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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한말 광화문 한성전보총국과 을미사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23. 01:48

     

    광화문광장 전기통신 발상지 기념탑

     

    인지도가 낮기는 하지만 광화문 광장에는 1885년 우리나라 전기통신이 처음 시작된 일을 기려 세운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이 서 있다. 높이 9m, 둘레 13m의 기념탑은 통신역사의 상징적 의미인 봉수와 안테나를 조형화하고 미래를 향한 비약을 형상화했다. 기념탑은 중견 조각가인 중앙대 심문섭 교수가 제작했으며 탑정면 비석에는 조병화 시인의 헌시 '빛과 소리의 고향'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이곳에 왜 기념탑을 세웠는가 하는 아래와 같은 자세한 설명문도 새겨졌다. 

     
     

    전기통신 발상지 기념탑 건립기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기통신이 발산된 한성전보총국이 자리했던 터다. 사역원(司譯院) 건물을 인수하여 1885년 9월 28일 문을 열고 제물포에서 첫 전신을 띄웠으며 2월 19일에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전선망을 넓혔다. 이로써 전신으로 필묵을 대신하고 전광으로 우편을 대신했으니 일순간에 천리를 통달하고 열개의 점으로 만언(萬言)을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후에 이 터에는 조선전보총국한성 한성전보총국사 총신원이 차례로 들어섰고 광복 후에는 광화문전화국이 차지함으로써 우리나라 전기통신의 씨앗이 이곳에서 뿌려져 이곳을 요람삼아 이곳에서 거목으로 자랐으니 이곳에다 미래의 시공(時空)을 향해 비약하는 뜻을 담은 기념탑을 세워 기리는 바이다. 
     
     

    정면에서 본 전기통신 발상지 기념탑
    기념탑 앞에 건립기와 조병화 시인의 헌시가 새겨졌다 / 「빛과 소리의 고향: 이곳, 이 자리는 우리나라 한국의 전기통신이 처음으로 그 빛과 소리를 비친 통신의 발상지....」

     
    이해력이 부족한 탓인지 건립기와 헌시까지 모두 읽었음에도 이 기념탑을 세운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전화나 전보를 보낼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電信)시설이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렇게 이해해도 뭔가 생경하고 공허하다. 이것은 기념탑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와도 무관치 않을 듯하다. 이 모뉴먼트가 세워진 해는 지난 2008년으로 벌써 15년이 지났다. 그래서 나름대로 알아보니 이 장소에는 구한말의 슬프고 비참한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런 사실을 빼고 말하려니 기념탑에 붙은 모든 설명이 생뚱맞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선 설치에 대해서는 <고종실록>에 "1885년 음력 6월 6일 조선과 중국이 체결한 '중조전선조약'에 따라 조선이 청나라 화전국(華電局)에서 차관과 인력을 빌려 설치했다"는 내용의 자세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보면 고종이 경복궁 건청궁 내에 전등을 설치할 때처럼 자발적으로 국제 전신국을 개설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청나라의 강압에 의한 가설이었다. 즉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의 진압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했는데, 이에 본국과의 연락을 위한 통신망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았으므로 설치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중국 독판 전보 상국(督辦電報商局)으로 하여금 조선 국왕을 만나 개설에 대한 압박을 가하도록 명하였고, 그 결과 제물포~한성, 의주~한성 간 육로 전선 1,130리의 가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에는 이를 실행할 비용과 인력이 없었던 바, 중국 화전국으로부터 차관과 인력을 빌려와 설치를 했다. 즉 당장에 필요 없는 일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금액의 차관까지 (강제로) 얻어야 했던 것이다. (청나라도 그만한 돈이 없었던 바, 영국은행으로부터 꿔서 빌려 주었다) 
     
    아무튼 1885년 9월 28일 제물포~한성 간의 케이블 작업이 완료되었다. 서울에는 조청전선조약에 따라 한성전보총국이 세워졌는데, 광화문 육조 거리에 있는 병조(兵曹) 내의 사역원 건물에 설치됐고,(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 자리) 제물포는 선린동에 분국(分局)이 세워졌다.*
     
    * 인천화교협회 건물 안에 있는 회의청(會議廳)이 한성전보총국의 인천분국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이는 2021년 주희풍(인천화교학교 부이사장)이 오랫동안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의 연구는 문헌에만 존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보국 위치를 찾았다는 점과 함께 베일에 싸였던 근대건축물 연혁을 보다 명확하게 보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선린동 8번지에 위치한 인천화교협회 회의청은 1910년경에 건립된 청나라 조계지 기관의 부속건물로 알려져 있었다. 주희풍은 이 건물이 1885년 완공된 한성전보총국 인천분국이라 단정하며 시기까지 끌어올렸는데, "회의청이란 명칭은 1950년대 화교자치구(인천화교협회 전신) 때 회의하던 용도로 건물을 쓰면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그간의 모호했던 궁금증까지 일소시켜 주었다. 
     
    청일전쟁 이후 오랫동안 방치됐던 인천전보국 건물은 1905년 중국 상인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 사무를 논의할 화상회관(華商會館·중화회관)으로 전용됐다. 이때까지도 건물 소유권은 조선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어느 시기 소유권이 중국으로 넘어갔는지는 불명확하다.  현재 회의청 건물은 인천화교협회 소유로 되어 있다. 
     
     

    세종문화회관 뒷편의 사역원 터 표석
    사역원 터 바로 옆의 한성정보총국 터 표석
    인천화교협회 건물 안의 회의청

     
    청나라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와 제물포 간에는 해저 케이블이 설치된 듯한데, 비슷한 시기, 부산과 나가사키(長崎) 간에 개설된 부산구설해저전선(釜山口設海底電線)이 가설됐고,(1884년 일본의 주도로써 덴마크 전신회사가 가설) 영국이 무단 점유한 거문도와 중국 상하이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을 부설한 것을 보면(1885년 5월) 그 작업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참고로 말하자면 1845년 최초로 영국에 해협해저전신회사 설립되어 영국~캐나다 간의 해저 케이블 부설 작업이 시작되었고, 1850년 영국 도버~프랑스 칼레 간의 해저 케이블이 부설되어 통신에 성공하였다.
     
    이어 청나라 정보총국은 본국에서 이어지는 의주~평양~한성까지의 선을 가설했는데,(1886년 2월 19일) 이 장거리 전선 연결 공사에 조선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기도 했다. 또 청나라는 전선 연결 사업이 끝난 후 관리·유지비 명목의 돈을 수탈했던 바, 조선은 빚(화전국 차관)을 내어 원치 않은 공사를 하고 거기에 조선 백성의 노동력과 돈까지 착취당하는 억울함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전보국을 없애야 한다"는 불만이 팽배했으나 힘이 없던 조선 조정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것은 그들의 요구조건으로까지 등장했다)
     
    이 전신망 작업은 구체적으로 원세개(袁世凱)의 작품이다. 원세개는 갑신정변 이후 감국대신(監國大臣, 조선을 감시·감독하는 대신)이라는 이름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10년 동안 조선에 주재하며 사실상 현대적인 의미의 식민지 총독 노릇을 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조선의 자력갱생을 방해하고 갖은 차관으로써 조선의 경제를 피폐화시키고 근대화를 가로 막았는데, 그와 같은 역할을 이 전신망이 담당했다. 본국의 이홍장은 이와 같은 원세개의 활약(?)을 매우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술이라고 칭찬하며 그를 도합 12년간이나 조선에 주재시켰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이 전신망을 청일전쟁 때(1894~1895년) 잘 써먹었을까? 그러리라 생각되지만 전혀 못 써먹었다. 일본이 전쟁 개시 직전 제물포~한성, 의주~한성 간의 통신선을 모조리 끊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패했고 이후 일본은 전신망을 접수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의 의도 대로 풀리지 않았으니 인천의 분국(현 회의청 건물)은 건립 당시부터 중국 소유가 아닌 조선 한성전보총국 인천분국 건물로서 전리품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한반도 내의 전신망은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차관을 빌려 완성한 조선의 공공재산이라는 사실을 중국측에서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본측에서도 조선 내 전신망 접수 혹은 사용의 의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04년 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이 임박해지자 일본 대본영(大本營)에서는 다시 조선 내 전신망의 접수 의지를 드러냈다. 이제 곧 한반도와 만주에서 전투가 벌어질 터, 조선 내 전신망을 일본과 연결시켜 운용함은 필수였다. 앞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에서도 언급했지만 조선국 왕비 시해라는 대사건(이른바 을미사변)은 일본 대본영의 최고 우두머리 두 명, 즉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대장과 야마가다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신이 러일전쟁의 개전에 앞서 한성전보총국의 통신선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었다.
     
    훗날 '정보전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가와카미 소로쿠는 과거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앞서 설치한 그 통신선을 확보함으로써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던 것인데, 하지만 친러파 민왕후가 전신망의 사용을 허락할 리 없을 터, 아예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가와카미는 자신의 계획을 가장 먼저 야마가다와 상의했고, 이어 총리 이토 히로부미, 노무라(野村靖) 내무상, 무쓰(陸奧宗光) 외무상, 요시카와(芳川顯正) 사법상과도 모의했다. 이토는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주한공사 이노우에를 야마가다가 추천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로 교체했다. 물론 민왕후 살해의 특명을 주어서였으니,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의 서막이었다.
     

    울미사건의 두 원흉 가와카미 소로쿠(왼쪽)와 미우라 고로

     
    이 을미사변을 기획한 가와카미 소로쿠에 대해서는 '조슈 5걸과 이와쿠라 사절단,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에서도 잠시 소개한 바 있는데, 그것을 다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가와카미가 을미사변을 일으킨 충분한 배경 설명이 된다. 
     
    ~ 이와쿠라 사절단에는 (독일재상 비스마르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훗날 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카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카츠라타로(桂太郎), 타무라이요조(田村怡与造) 등이 보불전쟁의 영웅 독일군 참모총장 몰트케와 회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전쟁에서의 정보전의 중요성, 전시 중은 물론 전쟁 전부터의 병력 배치의 중요성, 병력 수송과 보급에 관한 철도의 중요성 등을 배웠는데, 그의 가르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요인이 됐다. 
     
    광화문 광장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의 이면에는 이렇듯 복잡하고 기구했던 구한말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곳은 '우리나라 한국의 전기통신이 처음으로 그 빛과 소리를 비친 빛과 소리의 고향'이 아니며, 원세개 12년간의 조선식민통치 기념탑일 뿐이다. 이것이 과한 표현이라고 여기시는 분이 있다면 1885년 전신망 설치 후 1895년 청일전쟁에서 져 청나라가 패해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우리나라가 단 한 번이라도 그 전신망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광화문 광장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은 아픈 역사를 기념하자는 뜻도 아닌, 청나라가 식민통치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조선의 고혈을 짜 만든 전신망 시설을 마치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시인 양 위장한 그저 '거짓과 허울의 기념탑'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 위해 일본은 조선의 왕비를 잔인하게 시해했다. (다시 말하지만 을미사변은 미우라 고로라는 군인 출신의 외교관이 영웅심에서 벌인 행동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역사의 진실이 간과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옥상 위에서 광화문 광장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과 을미사변의 현장인 경복궁 건청궁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긴 한숨이 나온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바라본 경복궁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바라본 '전기통신발상지 기념탑'과 사헌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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