을 위에는 보광사(普光寺)라는 오래된 사찰이 있다. (같은 이름의 파주 보광사와 헛갈리기도 하는 곳이다)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던 그 사찰은 조선 중기를 지나며 쇠락했는데 이유원에 의해 중창되었다. 그는 보광사를 중창한 연유를 <임하필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만회암(晩悔庵)은 어떤 중이 옛 절을 폐기하고 새 터에 고쳐 세운 것이다. 계유년(癸酉年) 여름에 내가 꿈속에서 절에 올라가니, 관세음보살이 공중에 나타나서 노한 기색을 띠었고 또 몇 마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은 기억나지 않으며, 관세음보살이 또 어떤 중을 포박하여 이불로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꿈을 깨고 나서 매우 괴이하게 생각되어, 중으로 하여금 옛 절을 중수하고 옛 부처를 도로 봉안하게 하였다. 이 절이 두 번이나 꿈에 나타난 것 또한 괴이한 일이다.” 

     

    이상은 이유원이 가옥곡에 별서를 조성하고 살 때인 50세 후반의 일이다. 현재는 그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가오고략>이라는 풍물지에 나타난 별서의 규모는 자못 상당하다.

     

    성의 동쪽 풍토 아름다운 곳에 가오곡이 있으니 곧 이씨옹 귤산 늙은이의 땅이다. 약 십리 정도 둘러 있는데 산이 삼분의 일(1/3)을 차지하고 물이 구분의 삼, 집이 이십분의 일로 숲과 바위가 섞여있다. 처음 옹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음식이 없으면 집을 유지할 수 없다"하고 이에 산의 남쪽을 넓혀서 밭을 만들었다. 또 말하기를 "서적이 없으면 자제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하여 이에 산의 동쪽에 만권루를 세웠으며, 또 말하기를 "손님이며 벗이 오는데 정사(精舍)가 없으면 유정(有情)을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이 에 산의 서북쪽에 사시향관과 오백간의 정사를 지었다. 봄의 꽃, 여름의 그늘, 가을의 연꽃이 모두 감상할 만하고 겨울의 노송나무와 삼나무가 외려 울창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관록을 바탕으로 만회암 자리의 옛 보광사를 중창하였다. 꿈의 내용인즉, 누군가 옛 절을 폐기하고 만회암을 지었는데 꿈에 관음보살이 현몽하여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만화암을 지은 땡초를 혼냈다는 것으로, 그리하여 자신이 절을 새로 중창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옛 절은 10세기 혜거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광사가 틀림없을 터, 이유원은 계유년인 1873년 여름 이 절을 중수하였다. 

     

    두 번을 거푸 꾸었다고는 하지만, 유학자인 그가 꿈 하나로 중창불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이해가 미치지 않는 면이 없잖다. 그러나 통도사에 소장돼 있는 성곡신민(聖谷愼旻, 1835~1858년 활동) 선사의 진영에 이유원의 찬(讚文)이 실려 있고, 1869년(고종 6년) 혜소(慧昭)스님이 화악 지탁(華嶽 知濯, 1750~1839년) 선사의 <삼봉집(三峯集)>을 목판본으로 재편집할 때 그 첫머리에 이유원의 영찬(影讚)을 실은 것을 보면 이유원은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과 조예를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중창했던 가람의 모습은 지금 남아 있지 않으니 한국전쟁 중 전소되었다. 지금의 가람은 화담당 유덕선사가 이후 새로 지은 것인데, 절 입구의 승탑과 공덕비가 바로 그의 것이다. 그밖에 보광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들을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화담당 유덕 대선사 승탑과 공덕비
    길 위의 이정표
    그림 같은 해우소
    약수터의 삼존불상
    북위(北魏)의 불상을 모사한 이 삼존불상은 그럼에도 수작(秀作)이다.
    소나무 옆의 미륵불 또한 작지만 수작이다.
    대웅보전과 삼성각
    경내의 오래된 반송
    팔각칠층석탑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은 보광사 계곡에 남아 있는 이유원과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다.  추사 필적 연구자인 해동암각문연구회장 홍순석 교수(강남대)와 임병목 해동암각문연구회 부회장이 고증했다고 하는 김정희의 필적은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는 '石丈(석장)'과 '紫蓮臺上(자련대상)', 그리고 보광사 입구 다리 앞 바위의 '碧波洞天(벽파동천)'이다. 석장은 '돌같이 심지가 굳고 꿋꿋하다'는 의미이고, 자련대상은 관음 예문인 '자련대상 홍우화중(紫蓮臺上 紅藕花中)'이며 벽파동천은 '푸른 물의 별천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유원의 필적은 '淸可濯我纓'(청가탁아영)'으로 시작되는 5언 절구의 암각문과, 자신의 호인 '橘山'(귤산) 및 '玉山'(옥산), 그리고 '玉山隱居'(옥산은거)’ 등이라 하는데, 이상의 글씨들은 사실 보광사와는 관련이 없고 그가 꾸민 별서 가오곡 임하려에 연관된 글이 될 것이다. 즉 이유원의 별서에는 그 자신도 여러 글을 남겼거니와 호사가인 김정희도 자주 찾아와 벗하며 말년의 글씨를 과시(?)했음을 알 수 있으니 두 사람은 교류는 <임하필기>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태어난 시기를 더듬자면 김정희는 무려 28살이나 나는 나이를 뛰어넘어 이유원과의 교류를 이룬 것으로, 이는 24살의 차이를 극복하고 벗이 된 정역용과 초의선사 의순과의 관계와도 비견된다. (그 두 사람은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에서 만났다. ☞  '남양주 겨울기행 - 여유당과 수종사 & 다산 정약용') 그 초의선사와 김정희 또한 벗이었으니 김정희의 유배지인 제주 대정읍까지 찾아준 뜨거운 우정을 앞서 소개한 바 있다.(☞ '탐라의 재발견 - 추사 김정희도 관심 없었던 이양선'

     

     

    제주 대정읍에는 추사가 유배 생활을 한 강도순의 집을 복원시켜 놨는데,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초의선사와 김정희의 모습도 재현해놨다.

     

    보광사와 이유원의 임하려를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그 글씨들은 시간에 쫓기고 또 계곡의 살벌한 결빙에 위축되어 내려가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입구의 '벽파동천' 글씨만을 살펴보는 데 만족해야 했는데, 돌아와 생각하니 '자련대상'은 눈앞에 있었음에도 몰랐던 것 같다. 벽파동천'의 전체 크기는 가로 150㎝, 세로 45㎝ 정도이고 자획 크기는 가로 40㎝, 세로 45㎝ 정도로 글씨는 충분히 식별 가능했다. 아래 사진들이 '벽파동천' 바위와 그 밖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는 계곡이다.

     

     

    ' 벽파동천' 바위
    아직도 얼음 짱짱한 보광사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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