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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현궁의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1.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13. 00:47

     

    운현궁은 고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12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곳 안국방(安國坊) 골목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던 12살 명복(고종 이재황의 아명)은 졸지에 가마에 태워져 궁으로 들어갔다. 1863년 12월 9일의 일이었다. 앞서도 말한 바도 있거니와, 그저 이름만 왕손이었던 명복이 왕위에 오른 것은 33년간 뒷방 늙은이로 안동김문의 눈치를 보던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와, 마찬가지로 안동김문에 눌려 살던 명복의 아버지 흥선군 이하응이 합작해 만들어낸 역작이었다.  

     

     

    안국동 운현궁 정문

     

    신정왕후는 오래 전 죽은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의 부인이었다. 효명세자는 조선 23대 왕 순조의 아들로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19~22세로서, 왕위에만 오르지 않았다 뿐 실질적인 국왕이었다. 효명세자는 그 기간동안 괄목할 만한 개혁을 이루며 오랫동안 안동김문에 의해 피폐해진 국정과 왕권을 되살리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1830년(순조 30년) 4월 22일 밤,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며 울컥 피를 토하고 쓰러지더니 십 여일 뒤인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역대 왕과 왕세자를 망라하여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영민했다는 그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독살설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으나 기록으로는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정치개혁은 물 건너가고 다시 외척들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 ) 

     

     

    동구릉 수릉 / 추존왕 문조(효명세자)와 신정왕후 합장릉
    수릉 안내문

     

    이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했으나 그 역시 23살로 요절했다. 헌종은 매우 잘생겼던 바, 궁녀들은 너나없이 누구나 흠모했고 본인 역시 색을 밝혔던지라 어지간히 생긴 궁녀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그래서 지나친 밤일로 인한 과로가 목숨을 단축시켰을지 모른다는 해석이 가능하나 그러면서도 후사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좀 어렵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갔는데, 문제는 왕위를 이을 왕재(王才)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헌종이 붕어한 1849년 6월 6 밤, 순조 비(妃)인 안동김씨 순원왕후가 재빨리 옥새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밑받침으로 영조대왕의 혈육인 이원범을 강화도에서 데려와 왕위에 앉히니 그가 조선 25대 왕 철종이었다. 그는 분명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이기는 했으되 할아버지 은언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귀양온 후 이어져온 방계혈족에 불과한지라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 전계군은 빈농으로 겨우겨우 살다 생을 마쳤다)

     

     

    철종이 살던 용흥궁 / 초가집이었던 곳이 잠저(潛邸)가 되며 기와집으로 변했고 궁(宮)의 명칭이 붙여졌다.
    교동읍성 남문 / 1786년 사도세자의 서자(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은 역모죄에 연루돼 강화 교동에 안치되고, 이로 인해 이른바 강화 계보라는 곁다리 왕실 계보가 생겨나게 된다.
    교동읍성 안내문

     

    따라서 철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안동김씨 세력에 그저 휘둘려야만 했는데, 거기에 부인으로 맞은 철인왕후 역시 안동김씨였다. 이후 안동김문의 세도정치는 더욱 날개를 달았으니 그들의 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점점 도탄에 빠져갔고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무능하고 무력했던 철종은 그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그저 안동김문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안동김문은 허수아비 왕 철종을 더욱 무능하게 만들기 위해 8명의 후궁을 줄줄이 집어넣었다. 상상이긴 하지만 철종이 즐거움을 느낄만한 것은 밤일밖에 없었을 터, 그 역시 33세의 나이로 과로사하고 말았다. 1863년(철종 14) 12월 8일의 일이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후사 없이 죽었다는 점이었으니, 그는 국가종사에 끝까지 폐를 끼친 위인이 되었다. (어쭙잖은 변론을 하자면 철종은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임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할 삼정이정청을 설립해 개혁에 착수했으나 힘에 부쳐 꺾인 감은 있다)  

     

    안동김씨는 이번에는 또 누구를 왕위에 앉혀야 하나, 고민해야 했다. 그들이 그와 같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던 12월 8일 밤, 이번에는 신정왕후 조씨가 재빨리 움직여 옥새를 손에 넣었다. 14년 전, 그러니까 자신의 아들 헌종이 죽던 1849년 6월 6 밤, 옥새를 확보하지 못해 안동김문에게 왕위 결정권을 뺏겨야 했던 그 뼈저린 경험에 대한 학습효과일 터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이미 밀약을 맺었던 흥선군의 아들 12살 명복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었다.

     

    12월 7일 밤, 창덕궁 희정전에서 옥새를 손에 넣고 처소로 돌아오다 안동김문의 김병학 대감과 마주친 그 긴박했던 순간을 나름대로 그려본 바 있다. ☞(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신정왕후 조씨')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신정왕후 조씨(조대비)

    소모적 페미 논쟁이 불길처럼 일었다 사그라졌다. 마치 누가 모닥불에 기름을 부은 듯 화르르 타올랐다 꺼졌다. 일방의 옮고 그름을 떠나 떠나 소모적이고, 국론 분열적이며, 갈등만을 조장하는

    kibaek.tistory.com

     

    창덕궁 인정전
    당시 조대비가 들고 나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철종금보 / 국립고궁박물관

     

    왕계(王係)의 뿌리가 약했던 명복은 우선 신정왕후의 양아들로 입적돼 익종(효명세자)의 아들로서 정통성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관례를 마친 후 12월 13일 보위에 오르니 26대 임금 고종이었다. 조대비는 1866년(고종 3년)까지 4년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바통터치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형식일 뿐, 흥선대원군의 통치는 12월 13일, 고종의 즉위와 함께 곧바로 실시되었으니 바야흐로 흥선대원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안동김문 60년 세도의 몰락을 의미했다.  

     

     

    흥선군과 고종의 가계도 / 왕실의 방계였던 고종은 효명세자로 아들로 입적해 지위를 올리는 작업이 선행되었다.

     

    그 흥선대원군의 집권과정을 춘사(春士) 김동인이 <운현궁의 봄>이라는 소설로 썼다. 젊은 시절, 한국일보에서 독자 선물로 주었던 이 책을 정말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소설 속에서 흥선군 이하응은 완전 파락호에 상가집 개로 그려졌다. 소설 속에서 이하응은 안동김문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된 파락호의 행동을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지만 아무튼 소설은 이하응의 집권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는데, 그 대미(大尾)는 명복이 입궐하는 것으로 맺는다. 그리고 마지막 줄을 이렇게 썼다.  

     

    운현궁은 정치의 중심지이며 따라서 이 나라의 중심지로  되었다.…옛날  흥선이 관직을  내어 던진  이래 오랫동안 쓸쓸하기 짝이 없던 이 집에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1933년 4월 26일부터 1934년 2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것을 1948년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의 후손이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자면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왕실의 적통과는 거리가 한참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직계 왕실과의 촌수를 좁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왕실의 적통과는 거리감이 있었지만 안동김문이 헝클어놓은 왕의 계보는 이하응에게 되레 기회를 제공하였고, 이하응은 그 틈을 파고들어 마침내 제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운현궁은 흥선군이 헌종 11년(1845년) 왕실의 종친으로 토지 50결을 하사 받았을 때 구입한 듯하다. 물론 그때는 운현궁이라는 이름은 없었으나 명복이 왕위에 오르며 임금의 사저(私邸)는 곧 궁으로 승격되는 법도에 따라 운현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시대 기상 관측소인 서운관(書雲觀=관상감) 고개(峴)에 있는 곳이라 운현궁(雲峴宮)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비의 지원 하에 대대적으로 확장되었으니 북촌 아래의 고만고만한 집이었던 운현궁은 만 평에 이르는 대저택으로 바뀌었다.

     

    대원군은 호조에서 지원받은 1만7,800냥으로 1864년(고종 1)에 노안당과 노락당을, 1869년 이로당과 영락당을 건립했다. 아울러 운현궁의 담장은 창덕궁에 닿았으니 그 담장에 고종 전용의 경근문(敬覲門)과 흥선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이 세워졌다. 운현궁은 이름에 걸맞게 사대부 집이 아닌 궁궐 내전과 비슷한 형태와 규모로 조형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다시 줄었들었고, 한국전쟁 후 상당 부분이 팔리며 지금처럼 규모가 작아졌으나 과거에는 종로소방서, 덕성여대 종로캠퍼스, 경운학교와 교동초등학교를 비롯한 일대의 땅이 모두 운현궁에 속했다)

     

     

    운현궁 사랑채 노안당의 중문
    중문 안에서 보이는 수직사
    노안당의 앞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행해졌을 노안당
    노안당의 무량수각 글씨 / 흥선군은 추사 김정희의 애제자로도 유명하다.

     

    이곳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은 역사상 유일했던 대원군(임금의 살아생전 아버지)으로서 왕 이상 가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한국사 시험에 "다음 중 흥선대원군의 업적이 아니 것은?"이라고 묻는 문제들이 단골로 출제되곤 하는데,  반면 과실로서는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고집하여 근대 문명의 수용이 늦어진 점이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쇄국정책이 망국의 길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빠지지 않는다. 역사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모양새를 갖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당시 안동김문의 세도정치 하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했던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며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평가이다) 아울러 서양세력과 연합해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의 침노를 막으려 노력했다. 앞서 '1868년 덕산사건의 진실ㅡ도굴꾼 선교사 페롱' 등의 글에서도 띄엄띄엄 언급되었지만, 그는 쇄국론자나 천주교 탄압자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에 와 있는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의 집권자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과의 연합을 추진했다.

     

    그는 천주교에도 관대했으니 정실부인이자 고종의 생모인 부대부인 민씨와 큰딸, 그리고 고종의 유모 박씨 등 그의 집안 대부분이 독실한 천주교도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를 실망시키고 배신한 것은 오히려 선교사들로서, 흥선대원군은 그들의 이중인격에 대해 치를 떨어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서양에 문을 굳게 걸어 잠그게 되었던 것이다. 그 숨겨진 진실에 대해 들여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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