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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광흥창과 청장관 이덕무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7. 31. 22:21
조선시대 마포에 광흥창(廣興倉)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현재 광흥창의 위치에 설치된 표석에는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祿俸)으로 쓰일 양곡을 저장하는 창고터"라고 되어 있어 흔히 단순한 양곡창고로 오해할 수 있으나 호조에 딸린 엄연한 관청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흥창은 고려시대부터 존속해 온 관청으로, 1308년 충선왕 때 기존의 ‘좌창’이란 이름을 광흥창으로 바꾸었고, 조선시대 들어서도 명칭의 변경 없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설치 연도는 태조 원년이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니 광흥창은 또한 매우 중요한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잡과 출신의 중인급 관료들을 제외하고도 문과 출신으로 녹봉(祿俸)을 받는 관료만도 300명 정도 되었으니 직급과 호봉에 따라 녹봉을 나눠야 되는 광흥창의 업무량 또한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공무원의 급료인 녹봉은 녹(祿)과 봉(俸)을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봉은 요즘의 봉급, 즉 월급의 개념으로 매월 지급되었지만, 녹은 3~6개월 단위로 부정기적으로 지급되었기에 이에 따른 분류도 필요했다. 관원들은 녹봉지급일이 되면 호조에서 발급한 녹패를 가지고 광흥창에서 쌀·콩·옷감 등을 수령했는데, 1품에서 9품까지 차등이 있었으며, 갑오개혁으로 현금 지급이 실시된 1896년까지 향해졌다.
광흥창이 마포에 위치한 것은 부근의 염창(소금창고/마포 염창동이 여기서 유래됐다)과 마찬가지로 충청·경상·전라도의 삼남지방 및 경기도에서 조운(漕運)된 세곡미가 한강을 타고 내려와 이곳 마포에 집산되었기 때문인데, 원천적으로 부정의 소지가 내재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가 근무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다.
청장관은 이덕무의 문집 <청장관전서>에서 보여지듯 이덕무의 대표적인 호이다. 아울러 형암(炯菴)이라는 호를 사용했기도 했는데, 연암(燕巖) 박지원은 이덕무의 생애에 관해 쓴 <형암행장(炯菴行狀)>이란 글에서 청장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청장은 왜가리과의 해오라기의 별칭이다. 해오라기는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것만 쪼아 먹는다. 그래서 해오라기를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부른다."
청장은 이익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덕무의 철학이 담겨 있다. 박지원은 또 <형암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무관(이덕무)은 신축년(1781) 12월에 사근도(沙斤道, 경남 함양의 역참)으로 찰방(察訪) 제수되었는데, 사근역(沙斤驛)에는 해묵은 공채(公債)가 있어 매년 그 이자를 받아 공비(公費)로 삼는 관계로, 가난에 지친 백성들을 날마다 들볶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을 상관(上官, 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여 혁파하였는데, 이 덕분에 역민(驛民)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계묘년(1783) 11월에 내직으로 들어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정6품)에 제수되고, 갑진년(1784) 2월엔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로 옮겼다. 6월에는 적성(현 파주·연천 일대) 현감에 제수되었다. 적성에 있는 5년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다 최우수를 받았다.
적성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고, 공평하면 혜택이 두루 미치게 된다" 하였고, 남들이 간혹 녹봉이 박하지 않느냐고 하면, 문득 정색을 하고, "내가 한낱 서생(書生)으로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벼슬이 현감에 이른 덕분에,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고 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다만 임금님의 은혜를 찬송할 뿐이지 어찌 감히 가난을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무관은 젊은 시절부터 가난을 편안히 여겼다. 더러는 해가 저물도록 식사가 준비되지 못한 적도 있고, 더러는 추운 겨울에도 온돌에 불을 때지 못하기도 했다. 벼슬을 하게 되어서도 제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검소하여, 거처와 의복이 벼슬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한'(饑寒, 허기와 추위)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기질이 본래 부녀자나 어린아이처럼 연약하였는데, 나이가 거의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이 손상된 지 오래였다.
겨울에 날씨가 몹시 추우면 나무 판자 하나를 벽에 괴고 그 위에서 자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이 나자 병중에도 앉고 눕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의관을 다시 정제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계축년(1793) 1월 25일이요, 향년은 겨우 53세였다. 2월에 광주(廣州) 낙생면(樂生面) 판교(板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연암 박지원은 이덕무의 사후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 했을 정도로 청장관의 시문은 뛰어났고 인품 또한 훌륭했다.
이덕무의 무덤은 판교에서 용인으로 한 번 이장되었다가 다시 판교로 옮겨왔으나 2000년대 판교가 신도시개발공사로 몸살을 앓던 무렵 사라졌다. 생전에는 서얼의 설움 속에 살았던 이덕무는 사후의 유택마저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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