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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사투르누스 신전과 서울 선농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1. 19. 00:14

     

    우리가 자주 보는 로마 파란티네 언덕 포로 로마노의 고대 건축물은 사투르누스(Saturnus)의 신전의 흔적이다. 사투르누스는 농업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에 해당하며, 토요일 Saturday는 사투르누스에서 유래되었다. 토성(土星)의 이름 새턴(Saturn)도 사투르누스에서 유래되었는데, 우연찮게 동양 달력의 토(土)요일과 상통한다. 동양의 요일인 일·월·화·수·목·금·토는 음양오행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육안으로 관측이 가능한 태양계의 천체, 태양·달·화성·수성·목성·금성·토성에서 유래되었다. 

     
     

    로마 사투르누스 신전
    사투르누스 신전의 복원도
    사투르누스 신전의 시뮬레이션 그림

     

    사투르누스 신전이 이처럼 로마시의 한복판에 지어졌음은 고대 사회에 있어서 농업의 신이 차지한 위치를 말해주는데, 사투르누스를 기리는 사투르날리아라는 농신제(農神祭)는 로마에서 가장 큰 규모의 축제로 오늘날까지도 그 풍속이 남아 있다. 사투르누스는 유피테르(제우스)에게 쫓겨난 후 사투르니아라는 도시를 세워 라티움 민족의 왕이 되었으며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는데, 그가 다스렸던 시기는 죄악이 적고 풍요로웠던 시기로 '골든 에이지'(황금기)라고 칭해진다.  
     
    농업의 신을 존중하는 분위기는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으니,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듣는 종묘사직이 어쩌고 하는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종묘는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장소이며, 사직은 토지 및 곡식에게 제사드리는 사직단을 말함이니, 종묘사직이 위태롭다거나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곧 나라 자체의 존망을 의미한다. 사직단 제례는 국사단과 국직단이라는 두 개의 제단에서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 대해 봉사했다.  
     
    아울러 종묘사직이 어쩌고 하는 말은 농업이 천하의 대본(大本, 가장 큰 근본)이었던 조선사회에 있어 사직단이 종묘에 버금가는 중요한 장소였음을 의미한다. 그 사직단은 서울 종로구 사직로 89 사직공원 내에 위치하는데, 막상 가서 보면 썰렁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실망하기 쉬우나 이것은 일제가 조선을 격하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대를 공원화하며 제단 주변 13개 주요 전각들을 훼철시킨 결과로써, 과거에는 종묘와 같은 신비로운 신전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남아 있는 사직단의 정문
    사직단 /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사상에 의해 네모난 방형(方形)으로 만들어졌다.

     

    농경신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 여긴 흔적이 서울 제기동에도 남아 있다. 서울 동대문구 무학로 44길의 선농단(先農壇)이 그것으로, 고대 중국 전설시대에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신농과 후직의 일화는 로마신화의 사투르누스와 유사하다)  조선조 왕들은 이곳에서 풍년을 기원하고 선농단 남쪽에 있는 밭에서 직접 경작을 하면서 권농에 힘썼으며, 왕비는 성북동 선잠단(先蠶壇)에서 직접 누에를 치며 잠업(蠶業)을 격려했다. 창덕궁 후원에는 왕이 농사를 지은 청의정(淸漪亭) 논과, 왕비가 관리했다는 뽕나무가 있기도 하다.  

     
     

    바로 그 뽕나무

     

    선농단에 대해서는 <태종실록>에 선농단의 형태가 옛 제도와 맞지 않는다며 설왕설래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한양 정도(定都)와 함께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종실록>에 선농단의 소나무 식재, 유(壝, 제단)의 정비, 담장의 축조에 대해 기록된 것을 보면 세종조에 이르러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선농단은 조선조 내내 왕실 혹은 민간에서 신농과 후직에 대한 제사가 지내졌으나 1908년 일제에 의해 사직단으로 신위가 옮겨진 후 공원화되었고 선농단 제단 자체도 훼철되었다. 
     
    해방 후에는 선농단 자리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들어섰고 이후 주거지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선농단은 위치뿐 아니라 형태마저 왜곡된 채 제기동 주택가 한 구석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이 제단에 대한 제례의식이 1998년부터 동대문구청에 의해 재개되며 복원에 시동이 걸렸고, 비교적 최근인 2001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그간 주택가에 선농단 부지가 침탈된 탓에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근에 복원되었는데, 아래 선농단역사문화관 내의 '시간의 방'에서는 그동안 시간적 흐름과 현재의 공간에 대한 설명이 시공을 초월해 내레이션 된다. 
     
    2015년 건립된 선농단역사문화관 선농단 관련 전시물 관람과 관련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전시장이다. 이 건물을 설계·건축한 사람은 건축가 노윤경으로 그는  전시장을 지상 선농단의 레벨과 지하 전시장의 레벨의 '두 개의 켜'로 공간이 분리되도록 설계하였는데, 그러면서 지하전시장 중앙에 '시간의 방'을 두어 두 개의 켜가 연결되는 공간을 연출했다. 이 '시간의 방'은 외부로 열린 창을 통해 자연광을 끌어들이고 자연환기를 유도시킴과 동시에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통해 농사짓는 절기를 느끼게 만든 특별한 공간이다. 선농단역사문화관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등을 수상하였다. 

     
     

    선농단 터에 남은 청량대 표석 / 일제는 선농단을 훼철한 후 그 자리에 청량대 공원을 만들어 민족문화의 말살을 기도하였다. 광복과 함께 주민들에 의해 쓰러뜨려진 표석이 남아 있다.
    이후 복원된 선농단
    선농단은 2001년 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서울 선농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선농단 아래 건립된 3,933㎡ 규모의 선농단역사문화관
    '시간의 방' 안내문과 그 아래로 보이는 중정(中庭)

     

    '시간의 방' 안내문에 따르면 현재의 선농단은 조선시대부터 존재하던 원래의 단과는 위치와 크기가 변형된 것으로 선농단의 본래 위치는 현 선농단 향나무의 남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문화관 '시간의 방'에는 원래의 위치가 투영돼 있다) 선농단 옆에는 수령 600년에 가까운 천연기념물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향나무는 대게 휘어 자라는 경향이 있음에도 곧게 치솟은 높이 13m의 이 나무는 장소의 신령스러움을 부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 향나무와 서울 선농단 안내문
    서울 선농단 향나무 안내문
    선농단역사문화관 내의 신농(神農)과 후직(后稷)
    선농단역사문화관 내의 제(帝)신농씨와 후직씨 위패
    제신농씨와 후직씨에 대한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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