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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통사 백사실 계곡의 꼴불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8. 13. 06:57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반면 길눈은 어두운 편이다. 그래서 목적지를 찾지 못해 엉뚱한 곳을 헤멜 때가 다반사이고 심지어는 GPS를 앞에 두고도 반대 방향으로 갈 때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찾지 못한 곳이 창덕궁 옥류천 밖의 북장문이다. 창덕궁 후원은 지금 개방되어 들어갈 수 있으나 옥류천 쪽은 여전히 개방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창덕궁 안에서 북장문을 찾는 것을 불가능하고 밖에서 보아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그곳을 찾을 수가 없다.
북장문을 가고자 하는 이유는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가 달아난 곳이기 때문이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거사에 성공한 개화파는 경우궁과 계동궁에 고종과 민왕후를 이거시켰다. 창덕궁은 사방이 오픈돼 있어 예상되는 청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경우궁을 택한 것이나 민왕후가 불편하다며 하도 칭얼대 근방에 있는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의 집(계동궁)으로 옮겼다가 결국 창덕궁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패착이 되었다.
이때 청군의 창덕궁 공격을 지휘한 자가 바로 원세개였다. 원세개의 공격에 패퇴한 개화파는 다시 고종을 어가에 태워 북장문으로 달아났고 상황이 불리함을 인지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정난교, 이규완 등은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함께 인천으로 튀었으나, 지금의 성균관대학 쪽 북묘에서 고종의 어가를 호위하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의 총칼에 짓밟혀 조선의 사관생도들과 더불어 처참하게 죽었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을 밟고 싶었으나 북장문을 끝내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상한 것은 예전에는 분명 고려사이버대학 쪽 산길에서 북장문은 물론 그 너머 창덕궁 후원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산길이 폐쇄되었을 수도 있다) 반면 길치라서 득템한 경우도 있으니, 부암동 백석동천이 그곳이다. 백석동천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문화재청 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발견한 장소로 소개해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해서 6개월 동안 청와대에 '유폐'돼 있을 때, 밖에 나갈 수도 없었던 처지의 노대통령이 청와대 여기저기 다니다가 청와대보호구역 안의 백성동천을 발견했고 여기에 대해 문화재청장인 자신에게 물어 유 교수 자신도 그런 곳이 있는 줄 알았다며 길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금은 청와대 경호구역 안에 있지만 필요하면 문화재청이 가져가라"고 한 것을 계기로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백석동천이 소탈한 성격의 노 전 대통령의 통 큰 결정에 의해 민간에 개방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백석동천을 발견했다는 설명에는 어폐가 있다. 백사실 계곡, 혹은 백석동천은 부암동 근방에서 오래 살던 사람들은 사실 다 아는 곳이었다. 다만 그곳이 1.21사태(1968년 북한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청와대경호구역으로 편입돼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고, 그렇게 폐쇄된 후로는 잊혔던 것뿐이다. 볼 수 없으니 잊히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곳이 일반 개방된 것은 아마도 숙정문 구간이 개방된 2007년 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전에 백석동천을 다녀왔다. 알고 찾아간 것은 아니고 인왕산 부근 산 길에서 길을 잘못 찾아 우연찮게 들어가게 된 것인데, 그때 나도 '뭐 이런 곳이 다 있네'하며 눈이 휘둥그레져 둘러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도 잊히지 않은 불유쾌한, 그리고 순간적으로 입안의 침이 말라 말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던 기억도 동반된다.
당시 나는 산을 내려와 지금의 현통사 입구 쯤에서 나갈 곳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줍게 주변을 서성이다 어디선가 달려온 경비원 복장의 한 사람과 민간인 복장의 다른 사람에 의해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1시간은 충분히 걸렸을 오랜 조사 끝에 무사히 풀려나가는 했지만, 충분히 공포스러웠던 시간이었다. 그때로부터 한참이 지났음에도, 나는 지금도 민간인 복장의 그 남자의 생김새와 억센 지방사투리가 생생해, 혹 길에서 보거나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를 들어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틀림없이 알 것이다.
그 남자는 혐의 없음이 입증돼 풀어주는 마당에도 '앞으로는 똑바로 알고 다니라'는 고압적인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 말만 안 들었어도 괜찮았을 것을, 그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던지..... 당시 길을 잘못 찾아 개구멍 속으로 들어간 내가 잘못한 것인지, 경비에 부실했던 그들이 잘못한 것인지는 지금도 판단이 잘 안서지만, 만일 재판을 했다면 승소하지 않았을까 한다. 얼마나 분했던지 그때는 소송을 걸까도 생각했었다. 정말로 그때는 어떠한 종류로라도 그 상대에게 불이익을 선사하고 싶었다.
어제 그 괴로웠던 추억의 장소를 십수 년만에 다시 찾았다. 태풍이 '카눈'이 물러간 날, 불현듯 현통사 문 앞에 생겼을 폭포수가 생각났던 것이다. (이 폭포는 제주도 엉또폭포처럼 비 온 후만 생겨나는데 그 물줄기가 엉또폭포만큼 장쾌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때처럼 비 개인 휴일에 집을 나섰다. 그때로부터 수백, 수천 년이 지난 것도 아니니 산도 물도 그대로였다. 폭포수도 아래 사진처럼 장쾌했다.
아 아, 그런데 여기도 꼴불견이 하나 있었다. 그걸 말하기 위해 작년 이맘 때(2022. 8. 17) 유명 블로그 '리자의 하루' 에서 올린 현통사 입구 폭포 사진을 먼저 게재했다. 그 아래 사진은 어제 내가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인데, 일부러 똑같이 찍은 것은 아니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다리 난간을 최대한 피해 포커스를 맞추면 위 배경의 사진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위, 아래의 사진은 무언가 하나가 뚜렷이 다르다. 숨은그림 찾기처럼 한 번 맞춰보시길. (폭포 수량이 다른 것은 답이 아니다. 수량은 자연의 힘에 지배되는 것인 만큼 정답에서 배제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썰을 하나 더 풀자면 위 현통사는 조계종이나 천태종 같은 불교종단에 속하지 않은 독자적인 절로서, 석가모니를 교조로, 고려시대 보우국사를 종조로 하여 1988년 일붕 서경보(一鵬, 徐京保, 1914~1996) 스님이 만든 불교의 새로운 종파,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에 속한 절이다. 대한불교 일붕선교종은 석가모니의 근본 교리를 바탕으로 직시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을 종지로 삼는다고 한다.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사찰들과는 다르게 독성전, 칠성각, 삼신각이 모두 존치돼 있고, 그 역할이 강조됨이 특이하다.
위 문제의 정답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다 답을 찾았을 것이기에. 그래서 조금 화가 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내부적으로 보면 분명 절을 짜임새 있게 만들었던 선각(先覺僧)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사찰 생활폐수를 처리하는 파이프를 밖으로 노출시킨 무례함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서울 시내에 이만한 계곡과 사찰은 드물다. 그리고 그 계곡은 백석동천과 이어져 서울 시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선경(仙景)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 계곡의 입구에 굵은 흰색 PVC 파이프가 길게 노출되어 있다. 이는 자연에 대한 무례함이자 백석동천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백석동천 별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영·정조 때 문인인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 1720∼1783)의 시라고 한다. "춘대의 수석은 스스로 해마다 있었건만 산 계곡에 별천지가 있다는 것은 이제 처음 알았네. 동쪽 흐르는 물의 근원을 찾아 오르니 허씨(허필) 정자 앞에 산단화가 만발했네...."로 시작되는 시라 하는데, 필시 그 이광려의 호를 새겼을 '월암(月巖) 바위'를 끝내 찾지 못했다. 안내문 그림 지도에는 분명 별서 근방으로 돼 있는데 길눈이 어두워서인지 몇 번을 헤매고도 이르지 못했다. 올 가을 단풍철에 다시 가 필히 찾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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