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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장각 검서관 청장관 이덕무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8. 3. 05:34

     
    창덕궁은 단연 조선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 중에서도 후원의 부용지(芙蓉池) 연못은 빼어남의 중심이다. 그래서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데, 예전에 어떤 외국인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부용지 연못가에서 느끼는 감정은 비단 나와 그 외국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통분모가 존재하리라 여겨진다. 공통분모는 물론 지극한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그 지극함의 정점에 규장각 주합루(宙合樓)가 있다. 


     

    어수문에서 본 주합루
    부용정에서 본 주합루
    부용지와 주합루의 주·야경

     
    이 주합루를 만든 사람이 정조다. 정조 임금은 1776년 3월 즉위하자마자 부용지 북쪽 언덕에 2층 건물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정조가 이 건물에 기울인 정성을 보자면 아마도 그 디자인까지 지시했을 듯싶다. 9월 건물이 완공되자 정조는 누각의 이름을 주합루라고 짓고 친히 쓴 어필에 금박까지 입혀 걸었다. 이것이 전부 6개월 사이에 속전속결로 진행된 것을 보면 정조는 이 주합루 건설을 세손 시절부터 궁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누(樓)는 2층 건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주합은 무슨 뜻일까?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청장관 이덕무(李德懋)는 자신의 문집 <청장관전서>에서 주합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규장각의 상층루가 곧 주합루로 임금이 명명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른다. 주합의 뜻은 위로는 하늘 위에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땅 밑까지 도달하고, 밖으로는 사해(四海) 밖에까지 나아가며 천지를 포괄하여 하나의 꾸러미가 되며 흩어져서는 틈이 없는 데까지 이름을 말함이다."

     

     

    영조의 친필인 주합루의 현판

     
    문자 그대로 '주합'은 우주와 합치되겠다는 웅혼한 뜻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정조가 지은 것이 아니라 <관자(管子)>에 나오는 말을 빌려온 것인데, 이덕무는 이를 다시 해석하여 "상하사방(上下四方)을 주(宙)라고 한다. 육합(六合)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육합은 아래와 위 그리고 동서남북을 가리키니 이는 곧 천지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하자면 정조는 이곳에서 천지와 어우러지는 훌륭한 정치를 펴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주합루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겉으로 보면 창덕궁 전체와 부용지를 감상하는 누각으로 보이지만 이 건물은 원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바로 왕립도서관이었다. 정조는 1층은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용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불렀고,* 2층은 열람실의 용도로서 주합루라 불렀다. (하지만 훗날 규장각이 인정전 서쪽 현재의 위치로 옮겨간 후로는 이 건물 전체가 주합루라고 불리었다)
     
    * 서울대 도서관인 규장각도 여기서 유래됐다. 창덕궁 규장각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혁파된 후 책만 남아 있었는데, 1910년 일제가 규장각을 해체하며 이왕직박물관 등에 흩어졌던 10만 권의 도서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지며 규장각의 명칭도 뭍어갔다. 
     

    정조는 주합루뿐 아니라 서향각과 희우정 등 주변 건물들도 규장각의 부속건물로써 활용하게 했는데, 그래도 좁고 (오르락내리락하기) 불편하다는 규장각 각신의 청을 받아들여 1781년 규장각을 창덕궁 내 궐내각사 중 가장 널널하다는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다. (오위도총부는 창경궁으로 이전함) 부용지의 규장각이 좁아지게 된 이유는 정조가 학문을 장려하며 자꾸 인원을 늘린 까닭이니 그중에는 체아직(비정규직)인 검서관(檢書官)도 있었다. 

     

    검서관은 기존에 존재하던 관직이 아니라 1779년(정조 3) 정조가 서얼을 규장각 비정규직 직원으로 채용하며 신설한 관직으로 <정조실록> 정조 3년 27일 기사에는 "처음으로 내각(內閣)에 검서관을 두었는데 서류(庶類, 서얼) 가운데 문예(文藝)가 있는 사람으로 차출하여 4원(員)을 두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네 사람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덕무,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이다. 

     

     

    인정전 서쪽 궐내각사 자리로 옮겨 간 규장각 / 안에 검서청 건물이 보인다.
    궐내각사 내 규장각 건물
    규장각은 정규직 각신들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검서관들이 근무하던 검서청 건물
    검서청 건물 / 비정규직임에도 금천이 흐르는 시원한 장소에서 근무했다. 다만 물이 잘 흐르지 않았다면 모기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다.(지금은 물길을 막아 물이 아예 없다)
    규장각 서고 / 각기 다른 건물이다.
    규장각 서고의 내부 / 국립고궁박물관

     

    검서관이 하는 역할을 쉽게 말하자면 정규직인 규장각 각신들의 보좌 업무였으니, 출간할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여 정규직 문신에게 제출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그리고 문신들이 임금 앞에서 강(講) 할 때 필요한 서류를 챙겨주거나 왕과 신하들 사이에 주고받은 논의를 기록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제출하는 업무도 맡았는데, 이 역시 요즘의 비정규직의 업무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일도 비정규직에 걸맞게 빡세서, 4명의 검서관이 꼬리를 물며 열흘에 한 번은 숙직을 해야 했다.(<청장관전서>) 

     

    아무튼 비정규직도 엄연한 직원이니 검서관들도 임금에게 똑 같이 교육 받았고,(정조는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왕이 아니라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왕이었다) 정조 임금이 즐겨 행하는 시험에도 마찬가지로 답안을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서얼 출신의 비정규직이 로열 패밀리 정규직 각신들을 누르고 시험에서 연이어 1등을 차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자가 바로 이덕무로, 연암(燕巖) 박지원이 쓴 <형암행장(炯菴行狀)>에는 그가 검사관이 되는 과정과 연이은 1등으로써 두각을 나타나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앞서 말했듯, '형암'은 이덕무의 아호로서, 이덕무는 박지원의 친구이자 제자인 관계이다) 

     
    형암은 기해년(1779년) 외각(外閣, 궐 밖에 있는 관청) 교서관(校書館)에 제수되었는데, 정조 임금이 등극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임금께서는 문풍(文風)이 점차 쇠퇴하고 인재가 묻혀 버림을 염려하여 문풍을 진작하고 인재를 발탁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영릉(英陵)의 옛일을 모방하여(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설치한 일을 흉내내) 규장각을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으며, 교서관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의 외각을 삼았다.

     
    그리고는 각신들에게 물어서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이 있는 자들로 외각의 관원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라는 관명을 하사하였는데, 이덕무가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임금께서 검서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는,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이라는 제목의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는데 이덕무가 장원을 차지했고, 이튿날 다시 '등영주'(登瀛州, 영주에 오르다)라는 제목으로 20운(韻)의 시를 짓게 했는데 또 장원을 차지하니, 두 번 모두 임금께서 상을 내리되 차등 있게 내리셨다. 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받지 못했던 인정을 비로소 임금에게서 받게 된 것이다.
     
    신축년(1781) 정월에 외각의 관직을 옮겨서 내각(內閣, 궐내각사)의 관직으로 만들도록 명하였으니, 이덕무가 규장각 검서관이 된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 3월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로 승진되었는데, 이로부터는 매양 본래의 관직에 검서의 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창덕궁 단봉문
    단봉문에서 바라본 궐외각사 교서관 자리 / 이덕무는 처음에는 궐내에서 근무하지 못하고 교서관에서 출판을 맡아보았다.
    창덕궁 옆 원서공원 입구의 사도시 터 표석 / 조선시대 궁중의 미곡과 장(醬)류를 당담했던 관청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은 이덕무는 일약 종6품의 사도시 주부를 겸임하게 된다.

     

    이덕무가 장원을 했다는 시제(試題) '규장각 팔경'은 창덕궁과 창경궁 내에 있는 규장각 유관 건물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모운한(奉謨雲漢) ㅡ 봉모당의 높은 하늘
    서향하월(書香荷月) ㅡ 서향각의 연꽃과 달

    규장시사(奎章試士) ㅡ 규장각의 선비들 시험

    불운관덕(拂雲觀德) ㅡ 불운정의 활쏘기

    개유매설(皆有梅雪) ㅡ 개유와의 매화와 눈

    농훈풍국(弄薰楓菊) ㅡ 농훈각의 단풍과국화

    희우소광(喜雨韶光) ㅡ 희우정의 봄빛

    관풍추사(觀豊秋事) ㅡ 관풍각의 가을걷이

     

    여기서 개유와(皆有窩)라는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도 않거니와 우리에게 생소하기도 하다. 하지만 동궐도에는 그 위치와 형태가 뚜렷하다. 개유와는 열고관(閱古觀)과 일체인 '丁' 자형 2층건물로서 개유와는 1층, 열고관은 2층 건물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봉모당 뒤 서고 근방에 위치했다. 이 건물 역시 정조 때 지어진 것으로서 개유와는 임금의 공부방으로 쓰였고, 열고관에은 청나라 강희제에 의해 간행된 <고금도서집성> 5,022책 등이 보관됐다.

     

     

    봉모당 / 역대 임금의 유품이 보관된 곳이다.
    서향각 / 주합루 서쪽의 건물로 책을 조판하거나 널어 말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서합루 밑 사정비비각
    개유와와 열고관 / 조선총독부 시절의 유리건판사진을 보고 그린 김영택의 펜화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유와와 열고관은 정조의 개인도서관이자 외국서적 전문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은 오직 정조와 규장각 학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열고관에 비치된 <고금도서집성>을 비롯한 청나라 서적은 위에 서 말한 이덕무를 비롯한 검서관 4명의 목마름을 채워주었으며, 실력 함양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이곳은 정조가 직접 편찬을 주관한 어정서(御定書) 2,400여 권과 4명의 검서관들이 편찬한 명찬서(命撰書) 1,500여 권을 비롯한 4,000여 권 책의 기초작업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와 같은 열정의 정조가 왜 문체반정을 일으켜 외국서적을 불태우고, 청나라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또 자신이 뽑은 서얼 출신 검서관들을 글을 읽을 줄 아는 원숭이쯤으로 비하해 심약했던 이덕무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문제에 대해 본문에서 결론을 지으려 했으나 글이 늘어져 아무래도 2편에 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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