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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성지 남종삼 순교비· 남상교 청덕거사비· 상산군부인 송씨 묘비· 해운당대사 의징지비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5. 29. 01:07
병인박해의 현장으로 유명한 합정동 절두산 성당에 대해서는 앞서 몇 차례에 걸쳐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성당 마당에 있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 외에 남종삼(南鍾三, 1817~1866년 3월 7일) 요한의 흉상과 그의 순교사적비 등도 건립돼 있는데, 그와 관련된 것도 사진과 함께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재론하자면 남종삼은 홍문관 교리 출신으로 정3품 승지까지 오른, 당시 천주교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직책의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스 외방선교회를 통해 프랑스의 힘으로써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고자 연불방아론(聯佛防俄論: 프랑스와 연합해 나라를 지키려는 방책)을 창안해 흥선대원군에게 제안했다.
남종삼은 이 기회에 천주교 선교의 자유, 나아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흥선대원군은 그의 제안에 적극 동감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남종삼을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천주교는 가위 진실된 종교"라고 상찬하였고, 그가 제안한 연불방아론의 실천을 독려했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집안은 모두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었고(부인·딸·고종의 유모 등) 흥선대원군 역시 그 신흥종교에 배척하지 않았음을 물론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 루이 나폴레옹의 환심을 얻고자 했다. 훗날 조선교구 5대 교구장이 되었다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블뤼 주교는 로마 교황청에 띄운 편지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지금 한양에는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의 선교를 허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으며, 한양에 어울리는 큰 성당을 짓자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연불방아론의 열쇠를 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조선교구 교구장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1814~1866년 3월 7일)는 그런 정치적 거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이와 같은 구상에 대해 뜬끔없다며 비웃기까지 하였다. 베르뇌는 후대의 페롱이나 뮤텔처럼 선진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과 미개한 조선인에 대한 멸시감을 지닌 자로서, 천주교의 전도는 조선에 대한 시혜라는 그릇된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연불방아론라니,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연불방아책을 말하는 홍봉주나 남종삼의 말에 콧방귀를 꾸며 러시아는 우리와 종교가 다른 나라인데 (러시아는 동방정교회를 믿는다) 그 나라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냐는 엉뚱한 답을 하며, 시종일관 냉소적 대답으로 응대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제안한 미팅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만 남종삼의 간청에 의해 흥선대원군에 보내는 편지 한 통을 써 주었는데 그나마 불손하고 고압적인 충고로서 일관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에 오기 전 베트남과 청나라의 만주 교구에서 14년을 사역한 전력이 있었던 바, 한문 작성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천주교인 조기진을 통해 전달된 베르뇌의 편지는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동석했던 천주교인 김면호는 편지를 읽는 대원군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시골로 도망쳐 숨었던 바, 그 편지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이후 상황은 급변해 병인년(1866년) 3월 17일 남종삼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베르뇌를 비롯한 서양인 신부 4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효수에 처해지는데, 실록에 기록된 죄명은 아래와 같다.
의금부에서의, 죄인 남종삼과 홍봉주 등의 결안(結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종삼은 「윤리 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화란(禍亂)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며 감히 딴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른바 양학(洋學)은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사악한 학문인데, 자신이 높은 관리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이를 기꺼이 전하고 익혀 오랫동안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양학은 국법(國法)에서 금지해야 하는 것인데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사교(邪敎)는 정도(正道)와 배치되는 것인데도 도리어 사교를 정도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오랑캐나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아울러 아라사(俄羅斯)에 변란(變亂)이 있을 것이라는 말과 불랑국(佛浪國, 프랑스)과 조약(條約)을 맺을 계책이 있다고 한 것으로 말하면, 애당초 명백하게 근거할만한 단서도 없는데 요망한 말을 만들어내서 여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外敵)을 끌어들일 음모를 하였으니, 그가 지은 죄를 따져보면 만 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남종삼이 순교한 양화진 절두산 사적지에는 남종삼 순교 사적비 외에도 남상교의 청덕거사비가 있다. 남종삼의 백부(伯父)인 남상교가 풍기현감을 지냈을 때의 송덕비이다.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이승훈과 같은 1세대 천주교인으로 남종삼에게 전도한 것으로 보이나 천주교의 접촉 루트에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옆에는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姻)의 정실 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1801)의 묘표가 있다.
상산군부인 송씨는 강완숙 골룸바 등의 전도로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해 영세를 받고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그는1801년 신유박해 때 천국인 신부 주문모의 피난처를 제공했다가 발각되었고 영조의 계비이자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명으로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와 함께 사사되었다. 그 두 사람은 왕족의 첫 순교자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이 묘표에는 남편인 은언군과의 합장 사실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며 당시 강화도에 귀양 중이던 은언군이 사면되어 한양으로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니면 유골이 이장되어 합장되었을 수도 있다) 경기도 양주 이말산에 있던 그들의 합장묘는 한국전쟁 중 위치를 잃었고 묘표는 자리를 이탈해 방치돼 있다가 1989년 9월 7대손 이우용이 기증해 절두산 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상산군부인 송씨 묘표 옆에는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해운당대사 의징지비(海雲堂大師 義澄之碑)가 있다. 솔직히 말해 오랫동안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비석이다. 그러다 최근 관심을 갖고 알아보는 과정에서 많은 숙제를 안게 되었다. 우선 해운당이라는 당호에 대해 알아보았다. 해운당은 사명당대사 유정(惟政)처럼 법호(法號, 불가의 이름) 앞에 붙는 당호로서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른바 대덕고승에 속했던 승려였음이 분명하다.
불교 승려의 비석이 왜 성당 마당에 있을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더이상의 추적은 불가능했다. 그 외는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높이 91cm 폭 33cm의 이 크지 않은 이 비석에 다시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니 뒷면에 새겨진 '崇禎紀元後 戊寅 五月 日 立, 上佐 守堅 天心' (숭정 기원 후 무인년 5월 일 세움, 상좌 수견 천심)을 주목했다. 숭정(崇禎)이란 연호는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毅宗)의 연호로서, 숭정기원후 무인년은 1698년 즉 숙종 24년에 해당된다.
명나라는 이미 멸망한 나라였고 당시에 존재하던 청나라의 연호로 보자면 강희(康熙) 37년에 해당된다. 비석에 왜 멸망한 명나라 연호를 썼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니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마디로 정신나간 조선에서 창출된 기발한 발상이었다. 주자성리학에 몰입된 조선에서는 비록 망했어도 명나라만이 정통 중화(中華)의 나라였고, 청나라는 오랑캐로서 소중화(小中華)인 조선보다 못한 나라였다. 그래서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 숭정을 붙잡고 늘어졌던 것으로, 이와 같은 연호를 새긴 비석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비는 1960년 남종삼 요한의 후손인 남상철 프란치스코가 여주 주어사(走魚寺) 터에서 발견해 절두산 성당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1698년 상좌 수견 스님이 제 스승인 해운당대사 의징을 기려 세운 그 비석을 가져온 것일까? 알기 쉽게 묻자면, 그는 왜 남의 절 터에 있는 승려의 비석을 함부로 옮겨온 것일까? (여주문화원에 따르면 이 비는 해운당 의징의 승탑 옆에 서 있었다고 한다)
조금 더 깊이 알아보니, 이 비석이 옮겨진 이유가 전해지는 말과는 달랐다. 1999년 절두산 순교성지가 발행한 <한국 가톨릭 문화유산과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따르면, 해운당대사 탑비는 가톨릭 관계자들이 1973년 11월 경기도 여주 주어사 터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으로, 논 주인 이씨의 기증 승낙을 얻어 양화진 성당으로 옮겨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2017년 이 비의 취득 경로에 대해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에서 물었을 때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해당 비석은 부정한 방법이 아닌 정상경로를 통해 취득한 것이므로 환수 요청 대상 유물이 아니다"라는 답변을 보낸 것이 이 비석에 대해 양쪽이 취한 최종 행동이었다.문제가 되는 여주 주어사 지는 현재 광주 천진암처럼 천주교 성지로의 조성이 추진되고 있는 곳이다. 그 이유는 조선 천주교의 선구자 광암 이벽이 천주교에 대한 강학을 한 곳이기 때문이니, 프랑스인 샤를르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강학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 광암 이벽이 스님들의 안내로 눈길을 뚫고 강학 장소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벽이 활동하던 18세기 후반에는 이 절이 폐사되지 않은 상태였던 바, 그는 이곳 주어사를 빌려 주위 사람들에게 천주교 강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뜻깊은 장소임에 분명하다.
아울러 1816년 유배지 강진에서 돌아온 정약용이 1822년에 쓴 자신의 형 정약전의 일대기를 축약해 쓴 <선 중씨묘지명>에서는 궐철신도 1779년(정조 3) 이곳 주어사에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강학했다고 말한다.
"권철신은 일찍이 주어사에 머물면서 강학했다. 모인 이는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몇 사람이 있었다. 녹암(권철신의 호)이 규칙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에 세수하고 이를 닦은 후 숙야잠(夙夜箴)을 독송하며, 해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해질녁에는 서명(西銘)을 독송했다." (學李寵億等數人 鹿菴自授規程令晨起掬氷泉盥漱 誦夙夜箴 日出誦敬齋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 日入誦西銘)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이 절 터를 성지로 추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계의 입장은 다르니 이곳은 분명 전래되는 절 터로서 굳이 소유권을 따지자면 불교계에 우선권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불교계에서는 이 절이 신유박해가 있던 1801년을 기점으로 폐사가 되었다고 하며, 그 이유는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때 스님들이 희생되었고 절도 불태워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만일 불교계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억울한 일일 것이다. 반대로 불교계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해운당대사 의징지비가 절두산 성당으로 옮겨진 일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니, 논 주인 이씨의 승낙이 정상 경로의 습득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에 대해 어느 변호사는 이렇게 답했다.
"소유권자가 있으면 소유권자의 동의를 얻어야 되는 것이고, 만약 소유권자 여부를 알 수 없다면 유실물법에 의한 유실물 습득절차를 거쳐서 가져가야 정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가 다 국가 소유가 된 것 아닙니까. 절 땅에서 발굴한 것도 내가 못 갖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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