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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신정변 격동의 46시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11. 14. 00:22

     

    *  '고종과 민비가 도망갔던 길을 따라 다시 들여다본 갑신정변의 그날'에서 이어짐.

     

    박영효가 구축했던 돈화문 방위선은 그렇게 속절없이 뚫렸다. 돈화문을 돌파한 원세개의 청군은 곧이어 인정문을 지키던 공사관 군인들과 충돌했으나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 일본군들이 목숨까지 걸고 싸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일본군들은 청군의 사격에 맞서 총을 쏘기는 했지만 중과부적이라 여긴 듯, 몇 발의 대응사격 후에는 곧바로 인정문 담장을 타고 달아나 버렸다.  
     
     

    청군과 일본군이 잠시 교전을 벌였던 인정문
    인정문을 돌파한 원세개의 군대가 이곳 인정전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인정문을 돌파한 청군은 서재필이 지키는 선정문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이곳에서 원세개는 크게 당황해야 했다. 선정문 앞의 조선군은 20여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의 대부분은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 출신의 군인들이었고 처음부터 혁명에 가담한 결기 가득한 자들이었던 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선정문 뒤에 숨었다가 번갈아 몸을 내밀며 총을 쏘아댔고, 이에 청군은 진격을 중단한 채 문자 그대로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선정문 쪽에서의 사격이 멈췄다. 총알이 다 떨어진 것이었다. 무슨 총알이 몇 방 쏘지 않고 다 소진됐는가 싶겠지만, 원래부터 엉망으로 관리돼 온 무기 체계가 원인이었다. 겉멋에 치중했던 고종은 무기도 겉멋에 치중하였던 바, 타운센트와 같은 무기상들이 권하는 영국·프랑스·프로이센의 총포들을 제 취향 대로 들여왔다. 그 총들에 쓰일 총알은 당연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서로 호환도 안 되었다. 게다가 관리가 미흡했던 탓에 몇몇 총들은 아예 격발조차 되지 않았다.* 
     
    * 총기의 관리 또한 수입해 온 그때뿐이었으니 박영효, 서광범 등이 화기도감 무기고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녹슬 대로 녹슬어 있었다. 하지만 쿠데타 군은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 아래 삼청동 금융연수원 앞의 화기도감 터 표석은 원래 종로 정독도서관 앞에 있던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금융연수원  안에 있는 구한말의 무기제작소인 (그러나 하나도 생산한 것이 없는) 번사청과 연계해 옮겨진 듯하나 원래의 정독도서관 자리가 올바른 위치이다. 
     
     

    삼청동 금융연수원 앞의 화기도감 터 표석
    프로이센 투구를 쓴 대한제국 시절의 고종 / 황제와 황태자가 프로이센 투구에 일본식 유니폼을 입었다.(좋아 보이는 건 다 가져다 쓴 듯) 투구는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을 통해 수입해온 것이다.

     
    조선 수비대의 사격이 멈추자 엎드렸던 청군은 다시 일어나 공격을 해왔고 이때부터 정변의 무리들은 정신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원세개의 청군은 함양문을 통해 들어온 오조유의 부하들과 합세해 궐내의 사람들에 향해 네 편 내 편을 가리지 않고 총질을 해댔는데, 그 아비규환 속에 김옥균이 다시 눈을 돌려 바라보니 관물헌에 있던 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았다. 주상전하를 찾는 김옥균의 다급한 목소리에 누군가 후원 쪽을 가르켰다. 왕이 그쪽으로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창덕궁 함양문(오른쪽)과 그 옆의 후원 가는 길 / 당시에는 이 길 외에도 후원 가는 길이 많았을 터, 고종은 관물헌 뒤쪽 길을 따라 후원으로 달아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옥균을 비롯한 혁명의 무리들이 곧 고종을 뒤쫓았다. 만일 고종이 청군에 피체되기라도 한다면 혁명은 한마디로 끝장이었다. 그들이 고종을 붙잡은 것은 후원의 중간쯤인 승재정 부근이었다. 고종은 필시 북장문을 통해 달아나고자 했을 것이나, 내시에게 업혀 있었으므로(뛰었다면 창덕궁를 벗어날 수 있었을 터임에도) 멀리 가지 못하고 승재정 부근에서 다시 혁명의 무리에게 포획된 것이었다.  

     

     

    승재정
    승재정과 다리 / 당시는 연못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오른쪽에 존덕정이 보인다.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과 폄우사 / 고종과 혁명의 무리는 지금처럼 존덕정 앞 돌다리를 건너지 않고 승재정 앞 다리를 건너 연경당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전하, 안심하소서. 지금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홍영식이 이렇게 말했으나 고종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무리들이 그것까지 챙길 겨를이 없어 보였으니,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오직 임금뿐 중전과 세자, 세자빈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임금은 그들을 찾거나 안위를 묻거나 하지 않았다. 고종이 뭔가 알고 있음이 분명했으나 중전과 세자의 안위를 책임지지 못한 무리들이 그것까지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옥균은 후원의 연경당에 일단 고종을 들여다 앉히고, 뒤쫓아온 서재필과 하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에게 임금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어 박영효와 그의 형 박영교, 홍영식 등에게 민왕후의 해방을 물었으나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답을 내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중전과 세자의 가마는 나중에 찾기로 하고...."

     

    김옥균이 중전 찾기를 뒤로 미루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려는데, 총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벌써 청군이 후원에 이른 듯싶었다. 그리고 그때 서재필이 들어와 고종이 계속 도주를 시도하고 있음과 청군이 가까이 왔음을 동시에 알렸다. 이제는 다시 달아나는 것이 급선무일 뿐 달리 대책을 세우고 어쩌고 할 짬이 없었던 바, 옥균은 홍영식과 박영교에게 하사관들과 함께 임금을 모시고 먼저 달아나라 일렀다. 그리고 홍영식에게 청군을 피해 인천으로 오라는 귓속말을 건넸던 바, 최악의 경우 임금을 데리고 바다라도 건널 기세였다.

     

     

    급박한 밀담이 오갔던 연경당 사랑채
    창덕궁 연경당 / 나무위키 사진
    창덕궁 연경당 / 공유마당 이미지 사진

     

    그 무렵 민왕후는 세자, 세자빈과 함께 해동촌(海東村) 각심사(恪心寺)로 향하고 있었다. 각심사는 현 노원구 월계동에 있던 작은 사찰로, 근방의 초안산은 조선시대 내내 조성돼 온 내시와 상궁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는 곳이었다. 민왕후는 도주에 대해서는 임오군란 때의 학습효과가 있었던지라 누구보다 빠르고 능란하게 행동할 수 있었는데, 각심사를 택한 것은 자신을 보필하던 궁녀의 의견에 따른 일로써, 그곳이라면 다른 어느 곳보다 안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각심사가 있던 곳에 자리한 각심재
    각심재는 1930년대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한 집으로 원래는 종로구 경운동에 있었으나 1994년 도시계획에 밀려 지금의 장소로 이축됐다.
    각심재 표석
    근방의 초안산에서는 이와 같이 버려진 묘표와
    문인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편 후원의 북장문을 빠져나온 고종은 인천으로 가자는 홍영식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고 명륜동 북묘(北廟)로 갔다. 임오군란 때 충주로 도망갔던 민왕후가 달고 들어온 무당 진령군의 집이자 관우 사당인 곳이었다.(☞ '임오군란과 진령군') 이에 홍영식, 박영교 외 7명의 하사관들이 북묘에 동행하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그곳에서 그들을 뒤쫓아 온 오조유의 군사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이 데려가려는 고종을 필사적으로 막아서며 어의(御衣)를 붙들고 매달렸다. 하지만 고종은 홍영식을 뿌리치고 사인교에 타고 떠나버렸고, 남겨진 두 사람은 청군의 총칼에 7명의 하사관들과 함께 처참하게 살해됐다. 

     

     

    홍영식이 살해된 북묘
    1902년 동판화에 그려진 북묘의 위치(오른쪽 위 □)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의 거대한 북묘묘정비는 원래 명륜동 북묘에 있던 것이다. / 임오근란과 갑신정변 때 관우의 혼백이 나타나 국왕 부부를 구해주었다는 고종의 개똥 같은 글을 새겼다.

     

    김옥균은 다른 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정난교, 이규완 등) 및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함께 북장문을 빠져나와 일본공사관과 제일은행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나눠 숨었다가 인천으로 가 일본행 배에 올랐다. 이것이 갑신정변의 종막(終幕)으로 흔히 '3일 천하'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46시간이 약간 넘는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이들의 나머지 생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꼭지를 통해 자세한 설명을 달았던 대로 박영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구하고 불행했는데, 그중에서도 김옥균은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일본 망명 시절의 김옥균과 그의 글씨 / 김옥균은 일본 망명 시절 글씨를 팔아 생활할 정도로 명필이었다.
    김옥균이 사용한 것이라 전해지는 바둑판의 뒷면 / 다방면에서 뛰어났던 옥균은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니 그의 기력을 알 수 있는 기보가 1992년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됐다. 그는 본인방 슈에이와의 대국에서 6점 접바둑을 두어 230수만에 불계승을 거둔 적도 있는데, 아마 4단 정도의 기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잘 알려진 대로 김옥균은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민왕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1894년 4월 12일 청나라 남양함대 소속 웨이징하오(威靖號)에 실려 인천까지 왔고, 그 이튿날 조선 기선 한양호로 바꿔 타고 서울 양화진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루에서 부관참시되었다. 몸뚱이는 여섯 조각났고 효수된 머리 위에는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홍종우의 글씨가 걸렸다. 그의 조각난 시신은 전국으로 보내 조리돌려졌으며 간(肝)이 내어진 몸뚱이는 한강에 던져졌다. 각국 외교관들은 이 전근대적인 행위를 비난하며 말렸지만 조정은 듣지 않았고, 고종은 오히려 이 날을 축하해 대대적인 잔치를 벌였다.

     

     

    양화진에서 부관참시된 김옥균의 목

     

    김옥균은 안동김씨 양반가의 자손으로 22세 때인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로, 이후 홍문관 교리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며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로 부각됐다. 박영효는 그보다 더한 귀족 부마도위(駙馬都尉, 임금의 사위에게 주어지는 별호)로, 철종의 부마이자 고종의 매제이며 이로 인해 일찍이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를 받아 삼정승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집안 또한 어머어마했으니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개화파의 거두로 유명한 우의정 박규수였다.

     

    홍영식은 더욱 화려하였으니 그의 아버지는 당대에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이요, 자신은 18살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던 바, 그야말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서광범 또한 스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하니 증조부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본인은 21살에 문과 급제하였다. 따라서 그들 모두는 양반 중의 양반이요 당연히 최상의 기득권자였지만, 그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채 조선의 자주독립(청나라로부터의 완전 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던 것이었다. (갑신정변은 무엇보다 그 점에 가치가 실린다)   

     

    개혁이 힘든 것은 기득권층이 손에 쥔 권리를 놓지 않기 때문이나,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버리고 오직 조선의 미래를 위해 몸을 내던졌다. 조선의 그 누구보다도 훨씬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불행해졌는데, 그것은 그들의 나라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조선은 국왕과 민씨 척족을 견제할 세력이 전부 소멸되고 말았던 바, 이후 조선에서는 더 이상의 개혁세력이 출현하지 않았고, 국정은 더욱 부패로 치닫다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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