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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환향녀가 몸을 씻은 홍제천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3. 8. 17. 00:19

     

    흔히 이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말할작시면 서울 북쪽의 홍제천을 빼놓을 수 없다. 홍제천은 종로구 평창동 위의 북한산 문수봉·보현봉·형제봉에서 발원, 서대문구 홍제동·남가좌동·성산동 등을 거쳐 서강(마포쪽 한강)에 합류되는 총 8.52㎞의 하천이다. 평창동은 앞서 말했듯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외곽 방위를 맡았던 총융청(摠戎廳)의 창고 평창(平倉)에서 지명이 유래됐고, 언뜻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남가좌동의 가좌라는 이름은 천(川)에 가재가 많아 생긴 가재울이라는 지명이 한자로 음차된 것이다. 홍제천은 그만큼 맑고 깨끗한 강이었는데, 중간에 특별한 오염원이 없으니 당연한 깨끗할 수밖에 없었다. 

     

     

    평창동 아래의 홍제천 물줄기
    세검정 위 계곡에서 급해진 물줄기는
    세검정 아래서 일시 잔잔해졌다가
    탕춘대성 오간수문 밑 낙차를 만난 후
    다시 물살이 급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그 홍제천이 당연히 마포 서강까지 이르렀겠으나 지금은 홍제동 유진상가 앞에서 끝난다. 1970년 홍제천 위에 유진상가가 건립되며 복개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유진상가는 요즘 말하는 주상복합아파트의 원조 같은 형태이나 원래는 군사적 목적으로 건립됐다. 그래서 1층 필로티 사이의 넓이와 높이는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광대한 규모이니 이는 유사시 탱크 주차장으로 쓰기 위함이었고, 더 유사시에는 아예 건물자체를 폭파시켜 북한군의 탱크 진입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6.25 당시 소련제 T-34 탱크에 당한 트라우마는 그만큼 컸던 것 같다.  

     

     

    홍제동 유진상가 (부분)
    홍제동 유진상가 (반대 쪽에서 찍은 사진)
    홍제동 유진상가 (서대문구청 제공사진)
    넓직한 필로티를 보여주는 사진

     

    홍제동과 홍제천의 이름에는 이보다 더한 역사의 아픔이 따른다. 홍제(弘濟)란 '넓게 구제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넓게 구제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상기하자면 다시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로 거슬로 올라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한 궁녀가  한글로 지었다고 하는 <산성일기>와  이조판서 최명길이 명나라 도독 진홍범에게 보낸 보고서를 꺼내 읽어야 한다. <산성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패배 후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66만 명이요, 최명길의 글에 따르면 50만 명이었다. 그중 여자가 20만 명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는 약 1000만 명이었다)

     

    포로들 중 남자들은 궁궐 건축에 동원되거나 농장 노예로 일했고, 여자는 청국인의 첩이 되거나 화류계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이들 중의 일부는 훗날 청나라와의 관계가 무난해졌을 때 해방돼 돌아왔다. 그런데 이들 중 남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환영을 받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이른바 환향녀(還鄕女)는 지탄받았다. 이것이 '화냥년'의 어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고국에서는 환대는커녕 오히려 살아 돌아온 죄를 물었던 바, 고생 끝에 돌아온 고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개중에는 다시 수천 리 길을 걸어 청나라 심양으로 되돌아간 자들도 있었다. 

     

    이에 임금은 이조판서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 환향녀들을 널리 구제할 길을 찾았다. 회절강(回節江, 절개가 회복되는 강)으로 지정된 전국의 유명 하천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이 회복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요,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처벌하겠다는 명을 내린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환향녀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었으리라 본다.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붙잡혀 처벌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최명길의 말처럼 당시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정절이거늘, 이것을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더 나아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 이것이 당대의 못난 조선이라는 나라의 현실이었다. 그러고도 조선의 신료들은 좌우로 나뉘어 서로 옳다고 싸웠고, 환향녀들은 상처를 달래며 서울의 회절강으로 지정된 홍제천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당시 그들이 많이 모여 몸을 씻은 곳이 홍제교 아래로 알려져 있다.

     

    홍제교 다리가 있던 곳에는 앞서 말한 유진상가가 건립되며 옛 자취는 흔적이 사라졌지만, 복개천 바로 뒤에는 아직도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위 복개천 끝자락은 홍제교의 명칭을 전용해 사용한다. 넓게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필시 환향녀들이 몸을 씻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정말로 억울한 자도 있었을 것이나 당대는 이에 대한 변명조차 허락지 않을 터, 그저 숨을 숙이며 살다 여생을 마쳤을 것이다. 아래 글은 연세대 함재봉 교수가 미국의 어느 대학도서관에서 미국인이 번역한 중국 측 사료  왕수초의 <양주십일기(楊州十日記)>를 발견해 언급한 내용이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쳤을 때 그들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민가에 들어가 여자들을 겁탈했다. 그때 청나라 군사들이 저들끼리 떠들기를, "우리가 고려(조선을 고려라고 표현함)를 정복했을 때는 수만 명의 여자를 포로로 잡았지만, 그중에서 단 한 명도 정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같은 대국 여자들은 어찌 이리 수치심을 모르는가?"

     

    이것은 청군이 조선 땅에서의 경험을 말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수많은 여자들은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불속에 뛰어들거나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혹은 칼로 제 목을 찔렀다. 그것이 그들을 겁탈하려 했던 청군의 뇌리에 박혔던 것이다. 다만 이것은 조선 땅에서의 일이니 청나라에 집단으로 끌려간 여자들은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지만큼은 같았을 터인데, 저 잘났다고 떠드는 조선의 사내들은 실은 저 오랑캐 군사만도 못한 놈들이었다.  

     

     

    홍제교 다리 주변
    홍제교 위 홍제천 풍경
    왜가리와 청둥오리도 산다.
    유진상가 반대 쪽의 홍제교 터 표석
    옥천암 백불 / 여인들은 필시 부근의 이 불상 앞에서도 무사 귀향을 빌었을 터이다.
    무라카미 코지로가 <Corea e Coreani>(1904)에 실은 옥천암 불상
    육영공원 선생 길모어가 <Korea form its Capital>(1892)에 실은 옥천암 불상
    옥천암 백불 앞 홍제천의 청둥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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