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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미국대사관과 쌍둥이 건물에 얽힌 비화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17. 02:05
광화문 광장을 지나가는데 누군가 미군철수를 외치는 일인시위를 하고 있었다. 구시대의 산물인 그 구호를 오랜만에 직접 듣고 보니 마치 살아 있는 화석을 접하는 듯 신기하다. 하지만 사라진 줄 알았던 광경의 리뷰에서 오는 감정은 잠깐의 호기심만을 유발했을 뿐, 곧 무감해져 그저 스쳐 걷는다. 다만 '이 사람은 왜 여기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바로 길 건너가 미국대사관으로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그러면서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서울에 처음 온 촌놈처럼. 그리고 그제서야 오랜 시간 미국대사관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던 건물 한 동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해한다. 그 건물이 없어진 것은 벌써 10년도 더 됐다. 그 자리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섰다.
그것을 진작에 몰랐던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세기 말 개항기부터 오늘날까지의 대한민국의 행보를 기록한 박물관으로서, 개장일인 2012년 12월 26일 무렵에는 초대 형식으로 들어가 볼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볼거리가 없을 것 같은 생각에 그때도 안 갔고 지금까지도 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생각이다) 오늘도 그 앞을 지나가며 내일을 기약한다.
미국대사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잇길로 들어서면 곧바로 종로구청이 나오는데, 현관 앞 화단에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집 터임을 알리는 푯돌이 있다. 그리고 그 앞은 옛 의정부이고 길 건너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이니 예나 지금이나 이 일대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심장부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서울 인문지리서인 <한경지략>에는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수송동)에 있었는데 지금 중학(서울에 설치된 국립 중등교육기관)이 자리 잡은 서당 터는 정도전 집의 서가가 있던 곳이요, 지금 제용감(왕실 의복의 염색과직조를 담당한 관청) 터는 정도전가의 안채 자리요, 사복시(궁중에서 사용한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관청)는 정도전가의 마구간 자리인데 모두 풍수설에 맞춰 지은 것이다」라고 소개했는데, 그 표석이 모두 지척이다.
한양 정도(定都) 후 저 경복궁과 광화문까지 다 완공시키고 나니, 이제 그 큰 집을 누가 차지할까 제 편끼리 싸울 차례가 됐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한민족의 DNA로 어쩌면 숙명처럼도 여겨진다. 정도전은 자신의 집을 나와 측근들과 남은(南誾, 1354~1398)의 첩이 사는 집에 모였다. 제 집에 있으면 공격받기 쉬우니 머리를 써 남은의 첩 집에서 회합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 밖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모두 집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아뿔싸! 대문 밖에 이방원의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휘두른 칼에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이 즉사했고, 남은은 생포됐다. 그 와중에서도 머리가 빨리 돌았던 정도전은 대문으로 나가지 않고 담을 넘어 이웃집으로 피했다. 이방원은 목표였던 정도전이 보이지 않자 그를 찾게 했고 결국 남의 집 광에 숨었던 정도전은 붙들려 길 쪽으로 끌려 나왔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남은의 목을 쳤다. 이후 사람들이 이곳을 정도전의 수명이 다한 곳이라하여 수진방(壽盡坊)이라 불렀다는 얘기가 <한경지략>에 전한다.
미국대사관 뒷길로 해서 다시 큰 길로 나왔다. 20세기말 미국대사관 뒷길은 늘 장사진을 이루었으니 미국 입국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이었다. 당시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소위 '인터뷰'라는 대사관 면접을 통과해야 했다. '인터뷰'란 내가 미국이란 나라에 입국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심사받는 일이었는데, 한마디로 미국에 도착해서 도망갈 놈인가 되돌아올 놈인가를 가려내겠다는 것이었다.
심사 기준은 역시 ₩으로서 ₩이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은 대부분 '리젝트'를 당했다. 그놈의 인터뷰 제도는 50년 이상 지속되다 2009년 한국이 비자면제국이 되며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2만불을 돌파할 무렵이었다. 달러를 흔히 불(弗)이라 부르는데, $과 弗이 비슷해서 라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얘기가 전한다.
미국대사관 건물에는 원래 '유솜'(USOM /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이 있었다. 유솜은 우리말로 '주한미국경제협조처'로, 대한민국이 지지리도 못 살 때 경제적 지원을 해준 기관이다. 원래 한국에 대한 지원은 6.25전쟁 이후 UN에서 해주었는데, 1959년 한국에 대한 원조권한이 유엔군사령관에서 미국대사로 이양되면서 유솜이라는 기관이 만들어졌다. 유솜은 돈이 없는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 국정을 맡아볼 한국정부청사를 지어주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이 현재 미국대사관의 바로 옆에 있던 문화체육관광부 청사(최종 사용처)였다. 그러니까 그 관청건물은 미국대사관보다도 먼저 착공된 건물이었다.
건축비는 500만불 가량이 지원됐고 지휘는 미 국무부에서 파견된 호러스 테일러(Horace Taylor)가 전권을 갖고 주도했다. 그는 미 공병대 준장 출신으로 콘크리트 전문가였다. 그래서 공병대 출신답게 단순하고 튼튼한 일직선상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을 지었는데, 그러면서도 선진적인 건축기법을 구사해 들보가 없는 판슬라브 구조를 취했고, 또 기준층 천장 높이를 3.15m로 일반 건축물에 비해 낮게 만듦으로써 수평이 강조된 입면구성을 꾀했다.
그리하여 이 건물은 8층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날렵하고 낮아 보이는 시각적 안정성과 모던함을 주었던 바, 이 공법을 배우기 위해 6,70년대 건축학과 학생들의 단골 견학 코스로도 활용되었다. 벽은 모두 10인치 이상으로 전쟁이 나도 끄덕 없을 듯보였는데, (벽이 너무 두껍고 단단해 훗날 엘리베이터를 증설하려다 구멍 내기에 실패해 포기했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콘크리트를 때려부었어도 건축비는 총 321만 달러로서 200여 만 달러가 남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원조자금이라서 되돌려보내기도 뭐한 마당이었다. 그러다 나머지 공터에 같은 건물을 하나 더 짓자는 결론이 났다. 똑같은 건물을 올리는 일이니 우선 설계비가 세이브되고, 요령이 생겼으니 건축비도 절감될 터, 나머지 돈으로 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렇게 하여 1961년 말, 또 한 동의 건물이 완공되었는데, 건축비는 230만 달러가 채 들지 않았다. 지원금 총 550만 달러로 원 플러스 원의 쌍둥이 빌딩이 완공된 것이다. 새로운 쌍둥이 건물에는 유솜 기관 자체가 입주하게 되었고, 이후 오른쪽 건물은 유솜 건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또한 역사의 장난이었을까? 첫번 째로 지어진 새청사에 입주한 기관은 일반 관공서가 아닌 5.16혁명정부의 국가재건최고위원회였다. 그 건물의 완공일은 1961년 9월 1일이었는데, 마침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국가재건최고위원회가 서둘러 새청사를 차지한 것이다. 하긴 그 기구가 입법·사법·행정을 모두 행사하는 혁명정부였으니 살림집으로서는 딴은 적격일는지도 몰랐다.
앞서 말했듯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군부 주체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후 국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혜화동 성당 뒤 가르멜 수도원에 숨어 있던 장면 총리를 4일 만에 붙잡았다. 체포된 장면은 즉시 총리직을 사임하고 내각 총사퇴의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장면 정부의 제2공화국은 출범 11개월만에 막을 내렸다. 장면 총리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주체세력은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하루 전인 1963년 12월 16일까지 존속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20명 이상 30명 이내의 현역 또는 예비역 장교로 구성되었으며, 행정처로 상임위원회·분과위원회·특별위원회, 실무지원을 위한 총무처, 대외선전을 위한 공보실을 두었는데 이 모든 기관의 우두머리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박정희 소장이었다. (정식명칭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바로 위의 사진은 새청사와 유솜, 그리고 중앙청을 한꺼번에 잡은 사진으로 박정희 의장의 집무실은 왼쪽 새청사 7층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당시 정부의 중요 부처가 들어서 있던 중앙청이 내려다 보였다. 모르긴 해도 청와대도 보였을 것 같은데, 이곳에서 박정희는 중앙청을 내려 보며 참으로 고민을 많이 했을 듯하다. '욕심을 내 저곳을 차지하느냐, 아니면 혁명공약 대로 민정이양을 하느냐'의 고민이었다. 그의 혁명 공약에는 분명 '과업 성취 후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이 쓰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육성으로도 "정권이양에 앞서 진정한 민주질서를 만들어내고 구악(舊惡) 재발 방지를 위한 기초작업을 완수한 후 물러나겠다"는 뜻을 여러 번 밝혔다. 하지만 그는 국민들 앞에 한 이 약속을 어기었다.
나는 그가 처음부터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쿠데타 당시의 초심은 아마도 군인으로 본분이 더 강했으리라 믿는다. 4.19혁명으로서, 즉 국민들과 학생들의 피로 이승만의 1공화국을 몰아내고 들어선 2공화국이었지만, 하는 짓이라곤 내내 신·구파의 쌈박질뿐이었다. 구파의 좌장은 윤보선 대통령이고, 신파는 장면 총리였다. (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였음) 그는 이것들을 모두 쓸어내고 정말로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나와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작금의 우리 국민들처럼.... 아마도 이것은 좌·우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집무실의 위치가 문제였다. 그는 눈만 뜨면 보이는 저 중앙청을 바라볼 때마다 초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1961년 8월 21일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했다. 1962년 초 정당 활동을 허용하고, 여름에는 군인들이 싹 물러나 민간에 정권 이양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1962년 6월 4일 최고회의 공보실장이자 대변인인 이후락이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다음날인 6월 5일자 각 조간 1면 머리에 이후락이 말한 내용이 대서특필되었다.
이후 국민 직선의 대통령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살살 일었다.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조기실시해야 한다는 관제(官製) 여론도 일기 시작했다. 물어보나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불때기였다. 그 무렵 동아일보는 7월 28일자 석간 1면에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을 실었다가 필진이 된통 당했다. <동아일보사사 권3>에는 그 전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설이 나간 이튿날 중앙정보부는 필자 황산덕을 연행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8월 2일 서울지법 부장판사 유태흥이 발부한 영장에 따라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 고재욱과 논설위원 황산덕이 구속되어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반공법 제4조와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3조 3항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사는 8월 6일자 조간 1면에 이 사건에 관한 「해명서」를 ‘사고(社告)’로 내보냈다.
지난 7월 28일자 본보 사설(「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하여 우선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문제화된 동 사설은 새 헌법 심의에 전 국민이 성의 있게 또 솔직하게 참여하는 중대한 마당에서 그에 대한 하나의 건설적인 의견 내지는 여론을 반영시키려는 뜻에서 집필 보도된 것임을 여기에 재천명하는 바입니다만, 다만 동 사설 중 ‘유엔 관계’ 구절에 있어서 그것이 어디까지나 "국제관계나 국제적 반응에 대해서도 신중하고도 합당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건설적인 주장을 하려는 본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에 일부 오해를 초래할 염려가 있었다는 점에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개헌 절차에 있어서는 국내·국외적 영향도 신중히 고려하여야 한다"는 동 사설의 취지와 진의를 여기에 다시 한번 해명하여 독자 여러분의 오해 없기를 간절히 부탁하는 바입니다.
동아일보 사장 최두선은 8월 8일 박정희를 방문하고 구속된 두 명에 대한 ‘선처’를 ‘요망’했다.이렇듯 펄쩍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1월,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의결한 후 12월 17일 국민 투표에 부쳤다. 국민 직선 대통령제가 골자인 헌법 개정안은 국민 78.8%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드물었다. 즈음하여 박정희는 안으로는 반대파들의 숙청 작업을 개시하였고, 밖으로는 이랬다 저랬다 하며 연막을 피우더니 (1963년 2월 민정 불참을 천명하였으나, 3월 16일 4년간 군정 연장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며 민정 불참 선언을 번복했다가 4·8성명을 내며 민정 참여를 굳혔다) 1963년 8월 30일 마침내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였다.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가 새로 창당된 민주공화당의 후보로 나선 가운데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 윤보선 후보로 압축되었는데, 선거 개표 집계에서 16일 밤까지 박정희의 패배가 점쳐졌다. 그러다 17일 새벽 호남 쪽의 개표함이 열리며 슬슬 표가 쌓이더니 결국 15만 6천여 표로 아슬아슬하게 박정희 후보가 승리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의 당선에는 전라도 농민층의 지지가 절대적이었다) 15만 6천여 표는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근소한 표차였고, 투표율은 85.0%였다.
박정희의 당선과 더불어, 정확히는 제3공화국의 시작과 더불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해산되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사용하던 광화문청사에는 경제기획원이 들어서 박정희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주도하였고,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견인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그 청사가 아직도 일반에게는 경제기획원 건물로서 익숙하다. (경제기획원은 과천 청사로 옮겨간 1986년 2월까지 있었고 이후로는 문화공보부 및 문화관광·체육부 청사로 사용됐다)
유솜은 1970년 5월 26일 정식으로 해체되었고, 유솜 건물에는 1968년부터 미국대사관이 입주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2021년 6월, 현 대사관이 옛 용산 미군 기지 내 캠프 코이너 부지로 이전하는 일이 최종 확정되었던 바,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함께 했던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도 조만간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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