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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과 별기군 훈련소가 있던 평창동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3. 8. 15. 23:40
평창동은 강남이 생겨나기 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촌의 지존으로 여겨지는 동네다. 아니 강남 부자들이 탄생한 후, 오랫동안 '강남=졸부'라는 클리셰가 존재했던 반면 평창동은 원래 부자였던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강남 사모님'은 웬지 복부인의 냄새를 풍기지만, '평창동 사모님'은 격(格)을 지닌 안주인과 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것은 드라마의 영향도 클 듯하니, 예전 드라마 속 평창동 사모님은 꼭 전화가 오면 점잖은 목소리로 "예, 평창동입니다"하는 멘트와 함께 받았다.
평창동은 그렇게 오랫동안 부촌의 대명사로 쓰였다. 그리고 이곳은 성(城) 같은 규모의 단독주택이 대부분인지라 세금과 관리유지비가 장난이 아닌 까닭에 누구나 돈이 생기면 들어갈 수 있는 강남 럭셔리 아파트들과 달리 원천적 수입이 보장되는 사람이 아니면 거주하기 힘든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졸부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생겨난 듯도 하다.하지만 평창동이 원래 부자 동네거나 양반가는 아니었으니 1.21사태(1968년 북한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사건) 전까지는 민가가 거의 없는 동네였고 평창동이라는 동명(洞名)이 생겨난 것도 1970년 이후였다. 원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속했던 이곳은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1970년 5월 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로 구평동이 평창동으로 바뀌었다. 구평동의 명칭은 구기동과 평창동을 합친 말이라고도 하고, 옛 군창(軍倉)이 있던 동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는데, 어느쪽이 되었든 옛 평창(平倉)에서 기인한 것은 분명하다.
평창은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외곽 방위를 맡았던 총융청(摠戎廳)의 창고로서, 북한산성 주둔부대와 유사시의 식량을 저장하던 곳이었다. 구한말 민씨 척족에 의해 선혜청이 관리될 때 이곳 평창도 호조 선혜청(宣惠廳) 산하에 들어간 듯하나 원래는 병조의 관할이었다. 구한말인 1881년 봄에 창설된 신식부대인 별기대(別技隊=별기군)가 이곳 평창동에 설치된 것도 총융청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는데, 게다가 녹봉을 지급하는 선혜청 평창이 가까웠던 터, 별기대 군사들은 훈련이 힘들기는 했어도 배 곯을 일은 없었다.
별기군은 일본에서 고빙된 일본 육전대(해벙대) 소속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소위가 교관을 맡아 그간 일본이 습득한 프로이센 식의 훈련을 시켰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총을 메고 뛰느라 먼지가 날려 공중을 덮으니 장안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일이라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었다. 그간 조선에서는 없던 훈련법인 것이었다. 하지만 구식군대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은 상대적으로 찬밥이 되었는데, 그나마 찬밥덩이조차 주지 않자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근세 조선의 역사를 꼬이게 만든 1882년의 임오군란이었다.
그밖에도 평창동 부근에는 연산군의 놀이터인 탕춘대와 인조반정의 자취가 어린 세검정, 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 옛 신라시대 절인 장의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당시의 건물과 풍광은 모두 사라지고, 동네에서 보이는 북한산 주봉(문수봉·보현봉)과 형제봉, 인왕산의 빼어난 절경이 현재 평창동 부촌의 명예를 견인하고 있다.
말한 대로 조선시대 이 일대에는 군부대(총융총)만 존재했을 뿐 마을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시대를 넘어 근자에까지 이어졌으나, 1.21사태 이후 청와대 뒤쪽으로 민가가 형성되는 편이 오히려 무장공비의 방어에 유리하다 의견에 따라 주택지가 조성되었다. 지금의 평창동이 생겨나게 된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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