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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짜장면 위안스카이, 황제가 되려는 시대착오적 꿈에 빠지다 I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의 우화 2023. 6. 10. 18:35

     

    우리나라 최초의 짜장면 집 공화춘(共華春)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 부연하자면, 이 건물의 효시는 산동회관(山東會館)으로, 현재의 자리가 아닌 청국 조계지에 음식과 호텔의 혼합형 숙소인 객잔(客棧)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다 1911년 산둥성 출신의 회교 우희광(于希光, 1886~1949)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재개업하였고 이듬해 탄생한 중화민국을 기려 '공화국의 봄'이라는 뜻의 '공화춘'으로 이름을 바꿨다.

     

     

    공화춘은 지금은 짜장면박물관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의 결과로써 탄생한 중화민국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이로써 중국은 4천년 이상 존속돼 온 제왕의 통치가 사라지고 민주주의의 나라가 되었으니, 이는 충분히 기릴만한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지금의 대륙 본토는 다시 제왕적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청조(淸朝)를 멸망시킨 이 신해혁명의 배경에는 쑨원(孫文, 1866~1925)과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있었다. 흔히 신해혁명은 쑨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위안스카이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실질적으로 선통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린 것은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북양군(北洋軍)이기 때문이었다.

     

    182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위안스카이가 오장경 휘하의 하급장교로 조선에 오게 된 이야기, 이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제압하여 북양대신 이홍장의 눈에 들게 된 것과, 조선에서 10년 동안  감국대신(監國代臣)으로 군림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이야기, 아울러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기 위해 행한 온갖 못된 짓들, 그리고 1865년 청일전쟁 직전 일본군들이 진주하자 걸음아, 나 살려라 청국으로 부리나케 내뺀 이야기는 앞서 대강 훑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놈은 억세게도 운이 좋은 자였으니, 중국 귀국 후 특별히 설 자리를 찾지 못하던 그는 1901년 리훙장이 죽으며 공석이 된 북양대신의 자리를 꿰차며 일약 북양군벌의 일인자로 떠오르게 된다. 

     

    1899년 산둥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조를 붙들어 일으키고 서양세력을 멸한다)의 기치를 건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의화단의 편을 들지 않았다. 1900년 6월 의화단은 마침내 북경으로 들어와 외국 주재기관 등을 파괴하고 서양인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이에 영국 · 프랑스 · 미국 · 독일 · 러시아 · 이탈리아 · 일본 등 6개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의화단의 진압에 나섰고, 청나라 군대는 자국민 보호의 입장에서 서양군대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결국 의화단과 청나라 군대는 박살이 났는데, 이때 의화에 편에 서지 않았던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은 중원 유일의 군벌이 되었다. 꼭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의화단과 싸우는 서양연합군
    영화 <라스트 임페러> 속의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인생유전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착용하였던 파텍필립 손목시계 / 지난 5월 24일 홍콩 경매에서 푸이가 착용했던 시계가 67억원에 낙찰되었다. 치열한 호가경쟁이 있었다고 한다.

     

    1911년 위안스타이는 그 힘을 바탕으로 (청조를 배신하고) 선통제를 폐위시키는데 성공하는데, 급기야 중화민국 초대 임시총통을 지낸(1911~12년)  쑨원마저 끌어내렸다. (이것을 보면 그는 어지간히 권력욕이 강한 놈이다) 쑨원은 실제적 중국혁명의 지도자였음에도 애써 이룬 민중혁명이 두 쪽 날까 두려워 다른 저항을 삼가고 순순히 총통의 자리를 양보했다. 

     

    대신하여 중화민국 임시 총통 자리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전국 철도감독에 임명했다. 말하자면 임시 대통령직에 있던 사람을 철도청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아울러 국민당을 탄압하였으니, 자신의 전횡에 항거하는 국민당 임시 대리인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고(1913년 3월) 반대 데모를 무력 진압했다. 그리하여 1913년 10월 정식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했는데, 말이 공화국의 총통이지 실제적으로는 과거 봉건적 제왕으로의 회귀였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위해 민주공화국 헌법인 중화민국임시약법을 폐지하고, 자신에 뜻에 반대하는 국민당을 해산시켰다. 봉건적 왕정을 없애고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이 신해혁명이었음에도, 그는 다시 대총통으로 이름만 바뀐 제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좀 더 나아가 정식으로 황제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그 많은 피를 흘려 이룬 혁명이거늘 이제 와서 다시 과거로의 회귀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국민들의 거세지자 외세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이 황제 등극 용인의 댓가로 요구한 21개 조의 요구 사항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조. 산둥 지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이익을 일본 정부에 넘겨준다.
    제2조.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 지역에 대해 일본이 우선권을 가진다.
    제3조. 중국은 일본과 한야평공사를 설립하며, 광산 채굴에 있어 일본의 허가를 받는다.
    제4조. 중국 연해의 도서와 항만은 타국에게 양도할 수 없다.
    제5조. 중국 군사와 재정 부분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중국 경찰과 군대에도 일본인을 고용하고 일본이 무기를 공급한다.

     

    이러면서까지 황제가 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드시겠지만, 제왕이라는 시대착오적 꿈에 빠진 위안스카이는 제위(帝位) 외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1913년 각국 외교관들과 찍은 사진

     

    그렇다면 그는 황제가 되었을까?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못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래의 사진은 그 분기점쯤이 되는 시점의 것이다. 흔히 이 사진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식 광경으로 소개되지만, 그렇지는 않고 그 직전인 1914년 12월 21일에 찍은 것이다. 중국의 황제들은 매년 동짓날에 천단(天壇)에서 천제(天帝)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그는 아직 정식으로 황제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북경 천단에 나아가 제례를 올렸다. 

     

     

    베이징 천단공원

     

    「천자는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사직에 제사 지낸다(天子祭天地諸侯祭社稷)」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하늘에 제사 지낼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중국 횡제만이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 대총통 자리에 있는 몸임에도 하루라도 빨리 황제 행세를 하고 싶은 욕심에 동짓날 천제(天祭)를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 급조한 까닭인지 행사가 빈약해 보인다. (옷부터 허접하다) 특이한 것은 위안스카이의 표정이다. 사진 속의 그의 얼굴은 황제답지 않게 무척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기 짝이 없다.

     

     

    초조하게 행사를 기다리는 위안스카이
    천단으로 올라가는 위안스카이
    천고(天鼓)를 두드리는 위안스카이
    이 사진의 표정이 특히 압권이다.
    그래서인지 이 확대 사진은 많이 돌아다닌다.
    중국인이 편집한 사진을 가져왔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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