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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사변의 현장을 가다 / 명성황후가 시해된 정확한 장소는?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3. 8. 19. 23:54

     
    1895년(을미년)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은 삼국간섭과 맥을 같이 한다. 삼국간섭은 문자 그대로  세 나라가 간섭한 일로서,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챙긴 요동반도를 러시아·프랑스·독일 세 나라가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게 만든 사건이다. 만주에 대해 침을 흘리던 러시아는 그 만주의 한 구석을 빼앗은 일본을 심히 못마땅히 여겼던 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그와 같은 요구를 들이댄 것이었다.
     
    그  세 나라를 상대해 싸울 힘이 없었던 일본은 애써 얻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열이 받는 판에 조선의 실세 왕비 민왕후가 얼씨구나 하며 러시아의 편을 들었다. 일본이 러시아에게 꼼짝 못 하고 당하는 상황을 목도한 민왕후가 청나라에서 러시아로 재빨리 배를 갈아탄 것이었다. 이에 여러 가지로 화가 나던 일본은 마침내 민왕후를 처치하기로 마음먹고 왕비의 처소인 경복궁 건청궁에 자객들을 보내 시해하니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조선4천년비사>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

      
    아직까지 일부 역사책에는 을미사변을 일으킨 자가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라고 기술돼 있으나, 이와 같은 큰일을 일본공사 혼자 벌였을 리 만무하다. 이것은 개인이 벌이기는 너무 거대한 판이었으니, 앞서 여러차례 설명한 대로 그 배후에는 일본 내각과 대본영(大本營) 수뇌부의 야합이 있었다. 이름만 재론하자면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대장과 야마가다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신, 이토 히로부미 총리, 노무라(野村靖) 내무상, 무쓰(陸奧宗光) 외무상, 요시카와(芳川顯正) 사법상 등 굵직한 대가리들이 총망라됐다.
     
    그들이 특명을 주어 파견한 미우라 고로는 1895년 10월 3일, 남산 일본 공사관 밀실에서 민왕후 암살 계획을 세웠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하바드와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비서 시바 시로(柴四郞), 공사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가 짠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왕비 시해 후 그 범행을 처우에 불만을 품은 조선훈련대의 만행으로 둔갑시키기로 결론짓고 10월 10일을 디-데이(D-day)로 정했으나, 군대해산령이 일찍 내려지는 바람에 10월 8일로 계획이 앞당겨졌다.  
     
    8일 새벽, 일본 대본영에서 직접 파견된 미야모토 다케다로(宮本竹太郞, 명성황후를 최초로 찌른 놈) 소위와 서울의 일본 신문사인 한성신문사 사장 아다지 겐조,(安達謙藏, 일본 무뢰배들을 동원한 놈)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훗날 육군대신에 오르게 되는 자로 동원된 놈들의 총지휘를 맡았다) 그 세 놈을 앞세운 일본군과 무뢰배, 그리고 조선훈련대 대대장 이두황(李斗璜), 우범선(禹範善)이 지휘하는 조선군 동조세력이 경복궁 건천궁으로 쳐들어갔다.  
     

     

    가와카미 소로쿠와 구스노세 유키히코 (오른쪽 두 넘)
    2023년 5월 일본 경매에 나온 우범선의 글씨 / 우범선이 일본 망명 중 쓴 글씨이다.

     

    새벽 5시 반 경, 일본군 수비대 제3중대와 제1중대를 일선으로 뒤로는 아다지 겐조가 동원한 무뢰배들이 광화문을 넘어 들어왔고, 그들을 조선훈련대 배신자 무리들이 엄호했다. 이때 광화문 안에서 미국인 장교 다이(William McEntyre Dye)가 지휘하는 궁궐 수비군 조선시위대의 발포가 있었으나 곧 화력에 밀려 도망쳤다.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춘생문(경복궁 동북문)과 추서문(경복궁 서북문)에서 준비하고 있던 다른 패거리의 일본인들도 곧 담을 넘어와 목적지인 건청궁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건청궁 앞에서도 조선훈련대와 일본인 무뢰배의 충돌이 있었으나 화력과 쪽수에서 밀린  조선군은 금방 와해돼 신무문 쪽으로 달아나고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은 사살되었다. 
     
     

    경복궁의 조선시위대 / 뒤에 보이는 문이 광화문이다.
    윌리엄 다이( William McEntyre Dye, 1831~1899) / 남북전쟁의 퇴역 장군으로, 조선 훈련대 교관으로 고빙되었다가 을미사변을 만났다.
    조선시위대가 달아난 신무문
    1890년 제임스 모펫 선교사가 찍은 신무문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일본 무뢰배들은 건청궁 앞에 모여 안으로 쳐들어갔고 조선인 동조자들은 밖을 지켰다. 일본군들과 무뢰배는 임금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처소 곤녕합(坤寧閤)으로 몰려들어 민왕후를 찾기 시작했다. 먼저 장안당에 칩입한 무뢰배들은 고종과 왕세자, 왕세자빈을 협박하고 윽박지르며 왕비의 위치를 다그쳐 물었고, 그 과정에서 고종은 무뢰배들이 찍어 누르는 힘에 의해 무릎 꿇려졌으며, 세자는 상투가 붙잡혀 방바닥에 패대기 쳐진 후 칼등으로 목덜미를 세게 얻어맞았다.

     

     

    건청궁 입구 / 1873년(고종 10) 처음 건립됐다.
    당시의 건천궁 / 뒤쪽으로 1893년 지어진 관문각이 보인다.
    고종의 처소인 장안당
    가장 혼란스러웠을 장안당 서온돌
    향원정 정자가 바라다 보이는 장안당 추수부용루
    무뢰배들이 몰려들었을 장안당 곤녕합 사이의 복도각

     

    이를 본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재빨리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으로 달려가 궁녀들과 민왕후를 깨웠는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무뢰배들이 곤녕합 안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이경직은 곧장 그들을 막아섰으나 총과 칼을 연이어 맞았고, 곤녕합에 들이닥친 무뢰배들은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며 왕비를 찾았다. 여기까지는 조선 왕비 시해에 관한 모든 기록이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민왕후가 살해된 장소에 대해서는 각각 다르게 적고 있는 바, 
     
    일본영사관 일등영사였던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해 본국에 보고한 <우치다 보고서>의 보완서 격인 <한국왕비살해 일건(一件)>이라는 시해 보고서에는 ①건청궁 내 알 수 없는 장소에서 왕비를 끌어내었고 ②그녀를 장안당에서 10m 정도 떨어진 마당으로 끌고 가 살해하였으며 ③시신을 옥호루에 잠시 두었다가 ④건청궁 밖 녹산에서 불에 태웠다 하고,

     
     

    일본 영사관이 대본영에 올린 왕비살해 보고서
    <한국왕비살해 일건(一件)> / 2013년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가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기밀 문서이다.

     

    필시 다이 장군에게 상황을 전달 받아 기록했을 주한영국영사 힐러의 <힐러 보고서>에서는 ①일본군과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이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세자 및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②궁내부대신 이경직이 왕후에게 급보를 전한 후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③무뢰배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이경직의 행동은 오히려 무뢰배에게 (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피를 흘리며 죽었고, 그때 왕후는 뜰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⑤무뢰배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리쳤고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⑥그중 한 둘의 시신이 뒤쪽 숲에서 불태워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고 되어 있으며, 
     
    필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게 상황을 전달 받아 기록했을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베베르 보고서>에서는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②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③그는 왕비를 바닥에 밀어 넘어뜨리고, ④그녀의 가슴팍을 발로 세 번을 짓밟고 칼로 찔러서 죽였다고 되어 있다. 
     
    * 우크라이나 출신의 건축가로 왕궁 건물을 비롯한 구한말의 많은 건축물을 건조한 사바틴이 을미사변의 목격자가 된 것은 왕실 보호 시위대의 역할을 해달라는 고종의 요청을 수락한 결과였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살해 위협에 불안해하던 고종은 위의 두 사람에게 요청해 1895년 9월부터 다이 대령을 궁궐 수비대인 조선시위대 대장으로, 사바틴을 부대장으로 기용했다. 외국인들이라 일본인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들이 지휘하던 시위대들은 일본군과 무뢰배들의 공격에 도망가고 그 두 사람이 남아 명성황후 시해와 시체 유기까지를 목격하게 된다.


     

    사바틴이 증언한 명성황후 시해 장소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사바틴의 증언서 (부분)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 / 1900년대 초에 찍은 사진으로 뒤에 관문각 건물이 보인다.
    곤녕합
    곤녕합에서 바라본 관문각 자리 / 사바틴은 이곳 관문각에서 머물다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관문각 현판 / 국립고궁박믈관
    가장 혼란스러웠을 곤녕합 안 공간
    무뢰배들이 몰려왔을 곤녕합 복도각
    궁녀 방의 문짝
    '가장 혼란스러웠을 공간'이었을 이곳을 지나면 곧
    왕비의 침소인 정시합(正始閤)이 나온다.

     

    그렇다면 민왕후은 어디서 시해된 것일까? 장소를 보다 쉽게 규명하기 위해 문화재청의 부감 사진과 그림을 빌려왔다. 사진의 화살표가 곤녕합이고, 그림의 1. 2. 3. 4 각각의 번호는 지금까지의 시해 장소에 대한 4가지 설(바로 아래 그림)의 번호를 옮겨 적은 것이다. 그리고 화살표 방향은 각 보고서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실리는 <힐러 보고서>와 <우치다 보고서>에 의지한 왕비의 도주 방향을 추정해 그린 것으로, 이것은 앞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 에도 올린 바 있다.
     
       

    건청궁 / 화살표가 곤녕합이다.
    명성황후 시해 장소에 대한 4가지 설에 대한 도해

     
    그런데 오늘, 건청궁이 한시개방된 기회를 이용해 직접 실내로 들어가 살펴보니, 앞서 나의 생각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간의 여러 설들, 즉 무뢰배들이 궁녀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왕비가 어디 있는가를 한 명 한 명 물어보며 찾았다거나, 가슴을 확인하여 젖이 가장 처진 40대 여인을 찾았다거나, 세자를 데리고 와 위협하며 왕비를 찾았다거나, 혹은 숨어 있던 민왕후가 앞으로 나서며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다거나 하는 것들에 조금은 현혹돼 의지하였으나, 
     
    하지만 막상 현장을 보니 이상의 이야기들은 거의 낭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그 장소가 너무 협소해 이 같은 시추에이션이 연출된 공간이 없어 보였고, 왕비가 숨을 공간도, 뛰어 밖으로 달아날 복도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뢰배들이 처소로 들이닥쳤을 때까지 가만있을 사람은 없을 듯하니, 정시합에서 잠을 자던 왕비는 놀라 깨어 얼른 정시합 뒷문을 열고 달아났을 터이다. 
     

     

    곤녕합 정시합의 왕비의 침실 / 왼쪽에 정시합 현판이 보인다. 정면 문 열려 있는 곳이 욍비의 침실이다.
    왕비 생활실 곤녕합 정시합 안내문 / 쉽게 말하자면 곤녕합 중에서 왕비의 침실 쪽 호칭이 정시합이다.
    정시합에서 바라본 장안당과 관문각 사이의 통로
    민왕후는 황급히 정시합 계단을 뛰어내려와
    정시합과 복수당 사이의 협문으로 달아났지만
    관문각 앞 살구나무 부근에서 붙잡혀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이날 동원된 무뢰배에 의해서 작성된 <에조 보고서>에 의지한 낭설, 즉 민왕후가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윤간당하고 시간당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지만,(실제로 소설로도 출간됐다) 상식적으로 볼 때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단체로 무슨 환각제를 복용한 것도 아닐 텐데, 칼에 찔려 피가 낭자한 시신에 그러한 짓을, 그것도 다이 장군과 사바틴 등의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벌인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의 히젠도 역시 을미사변 때 사용된 것만 확실될 뿐  민왕후를 시해한 칼이라는 증거가 없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V-미야모토와 우범선의 최후'

     
     

    그렇게 보면 곤녕합 앞 안내문의 설명 중 맞는 것은 민왕후가 1895년 10월 8일 살해되었는 사실 뿐이다.
    우범선의 증언에 의하면 녹산에서 불태워진 민왕후의 시신 중 타다 남은 것은 이곳 향원정 연못에 던져졌다.

     

    을미사변 이후 곤녕합은 버려졌다. 아울러 고종도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이거하며 건청궁 전체가 방치되었다가 1907~1909년 사이 사라졌다. 이후 일대는 폐허로 존속되다 1938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건립됐고,(1998년까지 존속) 집옥재를 비롯한 나머지 부지에는 1961년 5.16 군사혁명에 성공한 쿠데타의 무리들이 청와대 보호의 명목으로 30경비단 사령부를 두고 군부대를 주둔시켰다.(이른바 5160 부대) 그리고 그 사령부에서 1979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모의해 성사시켰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쓰였던 (1969~1909년) 조선총독부 미술관

     

    이후로 이곳은 내내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여 있었으나 2006년 건청궁이 복원되며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을미사변 후 꼭 111년만인데, 만일 고증이 정확해 건청궁의 건물들이 옛 주초 위에 복원되었다면 을미사변 때 민왕후가 살해된 장소는 장한당 정화당(正化堂) 뒷편 살구나무 아래 부근인 것이 확실하다. 물론 당시에는 이 살구나무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건청궁 건물들은 처음에는 너무 풋내가 풍겨 낯설더니 이제는 제법 세월의 더께가 묻어 고풍스럽다.  

     

     

    명성황후가 죽은 장소 / 왼쪽으로 보이는 처마는 장한당 정화당이다.
    곤녕합에 본 정화당 / 뒤로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와 협길당도 보인다.
    왕의 생활실 정화당
    건천궁의 미려한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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